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모델링

by 엡실론

하나의 사회 현상도 수많은 요소들로 구성된다. 사회과학은 이런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모델링을 한다. 어떤 틀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모델을 만드는 데는 추상화(abstract)를 이용한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기에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부분들은 제외한다. 설명하고 싶은 부분, 본질적인 부분만을 남겨 분석한다. 좋은 모델은 단순하면서도 많은 것을 모순 없이 설명한다.

논문을 쓰며 과학 하는 일이 아니어도 사람은 누구나 추상화를 이용한다. 각각의 분야마다 현미경을 하나씩 두고 배율을 다르게 조정해 둔다. 관심 있는 분야는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아닌 분야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본다. 우리는 살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여러 모델을 만들고 그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추상화가 진행될수록 사안은 단순해진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지만 단순화되면 남자/여자, 자본가/노동자 식으로도 쉽게 나눠진다. 쟤는 저런 스타일의 애야 하고 가볍게 재단되기도 한다. MBTI는 인기가 많다. MBTI는 16개 유형화로 성격을 구분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간을 보는 추상화 수준은 이 정도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아주 복잡하지만 mbti라는 모델을 이용해 분석하면 이해가 쉬워지는 것이다.

친해지려면 공감대가 많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뜻이 맞는 사람은 편안함을 주지만, 친해지려면 서로 생각이 일치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경험상 생각과 성격이 일치하지 않아도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있다. 사실 대부분 분야에서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서로의 생각에 대한 동의 여부보다는 세계관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추상화 수준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주제를 어떤 스케일로 보는가. 대화의 맞고 안 맞고는 여기서 결정된다. 주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년에 샀으면 다 오른 거 아니야? 정도의 대답이 돌아간다면 마음을 나누는 대화는 어렵다. 가치투자를 하는지 기술적 매매를 하는지는 의견이 달라도 즐거운 대화가 될 수 있다.


영화 추천 AI가 나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나의 초점에 AI가 맞추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미 900여 편의 영화를 봤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고배율을 적용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도 세밀하게 분야를 나누고 초점을 각기 다르게 맞추고 있기까지 하다.

AI는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장르와 배우와 작품을 좋아했다는 추상적인 통계만을 활용한다. 미묘한 다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영화에 풍미를 더하는 배경지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똑같이 좋은 영화라 느껴도 평론가와 나의 감상에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AI는 초심자에게 가이드는 되겠지만 깊은 취향을 가진 인간을 도와주기는 힘들다. 음악 추천 AI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직까지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어렵다고 한다. 친했던 어떤 사람과는 점점 멀어진다. 취향은 점점 깊어지고, 비슷한 초점을 가진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는 어려워진다. 나이가 들어 새로운 취향을 갖는 일은 쉽지 않다. 취향은 소득 수준에도 영향을 받는다. 서로의 관심 분야는 다르고 사안을 보는 스케일도 점점 달라진다. 수평을 달리는 것 같던 직선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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