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이 아닌 사랑으로서의 실체

냉혹한 세상 속 잃어버린 귀가 되어 그녀를 듣는다.

한 인간에게 있어 존재를 사랑한다는 행위의

진실한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한 여성을 사랑한다면

그 행위를 진실한 사랑이라 여기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로 존재할까?

세상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가진

환상과 역할로서 여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의 존재 그 자체를, 그 깊은 고통과 불완전한 모습까지 귀히 여길수 있는 사랑이 가능할까?

30대 초반이 지나고 나서야, 난 이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권력적으로 소유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연속이었고 그 끝은 결국 허무했다. 어디서 본 듯한 쾌락적 사랑, 고유성이 아닌 상대성, 세상이 부여한 이미지의 얼굴들을 향한 탐욕적 욕망들. 결국 나 자신이 가진 편협한 시선의 한계가 대상을 향한 제도 속 속박과 소유, 부자유의 쾌락으로 연계시켰다.

그것은 남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참 비겁했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진실로 후회가 된다. 아직 늦지 않았을까?

죽기 전까지, 진실한 실체로 다가서서 그녀와 사랑의 소통이 가능할까? 그러던 중 우연히 소세키의 “마음”에 나온 사랑에 관한 글귀를 읽고 다시 한번 무지 속 큰 배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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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랑이라는 것의 양쪽 끝이 있다면,

높은 쪽은 신앙과 같은 신성한 것이 작용하고,

낮은 쪽은 성욕과 같은 쾌락이 달려있다면

나의 사랑은 높은 쪽에 매달려있을 거야.

비록 인간으로서 육체를 떠날 수 없지만

그녀를 향한 나의 눈은 육체의 냄새를 띄지 않았어. “

(마음&나쓰메 소세키 구절 중 일부를 인용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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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가서기 전 사랑하는 존재의 눈을 보며 묻고 싶다.

“자유롭나요?”

“혹시 나로 인해 불편해요? “

“지금 무엇이 두려워요?”

- 그렇다면 물러나 기다려보는 것이다.

여전히 부족하겠지만,

그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녀가 자유로이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도록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온몸이 춤을 추게 인도한다면, 나의 마음도 이내 곧 고요해지겠지. 또한 어느 어둑한 날, 세상 때문에 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몸이 구슬피 운다면 그 울음이 절망이 되지 않게 옆에서 토닥여보고 싶다.

그리고 이 냉혹한 세상 속 잃어버린 귀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치를 따지는 어지러운 말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그래도 여전히 괜찮다고.”

할 수 있다면 하나 둘, 그녀가 복잡한 세상 속

추스르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을 기꺼이 손을 내밀며

도움을 주고 유한한 일상이 가진 세계의 축복 안에서

그녀의 몸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여정을 청해 보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에드워드 양 마작 공식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