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성으로 잘해주는 관계에서 벗어나기까지

감정은 빠져 있고, 호의만 남아 있던 관계에서 나오는 길

by 틈 사이의 온기

언뜻 보면 정말 잘해주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멀어질 기색이 보이면 갑자기 푸짐한 선물, 진심처럼 보이는 대접이 쏟아진다.
“나 너 많이 아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일방적인 호의들.

예전엔 그런 정성에 감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호의의 타이밍과 결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정성’은 유독, 내가 멀어지려고 할 때만 등장했다.
그 전에는 내가 보낸 감정 신호, 불편함, 슬픔, 화 같은 것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갔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 감정은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나의 호의는 받아.”

이벤트는 성대하지만, 감정은 공백인 관계.
그 구조가 너무 익숙했다.


엄마도 그랬다.
평소엔 내 감정을 잘 듣지 않다가, 어느 날 엄청난 선물을 사오며 말한다.
“엄마가 얼마나 너 생각하는지 알겠지?”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내 마음은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들어준 적 있었어?”

수진도 그랬다.
내가 육아로 지쳐있고, 아이가 화상을 입어 정신이 없던 시기.
그녀는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은 걸 서운해했고, 나는 미안한 마음에 먼 길을 운전해 그녀의 집에 갔다.
내 사정을 조심스럽게 설명하며 “그래도 네 마음 풀고 싶어서 일부러 온 거야”라는 뜻을 전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랬어? ㅋㅋ”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서운해한 적도 없고 연락을 기다린 적도 없었다는 듯한 쿨한 말투.

하지만 그 이전, 내가 미안해서 보낸 선물에는 3일이 지나서야 대답이 왔고,
그녀는 분명히 “넌 늘 바쁜 느낌이야”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엔 “네가 나를 소홀히 했다”는 은근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내 사정을 들어도 풀리지 않았다.
그저 기억하지 않는 척, 괜찮은 척, 아무 일 없었다는 척으로 덮여버렸다.


먼저 서운함을 풀고 싶어서 나는 일부러 여유도 없는 날, 당일치기로 다녀왔었다.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단체 톡방에서 정중한 말투로 ‘며칠 자고 가라’는 초대가 왔다.
그 톡은 개인 메시지가 아니라, 미정이와 함께 있는 단체방이었다.
나는 그때 여건이 되어 다시 한 번 그녀의 집을 찾았고, 이번엔 이틀을 자고 갔다.
하지만 그때 들은 말은 또 한번 나를 답답하게 했다.

내 진심이 무시당하는 그 감정.
“아? 너 그때 엄청 짧게 있다가 가지 않았나? ㅋㅋ”
내가 진심을 다해 없는 시간 쪼개 다녀갔던 첫 방문은, 그녀의 기억 속에 그렇게 남아 있었다.

정작 내가 방문한 날에도
그녀는 나와 시간을 보내기보단 강박적인 집 정리에 몰입해 있었다.
주방 정리, 예쁜 아이들 음식, 아이 장난감 위치까지 하나하나 정리하며
나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고,
그 공간에선 내가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틀 동안 머무르며 봤던 그녀의 모습은 더 확실했다.
나는 그저 정돈된 집에 놓인 인형처럼, 그저 배경처럼 존재했다.

나라면,
그렇게 먼 길을 와준 친구가 있다면
함께 빨리 정리하고 수다를 떨고, 나눌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을 텐데.
그녀에게는 ‘내가 왔다는 사실’보다,
‘그 순간의 집 상태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느 날 불쑥 선물을 보내온다.
뜬금없이, 아무 맥락 없이.
관계가 조금 멀어질 때마다 이벤트성으로 툭툭 던지는 호의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대화가 없었다.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녀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이벤트는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진짜 관계는 이벤트 사이사이에 숨은 감정을 어떻게 다뤘느냐로 남는다.

한때는 나도, 그 이벤트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래도 날 아끼긴 하는구나”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잘해주는 순간보다
그 사이사이의 내 감정을 어떻게 다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내가 슬프고, 화나고, 아팠던 순간.
그때 내 마음을 그 사람이 어떻게 대했는지,
그게 그 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구조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진짜 좋은 관계는
감정이 지워진 친절이 아니라
감정을 존중하는 불완전한 순간들 속에 있다는 걸 믿는다.

ChatGPT Image 2025년 6월 24일 오후 04_28_34.png

#관계의진심 #감정없는호의 #이벤트성관계 #나를지키는연습 #심리글쓰기 #브런치글쓰기 #감정존중 #회복의기록

이전 07화친한 척, 지배하려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