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포기하고 눈을 치웠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새벽에 달리러 나갔는데 온통 눈밭이었다.
눈이 와도 달리는 열성 러너지만, 오늘은 달리지 않았다.
집 앞에서 마주친 어르신들 덕분에 달리기 대신 눈삽을 들었다.
처음에는 경비 아저씨 두 분과 청소아주머니 한 분인 줄 알았다.
일찍부터 고생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내심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는 것뿐'이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내가 오해했음을 알았다.
어르신 한 분이 다른 두 분께 부부사이인 줄 아셨다고 했다.
저번에 눈이 올 때도 함께 나오셔서 눈을 치우시길래
부부가 다정하게 봉사하는 줄 알았다고.
그 말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부부가 아니라 경로당에서 알고 지내시던 이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나이 지긋한 세 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웃들을 위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본인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사용하고 계셨다.
정작 젊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은 나는
'누군가 해야 할 일'
이라며 기피했는데 말이다.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고 달리기를 포기했다.
대신 아침에 어린이집으로 오가는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해 조금 시간을 내기로 했다.
아니, 나 역시도 매일 둘째와 셋째가 오가는 길이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더 편해졌다.
집에 따로 제설장비가 없어서 관리실 앞에 비치된 눈삽을 챙겼다.
올해 구입한 건지 깨끗했고(탐난다!)
손잡이가 반들반들해 손이 자꾸 미끌렸다(장갑이랑 상성이 안 맞아 ㅠㅠ).
그럼에도 열심히 삽질을 했다.
왕년에 삽질 좀 많이 해봐서 그런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법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치웠다.
이미 밟히고 얼어서 깨끗이 정리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두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눈을 치우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뿌듯함 가득했다.
이런 날 육아휴직을 한 상태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어른들이 주변에 계셔서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가던 한 아이는 내가 치워놓은 길로 가지 않고
눈이 잔뜩 쌓인 곳으로 골라 다녔다.
셋째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주러 따라나선 첫째 역시 눈이 쌓인 곳으로 골라 다녔다.
물론 셋째도 형아를 따라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위험하게 왜 저럴까?
신발에 눈 들어갈 텐데...
걱정스러운 맘에 아이들에게 아빠가 눈 치운 길로 조심히 다니라고 했다.
내심 아이들에게 "아빠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했다.
적어도 아이들만은 아빠의 노고와 뿌듯함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내 기대를 철저하게 박살 냈다.
"아빠! 왜 눈 치웠어! 눈 밟고 놀아야 하는데!"
새벽에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