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뇌염 3차 주사를 맞을 때 춘이가 끝내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
놀이터에서 그네를 탈 때 춘이가 기다리던 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
오늘 아침도 춘이와 할머니는 영상통화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춘이가 발바닥을 보여줘도 할머니는 박수를 치고, 춘이가 당근 라페를 입안 가득 넣고 우걱우걱 씹으면 아기가 겨자씨도 먹을 줄 아냐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아침마다 펼쳐지는 둘 만의 로맨스를 지켜보다 살짝 말을 얹었다.
두 이야기를 듣자마자 엄마는 눈코입이 동시에 커지면서 핸드폰 액정을 뚫고 나올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춘아!
참지 마, 아프면 엉엉 큰 소리 내면서 울어.
양보 안 해도 돼, 봄이가 타고 싶은 만큼 타.
손녀를 향한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어쩐지 산뜻하지 못했다. 그 끈적한 사랑의 언어는 입체적 모양을 띄고 있었다. 앞면만 보면 되는 2차원의 평면도형이 아니라 옆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아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3차원의 입체도형이랄까.
내 엄마는 억척스럽게 부지런한 공자왈맹자왈 남편과 결혼해 삼 남매를 낳고 오랜 세월 참으며 살았다. 때맞게 드러내지 못한 슬픔과 억울함. 그 모래알 같은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모래성, 설움의 부피가 만져지는 듯했다.
할머니가 춘이에게 소리치듯 한 말은, 사실 할머니가 뒤늦게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의 자신에게 찾아가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해준 그 말을 고스란히 주어 담아 이번에는 내가 다정하게 건네주고 싶다.
엄마, 습관적으로 참지 마.
엄마, 같은 사람한테 두 번은 양보하지 마.
육아를 하다 보면 내가 춘이에게 하는 내 말을 내가 듣다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딸에게 매일같이 쏟아붓는 다정한 그 말들이, 나 자신도 겸해서 해주는 말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실은 내가 듣고 싶은 위로와 응원, 격려의 말을 딸에게 해주는 것이다.
춘아, 오늘 어린이집 다녀온다고 고생했어.
지애야, 오늘 어린이집 보내놓고 교과서 집필도 하고, 집 청소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한다고 고생했어.
춘아, 배불러? 배부르면 억지로 안 먹어도 돼.
지애야, 힘들어? 힘들면 억지로 안 해도 돼.
춘아,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줘서 고마워.
지애야, 춘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며 오늘 하루의 부모 역할을 끝까지 해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