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기차역 가운데서 아기처럼 울었다.
엄마가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으나,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엄마가 어쩌면 3개월밖에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찮은 유학을 마무리한다며 아픈 엄마를 아빠에게 부탁하고 미국행을 선택했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들도 누구 하나 나의 잘못된 선택을 지탄하거나 야속해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아, 그때 나는 왜 그 하찮은 미국행을 포기하지 못했던 걸까? 엄마가 내 곁에 있어달라고 한 마디라도 했더라면, 아니 엄마가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 어떤 딸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를 남겨두고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할까..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답십리 큰외삼촌 댁에서 할아버지 제사가 있던 날, 엄마가 서울에 오셨다. 대방동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영등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아직 유월 초였지만, 한 여름처럼 축축하고 더운 날이었는데, 엄마는 사과상자 크기의 꾸러미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어깨에는 운동선수나 들은 법한 대형 보스턴 백을 맨 채, 땀에 젖어 붉은 얼굴로 서있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이 왜 그리 초라하고 궁상스럽게 느껴지던지, 반갑게 나에게 다가오는 엄마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엄마 구질구질하게 이런 걸 왜 들고 왔어. 누가 고마워한다고...”
엄마는 무거워도 가져오면 다 요긴한 것들 이라면서, 밑반찬이며 과일, 외삼촌 가족을 위한 자잘한 선물들을 보여주는데, 나는 내 감정에만 사로잡혀, 함박꽃 같던 엄마의 얼굴이 검게 일그러지기 시작할 때까지 화를 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화를 내다가, 더 했다가는 크게 한번 혼나겠구나 싶어 천천히 말을 줄이며 눈치를 살피는데,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서 있던 엄마가 갑자가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차역 한복판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울었다.
어떤 기억은 절대 잊히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도 하는데, 그날의 기억이 내게 그렇다. 엄마의 울음 속으로 역 광장의 부산함과 소란스러움이 일순간 빨려 들어 간 듯,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엄마와 나를 둘러싸고 슬로 모션으로 걸어 다녔다. 나의 다른 자아가 공중으로 떠 올라 울고 있는 마흔아홉의 엄마와 그 옆에서 놀라서 움츠린 나를 응시하였다. 엄마는 아이처럼 한참을 울고 나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바닥의 짐들을 다시 어깨와 양손에 들고 역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일에 대해 나는 평생 침묵했지만, 그 일로 나는 엄마가 약해질까봐 한없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돌보고 칭찬하는 존재로서 엄마만을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엄마가 나 보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엄마도 엄마가 필요한 존재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직장을 정하거나, 결혼을 할 때, 가능한 엄마와 아빠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지 않도록 미리 혼자 결정했다. 엄마는 내가 내린 결정을 항상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지만, 결정 과정에 고민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식과 용돈을 보내주고, 예쁘다고 해주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가져가라고 전화를 해주는 엄마가 있어 나는 든든했다. 언제라도 지칠 때 찾아가 곁에서 자고, 해주는 밥을 먹고 와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내가 왜 지쳤는지, 걱정하는 일은 무엇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러한 것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고, 오히려 그런 행동이 나를 독립적으로 성장시켰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과거를 회고하면 할수록 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이기적인 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약해진 엄마를 부드럽게 안아주는 보통의 딸들과 달리 약해진 엄마로부터 튕겨져 나와서 멀리멀리 도망갔다. 엄마가 아픈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피했다.
엄마는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며 꿋꿋이 잘 버텨냈다. 의사는 상태가 놀랍도록 호전되어 수술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지는 듯 보였지만, 어쩌면 그건 기다림의 힘이었던 같다. 남은 학기를 다 채우고 귀국했을 때, 놀랍도록 밝은 엄마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고, 죄의식을 숨길 수 있었다. 딸이 혹시 중간에 원하던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올까 봐 전화로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며 울었다. 그렇게 꿋꿋이 버티던 엄마는 내가 귀국한 지 3 주되던 어느 밤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유언 대신 내게 남긴 말.
"내가 어떻게 너 같이 야무진 딸을 낳았을까. 난 그게 평생 신기했다. 어릴 때부터 뭘 시켜도 얼마나 똑똑히 해냈던지. 고3 시험 본 후에 보약 한 채 못 해 먹인 게 지금도 걸린다."
엄마는 야무진 딸에게 평생 속았다. 나는 엄마를 그리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서 마음껏 표시도 못하고 조용히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