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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Cicada의 추억

by 엡실론

Cicada. 영어를 어느정도 한다는 사람이라도 이 단어는 모르지 않을까. 제도권 교육에서 가르치거나 시험에 나오는 단어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무더위의 시기에 우리가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면 반드시 한번 쯤은 등장할 단어. Cicada는 '매미'다.

Cicada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대학교 모 과목 중간고사의 한 지문에서였다. 몰라도 문제 푸는데 지장은 없었다. 다만 사이다도 아닌 이 정체불명의 단어가 뭘까. 그런 괜한 궁금증이 들어 스마트폰 사전 기능을 오랜만에 써봤던 것이다.

살면서 딱 한 번 봤고 앞으로 쓸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내 기억 한편에 안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것. 정작 외워야 하는 건 어지간히 까먹으면서도 이 단어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뇌 저장용량에도 한계가 있다면 이런 더미 파일(dummy file)이 비효율을 만들어내는 주범일 테니 지워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원 예비군이 끝난 지금. 신기하게도 이제는 군생활의 거의 모든 게 기억나지 않는다. 황금같은 20대의 2년을 투입했는데도, 온갖 일들에 감정 기복이 심했는데도 이제 그 시간은 하루처럼 느껴진다. 잠을 설치는 날 꿈자리에, 예상치도 못했던 그 시절의 장소와 사람들이 가끔 나오는 걸 보면 어딘가에 묻혀 있긴 한 듯하지만.

대학 시절의 기억도 많지는 않다. 4년을 다녔는데도 두 손에 꼽을 하다. 군대보다는 많이 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 교수님은 중간고사를 2주 미루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어차피 졸업하면 별로 떠오르는 것도 없을 텐데. 내가 기억에 남는 일 하나 만들어 주는 셈 치죠.


한 과목 때문에 중간고사 기간이 길어진다고 수업 듣는 대부분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교수님 말대로 지나고 나니 이 기억만은 확실히 난다. 정작 그렇게 공부하고 본 시험 문제는 기억도 안 나는데.

시험기간의 괴로움도, 군대의 괴로움도, 이별의 고통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흐려진다. 매일 학교나 직장에 가듯 반복되는 일상일수록 나중에 기억나는 부분이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는데 인생의 모순이 있다.

3년만 참으면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도, 원양어선 1년에 1억 원을 준대도 보상을 보고 그 시간을 견뎌낼 사람은 많지 않다. 나중엔 설사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질은 기억과 상관없이 손에 남겠지만 보상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Cicada처럼 엉뚱하거나 반짝이는 기억들이 20대가 끝나면 얼마나 남아있을까. 인생이 끝날 땐 어떨까. 의도치 않게 작동되는 기억 저장장치에 좋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나중에 뭔가 많이 기억나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이 글을 읽은 사람에게도 Cicada[시케이다] 가 남아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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