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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Oct 31. 2022

글을 쓰려는 당신에게

밀물은 하루에 두 번 차오르지

“언제부터 글을 쓰셨어요?” 누가 물으면 나는 늘 대답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좀 좋아했어요. 어른이 돼서는 남몰래, 혼자서, 조금씩 썼지요. 그냥 취미 같은 거죠.”


오랫동안 혼자서, 조금씩 글을 써 온 것은 사실이지만, 취미처럼 글을 썼다는 말도 사실일까? 이 말에 스스로 질문이 생겼다. 취미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며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내가 정말 글 쓰는 시간을 즐기며 했을까? 안개 가득한 숲 속을 헤매듯 단편적 생각을 글에 담아 보려고 이리저리 헤매던 그 지리멸렬하고, 쓸모없게 느껴지던 시간을, 뻐근한 어깨와 허리 통증을 불러일으켰던 그 시간을 나는 정말 사랑했을까? 고백하자면, 나에게 글쓰기의 시간은 설레며 기다려지는 시간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쓰게 된 것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걸 어쩌면 아마추어 정신이라고 치켜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레지 않는 글쓰기를 계속하는 사람을 나는 나르시시스트라고 생각한다.  ‘입에 크레파스를 물고 그린 그림’처럼 더없이 형편없고, 초라한 초고를 쓰면서도 퇴고의 긴긴 과정을 거친다면 분명 훌륭한 한 편의 글이 될 거라고 믿는 마음, 그걸 해 낼 수 있는 스스로를 대견하면서,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없이도 글쓰기가 과연 가능할까? 나르시시즘이라는 땔감 없이 글쓰기의 전진은 없을 것 같다. 글쓰기의 나르시시즘은 다른 재주에 대한 나르시시즘 보다 훨씬 더 분명한 쓸모가 있다. 모든 글쓰기는 그것이 일기라고 하더라도 무대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길 위의 독서, 전성원) 무대에 오르려는 사람에게 나르시시즘은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나는 글쓰기의 아하, 순간이 참 좋다. 글을 쓰기 전까지 내 의식에 그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도 못했던 생각이 쓰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아하, 하는 그 순간 말이다. (이건 글쓰기를 계속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하나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다른 이야기를 끌고 올 때의 그 놀라움. 내가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었나?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같은 경이감. 어떤 사건이, 어떤 장면이 또는 툭 던져진 한 마디의 말, 빛이나 그림자가, 경적과 같은 소음이, 까마귀의 울음소리, 해질 무렵 인사동의 스산한 느낌이, 쓰레기통 옆에 버려져 있는 옆구리가 터진 헝겊 인형이 나를 끌어당긴 의미가 비로소 분명 해지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래 내가 좋아한 것은 정말 그 순간이었다. 아까운 일요일이 다 가도록 몇 문장을 쓰고 지우고 반복해도 어쩐지 한 문장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날, 이런 짓을 왜 하는 건가 싶은 우울감에 사로 잡혀 있을 때도 그 황홀한 순간의 경험은 지리멸렬함과 허리 통증 후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해 볼 기운을 차렸던 것 같다.


글쓰기가 취미 같은 거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복합적인 마음들을 납작 만두처럼 눌러 버리는 것이라서 취미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던가 보다. 그렇다고 달리 그 마음을 표현할 다른 단어도 없어서 여전히 나는 취미처럼 썼다고 말할 수밖에 없나 보다.      


고백하자면, 책 한 권 낸 후에 ‘취미처럼’ 했던 글쓰기가 더 힘들다. 최근에 인터뷰와 강연, 북 토크를 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도 한 이유일 듯하다. 말처럼 글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수단인데, 요즘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탓에 이야기가 내 안에 고일 틈이 없는 것도 같다. 물리적으로도 힘들어서, 퇴근 후에 집에 오면 그저 소파에 누워 오래전 드라마나 보고 싶을 때가 많다.(그래서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글쓰기를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심정이 되는 것에 어떤 죄의식이 느껴진다. 글쓰기가 취미라고 하더니 제대로 된 문장 한 줄 안 쓰면서 정작 말만 하고 돌아다니는구나 하는.


김선욱 피아니스트가 김현정 뉴스쇼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저에게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일상에서  먹는 것과 비슷한  같아요. 매일 피아노를 연습해요. 저는 클래식 덕후예요. 일이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자신을 클래식 덕후라고 소개할 , 피아노 연주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할 , 그가 얼마나 피아노와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지 느껴졌다. 피아노에 사랑에 빠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조차 밥을 먹듯이 피아노 연습을 한다는 사실을 글쓰기가 피하고 싶을 때마다 기억해야겠다. 다만, 김선욱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오롯이 사랑하는 예술에 전념할  있는 것은 그가 천재이면서도 끝없이 훈련을 계속할  있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겸비한 이들이기 때문이지만, 굳이 야박하게 말하자면, 많은 경우, 밥벌이를 위해 다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보통의 우리에게는 매일 해야  8시간의 노동과 2시간 이상 오가는 출퇴근의 피곤함이 우리를 조롱하고 시험에 들게 한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우리가 매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하고 넘치는 욕망과 열정이 부족한 것도 이유겠지만, 밥벌이를 위해 해야  무수한 일들이 우리의 욕망을 차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때마다 시인 찰스 레즈니코프의 시를 떠올린다. 그가 말하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그대는 계속 쓰게  것이다. 그리고 써야 한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나는 지쳤다. 이제 나의 일을 해야  날이 하루  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의 힘이 되돌아왔다.그래, 밀물은 하루에   차오르지

촬스 레즈니코프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읽으며 하루에   밀물이 차오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출판사 편집자와 다음  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계약을 하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꺼내 놓은 이야기를 과연    있을지 지금부터 겁이 난다. 취미 삼아 하는 글쓰기와  쓰기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설핏 맛보고 나니  겁이 난다. 취미로 쓰든 직업적으로 쓰든 글쓰기의 의미에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다를  하나같이 귀한 글이고 어떤 면에서는, 어떤 외부적 보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용히 혼자서 쓴다는 것은   자기 수련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글은 조개가 만든 진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주알을 엮어 목걸이를 만드는 일이 어쩌면 책 쓰기 아닐까. 진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주알이 수천 개는 되어야 한다. 모든 진주가 목걸이는 될 수 없다. 글쓰기의 결과물로서 책 한 권 쓰고자 한다면, 진주 목걸이가 될지 아닐지 모르는 수 천 개의 진주를 만드는 수고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조개의 고통이 진주를 빚는다. 조개가 진주를 품을 때 목걸이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진주는 소중하니까. 찌그러졌거나 영롱한 색이 덜하더라도 귀하고 귀한 고통의 증거니까. 오늘도 나는 진주알 하나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계속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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