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오도 Sep 25. 2023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면

새파란 돌봄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어내는 일’, 또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기분 좋고, 한없이 편안한 감정이 느껴진다.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명확히 표현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에도 이름이 필요하다.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책 읽는 곰)은 세계 여러 나라의 행복한 마음 상태에 붙여진 이름들을 아름다운 수채화와 함께 소개한다. 그 단어들은 먼 나라의 언어지만, 그저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한다.


7명의 영 케어러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조기현의 책 『새파란 돌봄』(이매진)을 읽다가, 돌봄의 이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돌봄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있는가? 가족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때론 숭고한 희생과 봉사라는 미명으로 돌봄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봄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개인의 고통과 죄책감, 두려움, 외로움과 좌절에도 이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기분 좋은 감정에 이름이 필요한 것만큼이나 고통에도 이름이 필요하다. 마땅한 이름이 없는 고통은 표현되기 어렵고, 이해되기도 힘들다. 조기현은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아픈 가족을 돌본 경험이 있는 다양한 돌봄 제공자들을 만났다. “나 혼자만 겪는 듯한 고통에 이름이 생긴다면 어떨까. 사회적으로 부르는 말이 생기면 적어도 고립감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기현은 “고통에 붙일 이름을 찾으려 “고 1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연령과 성별이 다양한 영 케어러 당사자 7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돌봄의 계기와 가족 구성, 경제적 수준도 제각각이지만 돌봄과 함께 삶의 위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영 케어러에 관심을 두고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2021년 전국 중고등학생 대상 조사에 의하면 “돌보는 가족이 있다고 답한 중학생은 17명당 1명, 고등학생은 24명당 1명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 상황은 어떨까? 최근에야 조사가 시작되어 그 결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지만, 고령화와 저 출생, 높은 이혼율, 만성 질환과 중증 질환의 증가, 산업 재해 등 영 케어러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는 배경은 충분하다. “한 가정의 어른이 아프다는 말은 단지 아이가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아이가 직접 아픈 어른을 돌봤고, 돌봄을 맡은 어른을 보조하는 구실을 해왔다. 아이도 어른을 돌본다는 관점이 없이는 우리 곁에 있는 영 케어러의 존재는 감춰진다.”


 『새파란 돌봄』 속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 아프고 무겁다. 12살 때부터 할머니의 돌봄을 떠맡은 푸른의 이야기는 쉽게 간과되는 가족 내 권력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가족이 돌본다고 하지만 실상은 가족 중에서 가장 권력이 낮은 사람에게 돌봄이 집중된다는 점은 쉽게 간과된다.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란 이유로 12살 푸른에게 채매 할머니의 돌봄이 떠 넘겨졌지만, 돌봄과 관계된 모든 의사 결정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약자에게 돌아간 돌봄은 “돌봄을 가리는 커튼”이 되고 공적 돌봄 체계는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돌봄은 평범한 세계를 무너뜨린다. 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가 쓰러지자 병원의 ‘관계자’들은 딸이라는 이유로 성희를 호출한다. 일상과 삶의 균형을 갖춘 1인분의 삶은 너무 쉽게 흙탕물 같은 일상으로 바뀐다. 수술동의서에 사인한 후부터 모든 책임은 보호자인 성희의 몫이 된다. “현실 속 가족과 인간의 모습은 다양한데, 제도는 너무 단순하다.” 실재 삶이야 어떻든 법적 보호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서진은 오랫동안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짓고 똥오줌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이를 키우고 직업인으로 청소년을 돌보고 어머니의 돌봄과 부양을 맡고 있다. 그러나 서진은 만약에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된다면, 가족에게 짐이 되느니 주저 없이 요양원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랫동안 돌봄의 제공자로 살아온 서진이 절대로 돌봄의 수혜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돌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돌봄 수혜자라고 해서 받기만 하거나, 제공자라고 해서 주기만 하는 현실에 변화가 필요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돌봄을 제공하는 일이다. 거창한 말 같은데, 사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포유류 중에서 가장 오래 양육을 받아야 하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돌봄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탓일까? 돌봄은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쉽게 가족의 테두리에서 해결할 문제로 생각된다.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돌봄은 이제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책임과 고통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서 이해되고 가치가 부여돼야 하지 않을까?


영 케어러의 존재를 호명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 그것은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생각해 보니,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는 말은 인권의 다른 말이었다.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많은 권리는 누군가의 고통에 붙인 이름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력과 학벌이 낮다는 이유로 핍박받고 배제되고 거부당해 생겨난 고통에 우리는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를 새겼다. 조기현은 당사자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부여해야 하고, 법과 제도를 바꿔 새파랗고, 새로운 파란을 일으킬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함께 좋은 질문을 해보자고 권유한다. “청소년이나 청년이 하는 돌봄은 생산성을 빼앗기는 손실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돌봄 하는 사람을 저평가한 맥락을 반성해야 할까? 돌봄을 하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아니면 돌봄 하는 삶이 손해 안 보고 불행하지 않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우리는 이미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