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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애 Apr 01. 2024

관용표현, 어머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이집 낮잠


태어난 지 1년 6개월.


춘이를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재우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4주째 고민 중이다. 어린이집 원장님으로부터 낮잠 재우기를 시도해 보자는 제안을 받은 후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원래 내 일 처리 방법대로라면 고민을 짧게 하고 일단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직접 경험해 보고 별로다 싶으면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낮잠을 자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내 딸이라는 점이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면 7시에 일어나고 21시에 잠드는 기초 생활습관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설명해 줄 수도 없고, 6개월 후면 단유를 해야 하니 지금부터 엄마 젖 없이 잠드는 연습을 해보자는 응원도 닿을 길이 없다.


춘이는 "엄마 어디 갔어? 젖 어디 갔어?" 하며 눈물을 터뜨릴 것이 뻔했다. 낮잠 재우기를 섣불리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땐, 봄이에게 괜한 혼란을 줄 수 있으므로 번복할 수 없다. 입술을 쭉 내밀며 신중하게 검토했다. 전문가 인터뷰, 육아 서적을 찾아보고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정답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부터 싫었다. 복직을 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어린이집에 오래 있을 내 딸. 그 쓸쓸한 뒷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밟혀 육아휴직 중에는 집으로 데리고 와 낮잠을 재우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이집 낮잠 사고 기사 제목만 봐도 들숨에서 호흡이 멈췄다. 며칠 동안 황망한 마음을 느끼며 애도했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재운다는 결정에는 축축하고 습습한 모든 일들의 가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마치 큰 수술에 들어가기 전 보호자가 동의서를 작성하는 행위와도 같이 느껴졌다.


가타부타 기약도 없이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은 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펜을 들었다. 솔직하게 썼다. 갈팡질팡 대는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 알림장에 적어 보내기로 했다.


다음날, 담임선생님께서 손글씨로 답장을 주셨다. 씁쓸한 마음이 담긴 건조한 표현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춘이 가방에서 알림장을 집어 들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싶어요.





'-해 보고 싶어요.'


어미가 날아와 좌심방에 훅 꽂혔다. 상대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들었을 때 내가 관용표현처럼 썼던 문장 '네, 땡땡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에서 어미만 바뀐 그러나 결이 완전히 다른 문장이었다.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역지사지로 불리는 최고의 공감의 경지이다. 그 문장을 나는 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의 요구를 거절할 때 사용했다. '안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순결했겠으나 점점 굳은살이 배기고 본래의 의미는 휘발된 채 거죽데기만 남아있었다는 것을 담임선생님의 글을 읽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수동 공격적으로 사용했던 '땡땡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사무적이었다. 실제로도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 썼다. 내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으니 한 번 더 고려해 보겠다는 표현으로 거절의 의미를 전달하는 쿠션어이자 간접화법이며,고맥락 언어였다. 내 판단이 옳으므로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와 굳건함도 담았다. 거절하기 전 상대방을 한번 토닥여준다는 점에서 어쩐지 시혜적인 느낌도 있다. 약간의 거들먹거림도 희끗 비친다.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싶어.'

마치 '난 널 응원해. 그리고 같이 노력하고 싶어.'라는 고백조다.


우리 담임선생님의 문장은 내 딸의 가지런한 삼각 눈썹의 고운 결처럼 아름다웠다. 내 딸의 검은 눈동자처럼 맑고 또렷했다. 굳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양 입술을 꽉 쥐었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반사적으로 관용표현을 사골국물 우리듯 사용했던 나의 언어사용과 대조되며 더욱 빛이 났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온전히 믿고 춘이를 재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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