우리의 푸른 봄은 콩트에서 시작되었다
맥베스 3인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 실패는 처절하지 않았다. 관객이 차지 않은 공연장을 마주한 세 인물은 슬펐을 것이다. 작품을 기획하고 올리는 입장에서는 공연을 매개로 많은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콩트’라는 한 공연을 보러 오는 소수의 관객 덕에 처절하지 않다.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실패는 진정한 의미의 실패인가?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위기를 넘어가며 굽이굽이 살아간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고, 현재 내 처지를 탓할 수도 있다.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는 유순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맥베스의 3인도 많이 후회하고, 탓했을 것이다. 10년이라는 긴 세월, 아니 영겁 같은 세월 동안 이들을 살을 맞부딪치며 온몸으로 콩트를 했다. 그러나 해산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사회는 냉정하기에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그들이 실패했다고, 늦었다고 탓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실패라는 단어로 모든 노력과 시간을 무화하는 건 가당하지 않다. 청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의 연극 연출가 왕충 (王翀)은 ‘ 청년’을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창출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10화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는 각기 다른 콩트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콩트를 창발 하게 된 아이디어, 엮인 이야기, 본 극까지 등장한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콩트라는 매체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청년이자 청춘의 상징이다.
나는 청년과 청춘, 이 두 단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잠깐 바람에 휩쓸리고, 다른 곳에 당도하게 되더라도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만회는 되지 않아도, 청년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해산을 맞이한 이 셋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진정한 청춘이다. 넘어져도 되는 청춘,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되는 청춘. 푸른 봄을 만끽하고 몸으로 맞이하는 청춘 (青春).
삶은 참으로 얄궂어서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내 방식’대로 이야기를 쌓아 올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콩트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 극의 마지막이 ‘콩트가 시작된다’고 천명했듯이.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치유물, 위로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위로를 자양분으로 삼아 전진하자는, 어쩌면 판에 박힌 이야기로 매조지고자 한다.
다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지난한 일상을 살고, 나름의 콩트를 만드느라 오늘도 수고하셨다.
청춘, 젊음은 흔한 소재이기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생애주기로만 보자면, 청춘에 관해 쓸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2022년이 반을 향해 흘러가며, 또 나이를 실감한다. 그래서 틀에 박힌 글을 작성했다. 이 좋은 드라마를 이렇게 짧은 글로 갈무리하려니 섭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