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함도, 기다림도, 엄마와 함께 통과한 감정의 시간들
“서아는 그냥 서아야.”
이 말은 서아가 갑자기 툭 내뱉은 말이 아니다. 내가 서아에게 “서아는 참 멋진 아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서아는 꼭 이렇게 되받아쳤다. “멋진 아이 아니야. 서아는 그냥 서아야.” 마치 내 말을 정중하게 밀어내며, 자기 식의 언어로 자기를 지키는 듯한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귀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한 번도 서아에게 “넌 그냥 너로서 괜찮아” 같은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서아의 말은 마치 내 안의 감정과 신념을 반사시켜주는 거울 같았다. 아이가 그런 문장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고, 오히려 나에게 필요한 말을 서아에게 들은 듯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 한마디에 울컥했다. 멋지다, 착하다, 잘한다는 말 대신, “그냥 너는 너야”라는 문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그건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감정을 살아낸 아이가 스스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감정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를 정의할 언어도, 감정도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고, 이름 붙여지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엄마다.
정서적으로 반응해주는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느낄 수 있다. 울거나 떼를 써도, 엄마가 떠나지 않고 그 감정을 함께 견뎌줄 때 아이는 알게 된다. ‘나는 이런 기분이 드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도 괜찮다는 걸, 엄마의 반응을 통해 배워간다. 감정이 통과되는 관계가 아이를 존재하게 만든다. 그것이 위니코트가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이다.
최근 있었던 일이다. 서아는 내가 자기 원하는 걸 해주지 않자,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서아 원하는 ○○○ 안 해줘서 엄마한테 서운해!”
그 순간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감탄했다. 단순히 울거나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또렷하게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서아의 마음에 리얼하게 반응해주려 애썼다. “서운했구나. 엄마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안 해줘서 마음이 속상했지.”
중요한 건, 내가 바로 그걸 해줬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해줄 수 있을 때는 해주고, 못 해줄 상황이면 못 해주는 것. 하지만 그때 아이가 느끼는 기분 — 좋았던 마음이 무너지는 속상함, 기대했던 게 어그러지는 아쉬움 — 그런 감정 하나하나를 존중해주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아이의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를 인정받아야 할 경험이다.
동시에 나 역시 엄마로서 리얼하게 반응한다. 서아가 계속 떼를 쓰면, 나는 “엄마는 그 말 들으니까 기분이 안 좋아졌어. 엄마도 마음이 속상해.” 하고 내 감정을 전한다. 감정과 감정이 만나는 시간. 이건 서로를 컨트롤하려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가 ‘있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연결되는 관계다.
이렇게 감정을 말로 담아주고, 나의 감정도 솔직히 드러내며 함께 머무는 경험이, 아이를 자기 감정의 주인으로 자라게 한다. 그 감정이 통과되는 관계 속에서, 아이는 자기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게 바로 감정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부모의 역할이고, 위니코트가 말한 정서적 동조의 핵심이다.
요즘 서아는 어린이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산책 중에 어린이집 안을 들여다보고, 친구들이 등원하는 모습을 궁금하게 바라본다. 엄마 없이도 밖으로 나가 숨고, 자신만의 탐색을 시작했다. 자율성이 자라나고 있고, 자기 세계를 구성할 준비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런 변화는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의 관계 안에서 감정을 살고, 기다리고, 때로 서운한 경험을 하고, 그 감정 위에 다시 안도감을 쌓아온 시간의 축적이다.
나는 아이가 외롭고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누구와 함께일 때만 즐겁고 안정된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에도 자신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아이. 그러려면 아이가 먼저 ‘관계 안에서 자기 감정을 충분히 살아본 경험’을 해야 한다. 엄마가 바쁠 땐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속상한 마음도 느낀다. 그 감정을 표현하면 엄마는 거울처럼 그 감정을 비춰준다. “속상했구나, 엄마가 바로 안 와서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이렇게 감정을 말로 담아주는 순간, 아이는 자신이 느낀 것을 인식하고 통합해간다. 감정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일이 바로 정서적 동조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에게 '존재해도 괜찮다'는 내면의 확신을 심어준다.
어떤 날은 나도 지치고 힘들다. 쉬고 싶을 때도 있고, 일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다. 서재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하는 날, 나는 서아에게 말했다. “엄마는 지금 일하고 있어서 방해하면 안 돼. 아빠든 엄마든 서재에서 일할 땐 존중해줘야 해. 엄마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랬더니 어느 날 서아가 서재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 일할 땐 방해하면 안 돼~~” 그러면서 책상 앞에서 조용히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새 “엄마 이거 먹어” 하며 장난감으로 만든 요리를 갖다준다. 엄마 걸 하나씩 가져다주며, 함께 있는 방식으로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서아는 내가 일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찾아냈다. 이런 순간들은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한 시간 속에서 감정을 주고받으며 배운 결과다. 엄마의 리얼한 감정 표현과, 아이의 감정이 존중받은 경험이 축적되어야 가능한 반응이다.
서아는 엄마도 감정이 있고, 엄마도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런 엄마 곁에 조용히 머무르며 기다리는 법도 배워가는 중이다. 물론 언제나 이상적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아이 입장에서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어떤 날은 꽤 긴 시간도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지만, 어떤 날은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 역시 사람이다 보니, 일에 몰두하다 보면 더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면 서아는 꼭 반응을 준다. 조용히 와서 말한다. “서아랑 밖에 나가서 노란 이불 위에서 리조또 만들기 하면서 놀자. 블럭놀이하면서 놀자. 엄마가 일 너무 오래 해서 속상해.”
그 말은 서아의 정서적 언어이자, 관계를 회복하자는 초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때로는 “아… 5분만! 5분만…” 하고 버텨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알겠어, 엄마도 서아랑 놀면 좋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나가서 신나게 논다.
이것이 바로 쌍방 감정 소통이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감정을 말하고, 나는 내 상황과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며, 결국 다시 만나는 법을 안다. 이 반복은 단지 '잘 놀아주는 엄마'의 역할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도 관계가 이어진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의 감정을 듣고 조율하는 경험. 그게 진짜 정서적 애착의 깊이다.
이건 단지 육아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서 오는 학습이다.
서아가 말한다. “서아는 그냥 서아야.” 누가 칭찬해주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아도,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아이. 그 말은 아이가 감정과 존재를 구분 없이 느끼고 있다는 신호다. 감정으로 존재를 경험한 아이만이, 스스로를 말할 수 있다.
그런 서아를 보며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리얼한 감정으로 함께한 시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내면 어딘가에 단단한 기둥처럼 박혀 있음을 느낀다.
서아는 그냥 서아야. 그리고 나는, 그런 서아와 진짜 감정으로 살아낸 시간 속에서,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이 글은 그저 육아 이야기가 아니다. 관계의 이야기이고, 감정의 이야기이며, 결국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아이에게 리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엄마가 된다는 건,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내는 훈련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곧 나를 키우는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서아와 함께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