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삶과 떠나보내는 삶, 그 사이에서.
<한국의 전어처럼 일본에서 꽁치는 가을철을 대표하는 생선이다. / 위키 백과 : 정한석 님의 글을 인용:>
그 흔한 꽁치 한 조각도 입에 넣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시절, 그 맛을 실제로 느끼지 못한다.
산다는 것은 단적으로 먹어왔다는 사실의 연속이고 먹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본능적 허기를 채우며 살아온 인간의 진실된 행위이다. 그 시절 우리는 여러모로 배고팠고, 그 허기짐을 서로의 사랑으로 채우며 인내하고 살아왔다. (죽기 전까지 그럴 것이다.)
우리가 먹던 음식의 맛이 가진 이야기는 그때의 우리를 추억하고 상기시킨다.
꽁치의 맛, 영화에서 재밌는 사실 중 하나는 영화 안에서 꽁치가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선을 먹는 장면은 많은데, (특히 동창회에서 친구들과 모여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쳐주신 모교 선생님을 모시고는 생선을 대접하고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
실제로 꽁치가 등장한 장면은 없으며 꽁치를 중심으로 극 중 이야기가 전개되지도 않는다.
꽁치는 말 그대로 오즈 감독님께서(글의 흐름상 이제부터 감독님에 대한 존칭은 생략하겠다.)
느끼는 한 세계에 대한 감정적 메타포(시적 은유)이다.
그렇다면 오즈는 왜 꽁치였을까? 왜 꽁치의 맛으로 제목을 붙이고 영화의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여담으로 나는 잔치 국수를 참 좋아한다. 어린 시절 배우의 꿈을 품고 서울로 떠나오기 전,
어머니께서는 4인 가족의 식사로 잔치 국수를 정성스레 삶아주시곤 했다.
온 가족을 위해 어렵사리 한 상을 차리시면 가장이신 아버지께서 젓가락으로 먼저 국수를 드시기 시작하고,
나와 형도 한 그릇씩 국수를 배부르게 나누어 먹었다. (신기한 사실은 아버지께서는 식사 순서에 연연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이것에 적응해있었다. 한국 유교 문화의 정석이다. 오히려 현재는 잘 그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서울살이를 오래 한 지금도 골목길에 있는 국숫집을 보면 꼭 들어가 한 그릇을 사 먹고는 한다.
그 한 그릇을 먹으면 꼭 누군가에게 국수를 먹는 이유에 관해 그 시절의 어머니와 우리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땀과 사랑이 젖은 음식을 몇 번이고 나누어 주시고는
식탁 앞에 앉아 배불리 먹는 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때마다 어린 나는 어머니께서 국수를 드시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
배고픈 허기를 달래고자 어머니의 그 피와 살로 얼룩진 젊은 시절의 사랑을 부지런히도 집어삼켰다.
그 소면 한 덩이를 정성스레 그릇에 담던 따뜻한 손길, 몇 번이고 고와낸 육수의 깊은 맛,
쓸쓸한 주방 한쪽을 꿋꿋이 지켜내던 어머니의 부지런한 뒷모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모든 사랑의 행위가 어우러져 내가 잊을 수 없는 그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태어난다.
마음껏 야채를 올리고 어머니표 양념을 섞으면 그때의 그 허무와 상처를, 불안과 허기를 사랑으로 달래곤 했다. 이것이 그 시절 어머니의 국수 한 그릇에 느끼는 나의 소소한 이야기이다.
다시 돌아와서 꽁치의 맛에서 실제로 어머니는 부재한다. 주인공의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가족 구성원으로는 히라야마(아버지)와 미치코(딸), 카즈오(막내아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의 역할을 대체하는 미치코가 있으며 큰 아들 코이치는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다.
실제로 오즈의 어머니는 오즈가 이 영화를 제작한 이 시기에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즈는 어머니가 떠난 사실을 영화 안에서 부재라는 빈 공간으로 남겨 놓는다. (빈 공간은 언제나 중요하다. 곧 채워질 이야깃거리가 될 예정이기에.) 그 부재의 공간을 그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주인공의 젊은 시절의 추억들로 끝없이 채워 넣으며 빈 어머니의 그리움을 현재의 이야기들 안에서 존재로서 그리기 시작한다. (철학적으로 환원 :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
떠난 이는 말이 없으며 실체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랑한 이의 흔적들이 우리의 삶에 자국으로 남는다.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그 사랑의 행위와 감정 속에서 그/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가을철 꽁치가 가장 살이 오를 찬란한 계절의 한 순간에
주인공 히라야마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 미치코를 시집보내며 영화는 정점에 다다른다.
사랑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떠나보내는 것이다. (삶 자체가 멋진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뿐 삶에서 죽음으로 언제나 향하고 있기에.)
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누군가를 집착하고 소유하려 하지만, 사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그녀를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실존적 전제하에서) 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 인용.)
꽁치의 맛 & 오즈 야스지로는 그 사랑의 행위 속 떠나보냄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이와의 사랑을 담은 진한 맛과 같은 이야기이다.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이제 또한 자신의 딸을 떠나보내려 한다.
그리고 그 떠나보냄의 순간을 묵묵히 견뎌내며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로 떠난다. 돌아보면 저 멀리 자신의 고향이 보인다.
그 고향의 맛을 간직한 채, 그 시절의 가족과의 사랑을, 누군가와의 이야기를 간직하며 우리는 세계로 헤엄쳐 나아간다. 그리고 몇 번의 가을을 맞이하고, 그 배고픈 허기를 음식으로 채워내고,
그때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또 누군가를 사랑하며
자신의 피와 얼룩진 젊음을 바친 후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히라야마가 자신의 딸 미치코를 떠나보낸 후 늦은 저녁, 홀로 부엌에 남아 목마른 허기를 달래고자 한 모금의 물을 마시면서 그 빈 그리움을 채워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혹은 다시 시작된다.)
삶의 마지막 지점인 황량한 사막에서 우리는 마지막 햇살과 그 시절의 맛(사랑)을 회상하며
또 다른 먼 여행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