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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n 23. 2020

외로워서 먹는 밥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푸른역사)

늦은 밤, 저녁 먹고 한 참 출출할 때, 은근히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반 앞에 앉아 엄마가 내미는 숟가락을 받는다. 우리는 어둑한 부엌에 마주보고 앉아서 누룽지에 익은 열무김치를 올려 먹거나, 따끈한 아욱국에 찬밥을, 어느 날은 고구마에 묵은 김치를, 남은 반찬에 참기름 한 숟가락 두른 비빔밥을 먹는다. 아주 어릴 때는 아무 걱정 없이, 조금 컸을 때는 밤에 먹으면 살찌데 하는 걱정을 하면서, 밤참을 먹었다. 아무리 졸려 죽겠어도 밤참 먹자고 부르면 눈을 감고라도 일어났다. 이런 밤참 맛에 일단 길들여지면 평생 끊기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아니 자주, 늦은 밤에 밥을 찾는다.


알고 보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탐닉하거나 회피하는 어떤 취향이나 습관에는 나의 밤참 습관 같은 크고 작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고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는 그런 사연들이 빼곡하다.


김서령 작가의 배추적 이야기는 이렇다. 동네 처녀들이 밤마실을 와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수를 놓는다. 각자 집에서 주전부리를 가지고 오는데 요즘은 상상도 하기 힘든 간식들이다. 땅속에 묻어 둔 가을배추와 무 한 뿌리! 수틀을 옆으로 밀어 두고 그것들에 된장을 발라 아삭아삭, 와삭와삭, 밤참으로 먹는다.


그녀들 수틀 위에서는 ‘보까시’ 된 초록 이파리, 그 사이로 잘 익은 감 일곱 개가 수 놓여 있다. 누군가 〈어매요, 배추적을 한 두구레 구울까요?〉하면 금세, 〈한쪽에선 물을 끓여 날배추를 데치고 한쪽에선 밀가루를 후리고 ... 부엌에서 싸리가지 꺾는 소리가 두어 번 타닥, 탁 들리고 부엌 쪽 광창이 훤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대나무 채반에는 김나는 배추적이 서너 장 척척 얹혀 나온다〉 진정 군침 돌게 하는 한밤 중 여자들만의 만찬. 받들고 공양하는데 지친 여자들의 섞은 속과 사무침, 외로움이 배추적이 되고, 수틀 위에서 감으로 익는다.

‘조선 엄마의 레시피’라는 부제가 붙이 이 아름다운 책은 이제는 고인이 된 김서령 작가의 몸과 마음이 된 엄마의 음식에 관한, 동시에 그 세대 여자들, 남을 보살피느라 자신의 생명을 다 썼던 여자들을 향한 사랑 시 같다. 이 시는 작가의 눈빛처럼 맑고, 수수하고, 곡진하다. 책을 읽는 동안 엄마 생각,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에 대해 생각했다. 특별한 요리랄 것도 없는 밥, 국, 찌개와 장아찌 같은 반찬들, 그 중에서도 봄에 먹던 조기찌개가 특히 먹고 싶다.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렇듯 (적어도 내 주변 친구들은 그렇다) 울아들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조미김과 계란 후라이, 각종 볶음밥이다. 출퇴근에 바빠서 제대로 된 ‘요리’는 사.먹.고, 집에서는 한 그릇 안에 영양소가 뜸뿍, 다 들어가(있다고 믿)는 볶음밥이 주식이었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울엄마 밥상을 그리워하는데 나중에 아들이 엄마 밥상이라고 소환할 음식이 있을까 모르겠다. 찌그러진 계란 후라이나 김치 볶음밥 같은 것도 그리워지는 음식이 되지는 않겠지?


책을 읽다가 공연히 몇 번이나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배추적 같은 음식 재료가 우리집에 있을 리 없음에도 냉장고 안을 뒤지는 것은 그냥 핑계다. 책 때문에 살아난 많은 기억들에 체하지 않으려고 서성이는 것이다. 일테면, 이런 고소한 기억들. 외할머니가 불씨만 남긴 아궁이에다 벼이삭을 밀어 넣었을 때 탁탁 튀던 쌀 튀밥 냄새라든가, 엄마가 방문판매로 카스테라 제빵기를 처음 샀던 날, 동생들과 앉아서 빵 익기를 기다릴 때, 공간 가득 채웠던 달콤한 빵 구워지는 냄새, 또는 기차여행 중, 대전역 가락국수 집 앞에 하얗게 피어오르던 구수한 냄새라든가, 매화나무 아래 평상에서 먹었던 엄마의 조기찌개, 그 밥상 위로 떨어지던 매화 꽃잎들처럼 분분한 기억들...... 


음식에 깃든 추억에는 당연히도 그것을 함께 한 누군가가 있다. 결국 그리운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글맛 좋은 이 책을 읽던 중 많은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과식은 음식이든 추억이든 좋지 않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당부하건대 한꺼번에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억에 체하지 않도록 한 편 씩, 한 편 씩, 꼭꼭 씹고 입안에 굴려서 천천히 맛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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