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의 캘린더 그랜드 슬램의 무산에 대해
노박, 하드코트, 또 한 번의 결승, 만원 관중, 반대편 코트에는 메데베데프, 관중석에 앉아있는 로드 레이버까지. 마지막 그랜드슬램인 us오픈은 올 초에 열린 호주오픈과 똑 닮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호주오픈에서는 부상을 입고 힘겹게 결승에 올라온 조코비치가 작년 파리 마스터스부터 무패행진을 달리던 메드베데프와 어떤 승부를 펼칠지 기대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싱겁게 끝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와는 달리 조코비치가 3-0으로 완승을 해버렸다. 그러고는 조코비치는 수상소감에서 메드베데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승을 할 날이 많을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위트 있는 이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커리어는 얼마 간 더 이어가겠지만 그랜드슬램에 도전할 역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초반 인터뷰에서 올해와 내년에 슬램 우승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하며 승부수를 띄웠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윔블던은 취소되었고 us오픈에서는 충격의 실격패, 일정이 꼬여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롤랑가로스에서 결승까지 갔으나 건재한 흙신 나달에게 막혀 호주오픈에서만 우승했기 때문이다. 라이벌인 페더러와 나달은 20회 우승에 3개 모자란 17회 우승에서 본인이 약속한 마지막 해가 되어버렸다.
넥젠 스타들의 세대교체 바람이 몇 년 전부터 솔솔 불어오고 있었지만 조코비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싸움이 있었다. 평생 라이벌과의 같은 위치를 위해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메드베데프에게 한 말은 빅 3와의 대결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조코비치는 거짓말처럼 롤랑가로스와 윔블던을 연속 우승했다. 결승에서 각각 치치파스와 베레티니를 만났지만 나달과 페더러가 함께 뛰었다. 조코비치가 20회 우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것 같았다. 셋이서 동률이 되고 난 첫 그랜드슬램 us오픈에서 거짓말처럼 둘은 부상으로 빠졌다. 21번째 그랜드슬램으로 가는 길은 외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윔블던까지 우승하고나니 목표가 여럿 생겼다. 올림픽까지 열리는 해이기 때문에 캘린더 골든 그랜드슬램을 노렸지만 즈베레프에게 막혔다. 하지만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남아있었다. 로드 레이버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대한 기대가 컸다. 거기다가 21번째 그랜드슬램 우승까지. 기대가 큰 만큼 부담감도 컸다.
결승까지 올라오기 전 인터뷰에서 올인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엄청난 각오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힘이 부치는 것 같기도 했다. 1세트를 내주고 이긴 경기가 많아 경기 시간이 많았다. 신기이긴 했지만 압도적이진 않았다. 호주오픈처럼 부상을 입지도 않았는데 힘겹게 결승까지 올라왔다. 메드베데프도 호주오픈처럼 쾌조의 스타트로 올라왔다. 2시간 전후로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올 초와 모든 것이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결말은 달랐다. 결말만큼은 메드베데프가 조코비치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3-0. 관중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경기시간마저도 비슷했을 것이다.
조코비치가 말했던 대로 빅 3로 나란히 설 수 있도록 자신과 약속한 시간이 모두 끝났다. 넘어서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로 마무리되었다. 내년부터는 다시 1이라는 숫자의 무거움을 알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