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인

나이듦에 대하여 2

by 최오도


주말 아침, 허브티가 든 큰 컵을 들고 베란다에 나와 앉았다. 아파트 3층 살이는 단지 내 관상수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어서, 잠깐이나마 초록빛 숲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좋다. 베란다까지 가지를 뻗은 살구나무의 살구들이 장맛비에 거의 다 떨어졌다. 진짜 한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아파트 마당에 등이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에 기대서 천천히 걷고 있다. 언뜻 폐지를 줍는 할머니인가 싶었는데 몇 바퀴 채 마당을 뱅뱅 돌고 있는 것이 운동하는 것 같다. 머리카락은 희고 성기고 산발이다. 한 발짝 떼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할머니가 입고 나온 바지의 동백꽃 무늬가 멀리서도 선연하다.


그녀의 초점 잃은 눈동자와 힘겨운 발걸음에 대비돼서 였을까? 얼만 전 찾아본 영화 속 ‘타샤 튜더’의 소녀 같은 투명하고 맑은 눈빛이 떠올랐다. 타샤 할머니는 구십이 넘도록 어떻게 그런 눈빛으로 살 수 있는 걸까? 가끔 맑은 눈빛과 붉은 뺨을 한 노인들을 보게 되는데, 내겐 그분들이 늘 경이롭다. 타고난 미모나 경제적인 여유도 분명 한몫을 하겠지만, 다른 삶의 비밀 없이 그런 모습으로 늙어가기란 불가능하리라. 나는 그 비밀이 궁금하다.


간간히 회사 앞 고층빌딩 건물주의 부인이라는 여자가 번쩍이는 대형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말끔한 양복 차림의 직원들이 차 문 앞에 대기하다가 터럭 하나의 불편함도 없이 그녀를 모신다. 일흔을 넘었을 나이인데 옷매무새나 얼굴색에서 나이 든 얼굴에 깃들기 마련인 누추함이 보이지 않는다. 잠깐 스치듯 보아도 평생을 누군가의 복종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 특유의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요즘 부쩍 노인이 되었을 때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노인을 만나면 물끄러미 보게 된다. 내 마음속에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아파트 마당을 돌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내게 불안감을 준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그때 내 모습이 건물주의 사모님 같은, 아름답지만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아닌, 타샤 할머니나 박경리, 박완서 선생 말년의 모습처럼 자연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모습이면 좋겠다. 동물의 보호색처럼 나이 듦이 보호색이 되어 자연과 합치되는 모습일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그날의 모습이 결정됨을 알기에 나는 막연히 두렵고 초초하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천천히 마당을 돌고 있다. 그 옆으로 할머니만큼 등이 굽고 체구가 작은 경비 노인이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고 있다. 문득 두 노인의 삶이 궁금해진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매일이 궁금하다. 삶이란 무엇일까?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보면서, 훌륭한 삶을 지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시 생각했다. 늙고 병든 몸이나 해야 할 몫의 하루 운동을 하고,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아침 내내 마당을 쓸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는 두 노인, 열심을 다해해야 할 일을 하는 두 어른의 묵묵한 고단함에 대해 생각했다. 보통의 삶들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런 식의 생각의 허세스러움에 조금 부끄러워진 나는 성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댄다.


상념을 떨치고 일어나 오늘 몫의 삶을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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