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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언어 예절

기분 나쁘더라도 해야할 말이 있지 않을까

by 엡실론

주류 속의 비주류. 상식에서 크게 일탈하지도 않지만 상식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경계의 언사.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정도 수준의 시답잖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듣는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기분이 상하고야 말았다. '사과해.' 기분이 나쁘니까 자기는 사과를 원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나라면 적당히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 어쨌든 당시의 난 사과할 정도의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사과는 하지 않았고 당연히 관계도 유지될 수 없었다. 몇 해 전 일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형식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사회의 틀에 자신을 전혀 맞추질 못하는 부류를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피곤하긴 하다. 에티켓, 예의범절.. 남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기 위한 형식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그 애매한 수준의 범주 안에서 대화하고 행동한다.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수준의 대화와 행동은 적당한 편안함을 준다. 인적 드문 야외에서도 쓰는 마스크처럼.

그런 편안함에 너무 취해서일까. 이제 사람들은 집 밖에서도 집 안 같은 편안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TV, 인터넷, 강단 어디서든 누구든 나의 평안을 방해할 수는 없다. 정신적 피해의 기준은 본인의 기분이다. 기분이 나쁘면 피해를 받은 것이므로 그에 대한 보상과 사과는 당연시된다. 욕을 하지 않았더라도 의도가 나쁘지 않았더라도 내 기분이 나쁘면 에티켓이 아니다. 예쁘다는 칭찬도 외모 평가고 기분이 나쁠 수 있으니까 하지 마세요. 아, 물론 누가 말했는지에 따라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요.


과거 언어 예절은 주로 형식에 초점을 맞췄다. 욕설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제는 전달 내용에까지 엄격한 자기 검열이 이뤄져야 한다. 농담이든 선의든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든 아니든 내가 기분이 별로라는데! 그렇게 그들은 편안함을 쟁취해낸다. 가방끈 긴 인간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 어쩌고 보다는 내 기분이 더 중요하니까. 타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예의니까.

몇 년 동안 많은 게 바뀐 듯하다. 나에게 사과를 요구했던 사람도 이제는 좀 더 살기 편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의 기준이라면 내가 사과를 하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사과를 하든 안 하든 관계가 끝난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테다. 일본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대한민국은 그렇게 일본에 가까워진다. 표리부동의 사람들이 빚어낸 특이점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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