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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29. 2023

선비 같은 성공회 주교

이언 머레이(2018), 정상윤 옮김, <J.C라일>, 복 있는 사

존 찰스 라일 주교의 평전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인용한 문장과 정리한 생각을 써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라일이 목회자의 사역을 낮추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목회가 특정한 재능을 요구하는 특별한 직무라고 믿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회사, 영국 종교개혁사, 기도서, 교리문답서 및 기독교의 증거들을 거의 모르거나 전혀 모르는 그저 경건한 사람, 성경을 알고 복음을 말할 줄 아는 정도의 사람을 목회로 이끌려”하는 입장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저는 목회직이 이보다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언 머레이(2018), 정상윤 옮김, 《J. C 라일》, 복 있는 사람 203쪽.

잉글랜드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위의 책에서는 잉글랜드 국교회로 번역함)의 리버풀 교구 주교이셨던 존 찰스 라일 주교 평전에서 인용을 했습니다. 학문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제서품을 주지 않음으로써 리버풀 교구에서 목회하는 사제들의 학문 수준을 높인 라일 주교님의 냉정한 판단력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 내동교회 김학윤 다니엘 보좌신부님께 여쭈어보니, 종교개혁 때부터 성공회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의 영적 복지뿐만 아니라 지상의 복지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실제적이고 철저하게 전도구 일을 했다.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밝고 힘찬 찬송을 부르는 예배는 단순하고 강력했으며, 거의 매번 회중석의 소년소녀들을 위한 권면으로 마무리되었다. 라일은 부모들에게 어린 자녀들을 데려오길 권했다. 현재 이보다 더 평온하고 정돈된 전도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린 손님인 내게는 몸집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지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크리켓 선수였음-라일 신부님이 좀 무서워 보였지만, 사실은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어서 금세 집처럼 편안해졌다. 신부님이 길을 나서면 아들들이 기쁘게 동행했다. 집안 분위기는 우리집처럼 경건했다. 매일 성경을 읽었고, 가족기도는 다소 길었으며, 신앙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가식 없이 건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볼 때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았고, 어쨌든 당시에 그 체제를 트집 잡을 생각은 더욱 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성공회 주교인 라일 주교의 평전에서 발췌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좋아하셔서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에, 달리기 시합을 시키고 간식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가지고 다니는 단 것으로 전도구를 다스린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언 머레이(2018), 정상윤 옮김, <J. C 라일>, 복 있는 사람 162-163.

라일 주교 평전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복음주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는 글입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에버크롬비 광장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에서 예배드리는 대신, 리처드 홉슨이 20년 전 지하실에서 시작한 교회에 정착했다. 주교는 1881년 3월 13일에 처음 교회를 찾았고, 주일 저녁 예배 때 아일랜드 교회선교회를 위해 설교하고 성찬을 집전했다. 관할 사제였던 홉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전도구 역사상 처음으로 잊지 못할 저녁이었다.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주님의 임재를 참으로 느꼈다. 예배는 6시 30분에 시작하여 10시에 끝났고 주교님도 그때 끝났다. 그는 제의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 사람의 손을 중시하는데, 성찬을 받은 교인 중에서 6명 중 5명이 노동자더군요. 세인트 너세니얼 교회는 성공회가-정상윤 번역가는 Church of England, Anglo를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국교이기 때문에 국교회라고 번역을 하셨지만, 인용하는 글에서는 성공회라고 고쳐서 인용함-노동자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제시할만한 대답입니다.”

 

라일에게 “노동자”란 일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키는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노동자가 초라한 집에 살 수도 있고, 탄갱이나 면직공장이나 주철공장이나 부두나 화학 작업장에서 온종일 일한 탓에 거칠고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똑같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입니다.

