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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an 16. 2020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문라이즈 킹덤> 후기

흥미로운 웨스 앤더슨 영화 관람기

연휴 동안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문라이즈 킹덤>을 봤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다. 첫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리고 다음날 <문라이즈 킹덤>을 본 후에 든 생각을 간단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의 알 수 없는 모티브


2014년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라고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 19세기 말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우울증으로 부인과 동반 자살한 유럽 문명의 지성인. 이 거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저서 <광기와 우연의 역사> 그리고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근세 유럽에 대한 경탄과 깊은 슬픔, 자기 시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울분,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가로막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반대, 인류의 도덕적 자주성에 대한 숭고한 지지를 조용하지만 긴장감이 가득한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웅변한 쇠락한 유럽 문명의 지성인이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성공작, 베를린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 수상, 전 세계적으로 1억 7,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영화, 제87회 미국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9개 부문 후보 지명작. 수많은 수상경력을 보유한 이 영화에 대한 박수갈채와 찬사는 모두 타당하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연속 그리고 즉흥적이고 끝나지도 않을 것 같은 스토리 전개, 분홍과 주황의 밝고 강렬한 색감, 고전적 균형미와 함께 단순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화면 구성,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친 유럽 문명에 대한 애상 – 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이니셜 GB가 ‘Great Britai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마담 D의 막대한 유산’을 노리는 아들의 이름이 ‘드미트리’ 라니. 이 모든 장점에 더하여 등장인물들의 뜬금없는 진지함 덕분에 영화는 장난스러움과 유쾌함이라는 코미디 장르의 미덕마저 갖춘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읽은 ‘슈테판 츠바이크’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영감적 연결점이 확실하지 않다. 아름다운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에게 강제 병합되자 나치를 피해 망명지를 전전하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둡고 진지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밝고 화려하고 유쾌하고 심지어 가벼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영감적 배경이라니.


<문라이즈 킹덤> 감각계에 대한 태도와 행복론에 대한 사유


다음 날 나는 두 번째 영화를 보았다. 2013년 초 개봉한 <문라이즈 킹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참고로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 마니아인 知人에 의하면 이 감독은 많은 영화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연결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고 한다.


<문라이즈 킹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영화는 동일한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들려준다. 차이점은 에필로그에서는 주인공 샘의 목소리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 악기들을 하나씩 알려 준다. 나처럼 음악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같은 곡이 연주된 프롤로그에서는 나는 각각의 악기를 듣지 못했을까?


아마도 프롤로그에서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다가온 외부세계의 대상에 대해 나는 정직하게 집중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로부터 유발된 나의 감정 그리고 가지고 있던 나의 지식이 결합되어 얻을 수 있는 어떤 깨달음의 상태와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나는 주인공 샘의 도움을 받아 나의 감각기관에 집중하면서 외부세계의 대상인 개별 악기를 인식할 수 있었고 인식된 악기 소리가 일으키는 내 안의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소외된 사춘기의 샘과 수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며 동반 무단가출 – 사실 샘은 고아인데 스카우트 캠프를 이탈한 것이다 – 하면서 영화는 시작되고 이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영화는 계속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가출한 사춘기 샘과 수지는 각자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한 상대방과 이로부터 생성된 사랑에 대해 사뭇 진지하고 확고하다. 물론 이들의 애정행각은 아주 어설퍼 보이고 자주 웃겨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출한 상황에 대처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오히려 무기력하거나 관습적이거나 비본질적이거나 위선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다가온 현실세계를 정면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샘과 수지가 관객을 혹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장면이 자주 보였는데 어른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영화는 웨스 앤더슨이 꿈꾸었던 사춘기의 사랑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마르코 복음서의 구절을 떠올린다면 과잉일까?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외부의 대상을 선입견 없이 인식하고 이로부터 생성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 이 영화를 보면서 이 같은 맑음이 있어야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행복론을 사유한다는 것은 무리일까?


그리고 엉뚱한 상상


다시 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지난 4세기 동안 세계를 주도하며 전쟁과 전제주의 종식을 통해 평화와 자유의 문명을 열려고 했던 유럽, 하지만 오히려 파시즘과 전체주의 그리고 경제적 재앙이 겹치면서 세계대전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든 유럽 문명에 대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깊은 슬픔과 울분 그리고 우울증.


혹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우울한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화려하고 기쁜 감각의 세계라는 위로를 보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찬란한 그대의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혹은 지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다시 자신의 감각계에 의존해 새롭게 세상을 인식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혹시 이것이 영감적 연결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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