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돈오점수, 점수점오

by 엡실론

바야흐로 몸만들기의 시대다. 국내 건강기능식품 시장 규모는 매년 커지더니 5조 원에 다다랐다. 맛없다는 닭가슴살만 파는 회사가 티비에 광고까지 낼 정도로 컸다. 내 주변의 운동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단백질 보충제 하나쯤은 쟁여두는 게 기본이다. 마치 보충제나 닭가슴살 구매가 하나의 운동 시작 의례가 된 것 같다. 이 정도는 해야 운동 좀 한다고 얘기하지 하는.

다들 왜 이렇게까지 몸만들기에 열중하는 걸까. 인스타든 유튜브든 보여주기 열풍인 세상이니 나도 뭐 하나 보여줄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 부자로 태어난 사람은 따라잡기 어렵지만 몸은 누구나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 20대에 한 번쯤 좋은 몸을 가져 보고 싶은 마음. 바디 프로필을 찍어 평생의 추억을 남길 수도 있고, 헬스장도 곳곳에 많아 접근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가 할만해 보이면 남들도 할만해 보인다.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든다.

만만해 보여 시작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누구나 운동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몸이 좋아질 수는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 출발하지만 나도 바닥이기에 뭘 해야 할지 모른다. 학창 시절 공부법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 유튜브에서 운동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구독자 백만, 수십만 유튜버들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 방법론의 홍수다. 그 사이엔 분명 전문가도, 귀중한 조언도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초보자는 전문가를 봐도 알아볼 안목이 없다. 재미가 없고 편집 기술이 딸리는 전문가는 인기가 없으니 보이지도 않는다. PT를 받아볼까 고민하지만 헬스장 비용도 아까운데 1시간 6만 원쯤 되는 PT비용은 너무 비싸다. 심지어 괜찮은 트레이너인지 확신도 없다.

그래서 보통은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프로그램들을 적용하고 운동 자세를 흉내 내 본다. 하지만 변호사 공부법을 보고 따라 하는 것과 사시에 합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많은 이들이 몸을 만들려면 닭가슴살 고구마 샐러드 식단을 하라고 말한다. 선수들도 괴로워하는 일을 일반인이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어야 몇 주 정도 자신을 고문한 뒤에 식단을 포기한다. 운동을 한다고 몇 달 해보지만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이런 식으로라면 5년을 해도 원하는 몸이 나올지 미지수다. 대부분 그렇게 흐지부지 된다. 몇 달씩 하다 말다 하다 말다. 다이어트나 근육 만들기는 지옥 같은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기도 한다.

5x5 스트렝스 프로그램
미 해병대 턱걸이 루틴

5x5 운동법은 스트렝스를 늘리는 대표적인 방법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걸 죽으라 해도 다룰 수 있는 중량이 늘지 않는다. 초보자가 어설프게 따라 하면 1년 내내 벤치 60kg 가지고 헤매는 경우도 있다. 미 해병대 턱걸이 루틴이라고 떠도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따라 하다 보면 막히는 지점이 온다. 38주면 1년도 안 되는 시간이다. 1년 만에 턱걸이 30개가 되면 몇 년씩 운동깨나 한다는 사람은 누구나 30개는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안 된다.

전제 조건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당연한 일이다. 5x5는 대표적인 방법일 뿐이지 만능 열쇠는 아니다. 안 통하면 쓸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무수히 많다. 하지만 대표적인 방법 몇 개가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포기한다. 몸 좋아지는 건 타고나야 되고 맛없는 닭가슴살만 먹어야 된다고 착각한다. 별 이유 없이 본인이 끌리는 대로 하고 실패하면 애먼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자신을 무능력을 탓하기도 한다.

물론 다른 방법들을 찾아 적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능력 평가 지표는 무수히 많고 게임처럼 능력치 지표를 전부 분석해 남과 비교해볼 수가 없다. 평가를 한다고 해도 나에게 어떤 방법을 적용하면 좋을지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약한 부분을 알고 보완해야 한다는 인식은 겨우 출발점일 뿐이다. 누구나 아는 대표적인 몇몇 방법으로 쉽게 몸이 좋아지는 사람을 보는 것도 짜증 나는 요소다. 나는 5x5 하다 보니까 벤치 100kg 그냥 들리던데? 이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는다. 열심히 안 해서 그런가 내 몸이 문제인가 하는 오만 잡생각이 든다. 정체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그런 모든 악조건을 견디는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의 시간이.

운동 시작 몇 년 만에 전국 대회에 서는 사람이 있고, 거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 시험엔 1년 단기 합격생이 있고 N수생이 있다. 어떤 사람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고수를 흉내 낸다고 하수가 갑자기 고수가 되지 않는다. 타고난 운동 신경이 없다면 의식적으로 그 능력을 개발시켜야 한다. 저 사람은 푸시업 안 해도 벤치 잘만 하는데 나는 왜 해야 되지. 의식적 노력은 어렵고, 한다고 해도 타고난 사람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푸시업을 해야 되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안 했는데도 됐잖아요'라고 불평해도 소용없다. 푸시업을 하지 않고서는 운동을 잘할 수가 없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과 적합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교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태어나길 부처와 같이 깨끗하니, 단번에 깨닫고 수행을 통해 속세의 더러움을 버린다는 뜻이다. 다들 돈오점수를 머리에 그리며 운동을 시작한다. 자기는 운동 시작부터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로 무장하고 고수들이 알려준 길을 깨우쳤으니 수행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얼마 하지도 않아 놓고 모든 것을 깨달은 양 훈수를 두고 다닌다.

고민 없이 열심히만 해서 되는 행운아는 극소수다. 실상은 돈오점수가 아니라 점수점오(漸修漸悟)에 가깝다. 점수점오는 수행을 해가면서 비로소 깨닫는다는 뜻이다. 어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막히는 순간이 온다. 길이 막혔다고 느낄 때가 비로소 시작되는 단계다. 영리하게 금방 탈출할 수도 있지만 미로에 갇힌 것처럼 시간을 계속 허비할 수도 있다. 그 시간 동안 발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고민하는 한 발전은 있다. 하지만 괴로운 시간인 건 분명하다. 미궁에 빠졌다 나왔다를 반복할 때 성장은 이뤄진다. 비단 운동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도 헬스장엔 새로운 얼굴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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