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와 함께하여 인간이 된 제정구와 정일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절정기를 살아낸 제정구 선생님과 정일우 신부님은 소외된 약자와 함께 하여 인간이 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일우 신부님이 수없이 반복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큰 울림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빈민의 벗 제정구 선생님은 5수 만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군대에서 복학하자마자 학내 시위로 제작당합니다. 장성환 목사의 소개로 김진홍 목사(당시 전도사)의 청계천 할빈 교회에 찾아간 제정구는 판자촌 생활에 큰 충격(망치로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을 받고 교회 기도실에서 먹고 자면서 배달 학당 야학을 맡게 됩니다. “판자촌의 삶을 나 몰라라 하며 진리·정의·민주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판자촌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빈민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합니다.
먹고살아야 하니, 단무지 행상으로 연명했는데 처음에는 단무지 사이소라는 말이 창피해서 한마디로 못했다고 합니다. 맘속에 교만함. 머릿속의 지식, 서울대 출신이라는 허위의식을 버리게 되자. 몸도 마음도 가뿐해졌고 ‘단무지 사이소’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허위의식은 없는지, 가식은 없는지, 남을 무시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평생의 친구요 동지인 정일우 신부님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빈민운동을 함께 펼쳐나갑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감옥에도 갔으나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게 됩니다. 감옥에서의 시간은 천주교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평생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요 구도자로 살게 됩니다. 출소 후 청계천 판자촌이 강제 철거를 당하자 양평동 판자촌으로 옮겨 생활하고 판자촌 지역인 안양천 둑방에 있는 양평동 판자촌으로 이사합니다.
이때 정 신부님과 나는 마을 한가운데 집을 얻었는데 7평짜리 집에 부엌과 방으로 2평을 5평은 사랑방을 만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신부님과의 공동생활은 계속되었는데 양평동 방두 개중 큰방에는 우리 신혼부부가 살고 작은 방에는 신부님이 살았습니다. 제정구는 판자촌에 들어와 살게 된 아내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내핍과 절약을 강조했습니다. 그마저 강제 철거를 당하게 되자, 그해 겨울 김수환 추기경님이 방문하셔서 도와줄 일이 없느냐 물으셔서 바로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독일의 천주교 단체에 지원을 요청하는 긴급 서한을 보내주셨고 정일우 신부님이 그 서한을 가지고 독일에 가서 정일우 신부는 지원 승인을 받아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포도밭인 소래면 신천리에서 벽돌을 직접 찍어내며 맨손으로 빈민 공동체인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합니다. 복음자리 마을에 대해 정일우 신부는 '신부님은 “우리들의 희망은 집 하나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다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참 인간이 되어가는 용광로와 같은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뒤이어 1979년 시흥동 철거민들과 함께 '한독 마을'도 만들면서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주민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타의 민중운동가들과 함께 목동 판자촌 강제 철거 저지 투쟁을 벌이면서 '‘도시빈민운동’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게 되었고, 제정구에게는 ‘빈민운동의 대부’라는 칭호가 붙게 됩니다.
1984년 빈민운동의 대표 자격으로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으로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으며 1985년 3월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뒤에 천주교 도시빈민 회로 개칭)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그리고 11월에는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86년 2월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1987년 판자촌 강제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아 6·10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정일우 신부와 수녀 두 분 그리고 평신도 몇 세대와 함께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 제정구는 ‘함께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윤택해지기 위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한 집에서 완전히 열어놓고 산다는 것은 아픔과 불편함. 속상함과 어려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참 인간’ 이 되기 위한 용광로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살아야 한다. 공동체 생활은 편한 것보다는 불편한 게 더 많고 짜증 나고 화나는 일이 더 많은 생활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며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아픔이 오히려 보람 있는 것입니다.
제정구는 1998년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좀 배운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주는 것 없이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면 손해를 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생각이다. 함께 하는 것이 결코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할 때 이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이 사회의 약자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은 모두가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묵묵히 수행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고 살아갈만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녀 세대에는 더욱 인간적인 사회가 될 수 있기를 이 시대의 우리들이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KBS 인물현대사 11회 빈민 속으로, - 제정구(2003)
가짐 없는 큰 자유(2000,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학고재)
내 친구 정일우(2017. 감독 김동원)
정일우 이야기(2009, 정일우, 제정구 기념사업회)
위의 자료들을 참고로 저의 짧은 생각을 담았습니다.
* 사진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