 

라일이 후에 더비 교회협의회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이들이 “아주 영세한 가게 주인” 및 “기능공”들과 함께 세인트 너세니얼 교회를 이루고 있었고, “부자는 한 명도”없었다. 라일은 395명에게 성찬식 떡과 포도주를, 그중 절반이 남자로서 라일은 “떡과 포도주를 받는 손을 보고 그중 다수가 부두노동자요 주물공장 사람들인 것”을 알았다. 리처드 홉슨의 회중은 라일을 좋아했고, 라일도 그들을 좋아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노동자가 “신부님은 주교일 리 없어요. 뭔 말을 하는지 내가 다 알겠다니까.”라고 소리치는 일도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인트 너세니얼 교회는 라일 가족의 영적 가정이 되었다. 홉슨은 그가 “주교의 날개로” 교회를 보듬어주었고, 그것이 “나 자신과 내 사랑하는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라고 했다. 후에 라일이 연설을 하러 전도구 인근 저탄장을 찾아오자 일꾼들은 “그가 올 때와 갈 때 모두 요란한 환성을 질렀다.”

접근하기 어렵다고 오해를 받던 주교는 날마다 운동 삼아 부잔교까지 붐비는 거리를 산책했고, 성직자 누구나 찾아올 수 있도록 매주 화요일 오전을 비워두었다. 후임자는 체바시(Francis J. Chavasse)가 라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리버풀과 교구에 대한 그의 애정은 열정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쉴 생각을 하는 나이에- 책날개의 전기정보를 읽어보니, 라일 주교는 1816년 영국 매클스필드에서 태어났으며, 1842년 사제서품을 받아 성 토머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880년에 리버풀 교구의 주교가 되었음.―, 주교 사역을 시작했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며 손으로 쓸 수 있는 한 “서두르는 법이 없이 쉬지 않고”계속 일했다.

 

1882년 웨슬리 감리교 협회는 라일 주교의 협조를 받아 노동자 숙소조합(Public House Company)을 시작했고, 코코아나 간단한 식사가 마련된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매일 최소 3만 명이 이곳을 이용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언 머레이(2018), 정상윤 옮김, <J. C 라일>, 복 있는 사람, 242-244, 238

민주노총 조합원으로서 밑줄을 친 문장입니다.



라일 주교 평전인 <J.C. 라일>(이언 머레이 씀, 정상윤 옮김, 복 있는 사람)을 모두 읽음.

성공회 주교로서 성공회의 개신교로서의 정체성 곧 복음주의 전통을 고집한 완고함과 사제는 열정이 아닌 성공회의 교리, 교회사, 성공회 기도서 곧 전례, 서양 기독교 지식인들의 공용어인 라틴어, 헬라어(신약성서를 헬라어로 씀)에 걸친 학문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리버풀 교구의 주교로서 학문이 없는 자는 사제서품을 주시지 않는 엄격한 원칙은 본받을만하다.

실제 이분은 학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튼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 등을 배우셨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전학 1등(Cum Laude 직역하면 함께 칭찬함)을 하실 정도로 학자로서 살아오신 분이기도 한데(한국상황에 빗대면 대한성공회 관구장이자 서울교구장이신 이경호 베드로 주교님이 고등학생 때부터 한문학을 꾸준히 공부하여 대학교에서 한문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거임!)으로 졸업하였다.

이분의 유산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39년에 나치독일의 공군들이 폭격을 하는 바람에 소실된, 라일 주교가 살아계실 적에 처치하우스(교회집)에 기증한, 무려 6,000권이나 되는 책이었다. 이분은 1816년에 태어나 1900년에 별세했으니까 94년에 걸친 지식을 사회공동체에 기부한 것이다.

꼬장꼬장한 선비정신, 이희승 선생님이 딸깍발이에서 보여주신, 자신의 사상과 양심을 끝까지 지킨 선비정신, 조지훈 시인이 지조론에서 보여주신,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따라 살아갈 뿐, 사리사욕을 멀리하는 정신인 지조를 지킴이 아닌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와 존 찰스 라일 주교 평전을 최근에 읽었는데, 휴대전화를 쓰지 못하는 대신에 독서시간이 늘어서, 대학생 때에도 문학수업으로써 느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욱 진지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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