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맞추면 편하다고 믿었다.
갈등이 없는 관계가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맞추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서로 기분 상할 일도 줄어들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내 안에 작은 불편함이 올라와도, 그걸 꾹 삼키고 상대의 기준에 맞췄다.
수진과의 관계도 그랬다.
처음부터 나는 그 사람의 섬세함과 주도적인 면을 편하게 느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수진은 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었고, 나는 그 기준에 자연스럽게 따랐다.
맞추면 큰 충돌 없이 관계가 유지됐다.
서로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맞춤”은 점점 내 자유를 잠식했다.
수진은 농장 동물 먹이주기를 “학대 같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주방에 다른 사람이 살림을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과일을 무조건 1종 세제로 씻어야 한다며, 내 방식에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혼자일 때는 그 기준을 철저히 지키더니, 아이를 낳고 힘들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포기하는 모습도 봤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아 그래, 네 기준대로 할게” 하며 넘어갔다.
한 번은 사랑이를 데리고 수진 집에 놀러갔을 때, 사랑이가 기저귀에 볼일을 보고 엉덩이를 씻겼다.
그 뒤에 수진이 “우리 둘째 아이 바지 입고 갈래?” 하고 물었다.
“아니 괜찮아~” 하고 대답했더니, “얼룩이 좀 있어서…”라고 덧붙였다.
그 얼룩은 너무 연해서 내가 보지도 못했던 수준이었다.
나는 “그 정도는 뭐ㅋㅋ” 하고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했다.
그 순간에도 내가 다시 맞춰야 할까 봐, 설명해야 할까 봐, 작은 긴장이 스며들었다.
예전에 내가 수진과 미정에게 “우리 집에 놀러오면 대게 대접할게”라고 했던 적이 있다.
미정이는 “너무 좋다”며 즐거워했는데, 수진은 “누가 안 까주면 못 먹는다”고 했다.
그때는 “아 그렇구나~” 하고 넘겼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손에 묻는 걸 극도로 불편해하는 태도의 일부였구나 싶다.
그때의 나는 그냥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관계가 편하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나도 내 방식이 필요했다.
내 기준은 집이 좀 더러워도 괜찮고,
밖에서 매일 뒹구는 아이 옷에 얼룩이 조금 있어도 상관없고,
음식의 청결도 배탈이 나지만 않으면 충분하다.
그 기준들이 하나둘 생기자 수진과의 관계는 예전처럼 편하지 않았다.
이제는 맞추고 나면 허전함과 피로만 남았다.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는 데에는 무의식적인 작용이 크게 작동한다.
어떤 결핍이나 익숙함이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
하지만 성숙한 관계는 어느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내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신중하게 깊어져야 한다.
요즘 수진과의 관계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불편하다.
수진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서인지, 그 통제적인 기준이 더욱 선명해졌고,
때로는 나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그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자책했을 텐데,
지금은 그 사람의 언행이 그 사람의 내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늘 자기는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며 태연하게 구는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오히려 나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처럼 느껴져서, 진짜 그런 줄 알았다.
현실을 깨닫고 나니, 더 까다롭고 통제적인 쪽은 수진이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내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먼 길을 찾아가 시간을 보냈는데,
돌아오고 나면 “나 왜 했지?” 하는 허무함이 남았다.
나 자신이 수진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지금은, 단순히 서로 맞지 않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살기 위해 거리를 둔다.
언젠가 수진이 달라지고, 서로가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모습으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방식이 너무 달라서, 억지로 이어붙이고 싶지 않다.
그게 그 사람 개인의 통제적인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그런 기준에 맞춰주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맞추면 편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니, 내 마음이 훨씬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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