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식탁에서 내려오기로 결심한 날
미정과 수진, 그리고 수진의 아이 이현이, 내 딸 사랑이와 내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여행 준비부터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행 전에 함께 설레는 기분을 나누는 순간도 없었고, 식사 준비물을 이야기하던 단톡방에서는
“사실 우리 놀러 가는 건 아니지”라는 말이 툭 던져졌다.
그 말이 어쩐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도 아이를 데리고 여러 번 여행을 갔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겁고, 서로 기분을 맞추려 애써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는 ‘네가 아이를 맡길 데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간다’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수진은 늘 친정에 편하게 아이를 맡기면서도,
내가 고생하며 혼자 아이 돌보는 법을 배워가고, 조금씩 성숙해지는 모습에 대해서는 은근히 깎아내렸다.
패밀리침대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다.
“애 끼고 사는 사람들이나 침대 높이 맞추고 그러지”라고, 마치 내 선택이 유난스럽고 별 의미 없는 일인 것처럼 말했다.
마음 한편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미묘하고 낯선 거리감이 늘 남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밥을 먹으려 했지만, 결국 상황은 달랐다.
내가 사랑이와 이현이까지 밥을 먼저 다 먹이고 나니, 이제야 어른들 밥이 막 완성됐다.
사랑이가 그 타이밍에 말했다.
“엄마, 나 산책 가고 싶어.”
그래, 밥 다 먹고 나가자고 약속했었다.
그 순간 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밥 다 됐는데 이건 어쩌고 나가냐?”
숨이 턱 막혔다.
그 말에 담긴 감정이 너무 익숙했다.
어릴 적, 엄마가 차린 밥 앞에 앉아야만 했던 그 긴장.
밥을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제때 먹지 않으면 사랑도 사라질 것 같은 공포.
그 순간, 내가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랑이를 바라보며, 겨우 한마디 했다.
“이모들이 안 된대. 밥 먹고 나가자.”
결국 그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사랑이를 씻기고 재우고 나서, 내가 식탁에 앉았다.
식지 않은 밥을 함께 먹고 싶어 파스타를 다시 조금 데우고 소고기를 구워서 내왔다.
내가 굽는 동안 몇 번이나 “식으니까 얼른 먹어”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끝내 손도 대지 않고, “같이 먹자”며 기다렸다.
내가 식탁에 가서 겨우 앉았을 때, 고기는 이미 다 식어 있었다.
차린 밥상은 따뜻하지도, 즐겁지도 않았고
그저 한없이 서운하고 허무했다.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 내내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나는 부엌에 서고 싶었다.
같이 요리를 하며 웃고 싶었다.
하지만 “아냐, 내가 할게”라는 말이 돌아왔다.
함께하자는 말은 있었지만, 실은 모든 것이 수진의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그 기준에 맞추느라 내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여행이 끝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사실 처음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내가 “같이 카페 가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여행 내내 쌓인 묘한 거리감과 부정적인 감정에 지쳐버렸다.
비도 오고, 사랑이도 차에서 잠들었고,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난 집에 갈래”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걸,
또 눈치를 보며 카페에 따라갔다.
마치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끝내 가기 싫은 카페에 앉아 있었던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안다.
그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걸.
“나는 지금 집에 가고 싶어.”
“나는 내가 싫은 걸 싫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하지만 그 말을 삼켰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방식으로.
갈등이 일어날까 봐, 내가 미움받을까 봐, 내가 잘못된 사람일까 봐.
그렇게 나는 나를 다시 조용히 접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날 밥상이 나를 화나게 한 것은 그 순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내 삶에서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통제에 맞춰 앉아야만 했던, 내 감정을 누르고 내 자리를 포기하던 시간들.
지금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울분이 마음에 차오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짐한다.
이 울분이 나를 삼키게 두지 않겠다고.
이 감정을 어떻게든 돌보고, 이해하고, 나의 성장으로 바꾸어보겠다고.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식탁에서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밥을 먹고,
내가 원하는 순간에 잠시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라도 내 마음에게, 어린 시절의 나에게 전한다.
“그때도, 지금도, 너는 억울할 만큼 최선을 다했어.”
“싫은 건 싫다고 해도 돼.”
“이제는 네가 네 편이 되어주면 돼.”
나는 그 밥상에서 내려와,
나만의 자리에 앉아 나를 위한 한 끼를 차리려 한다.
#감정의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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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돌보는연습
#관계에서벗어나기
#엄마로산다는것
#억울했지만최선을다했어
#마음성장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