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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n 13. 2019

세 사람의「오타쿠」이야기

사이토 타마키, 오오츠카 에이지, 아즈마 히로키의「오타쿠」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사이토 타마키와 오오츠카 에이지,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가 논하는 ‘오타쿠’ 와 그 저변을 소개하고 독자에게 비교할 여지를 제공할 목적으로 쓰였다. 사이토 타마키는 ‘오타쿠’ ‘히키코모리’를 비롯한 현대 일본의 여러 사회현상과 문화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의 관점(주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차용)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는 글을 쓰는 정신과 의사 겸 저술가이다. 오오츠카 에이지는 비평가, 소설가 겸 만화원작자로 대표작으로 <브레이크 에이지>가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자 겸 비평가로 현재 일본 철학계의 주목받는 학자이자 논객 중 한 명이다.


개관


서브컬처 비평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저 중 한 명 이상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근 20년 간 세 사람은 ‘현장의 제작자’ 가 아닌 ‘바깥에 있는 관찰자’ 로서 ‘오타쿠’를 두고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 왔다. 물론 오오츠카 에이지는 ‘전직 원작자’ 로서 서브컬처 업계와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디어 원작자로서 오오츠카의 활동 시기는 80~9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작품 활동보다는 전문 기관에서 교육자로, 논단에서 논객 활동 및 저술에 비중을 두고 있다. 사이토 타마키는 국내에도 정식 번역된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을 시작으로 병리적 관점에서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를 분석하는 책을 여러 권 냈다. 아즈마 히로키 역시 국내에 정식 번역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2권에서 자신의 문학론을 통해 오타쿠와 서브컬처 콘텐츠를 분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타쿠를 (세간에서 보듯)부정적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들 나름의 관점을 세워 바라보는 기성 지식인’ 이라는 점이다. 사이토는 ‘사회 현상의 일종’ 으로서, 오오츠카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 으로서 오타쿠를 바라보며, 아즈마는 라이트노벨, 비주얼 노벨 등의 오타쿠 콘텐츠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한국에도 일찍이 일본의 오타쿠 및 오타쿠 문화가 전파된 후 거의 비슷한 양태로 흘러왔고, 주로 아마추어 팬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 오타쿠 및 서브컬처 담론을 펼쳐 왔다. 오타쿠와 서브컬처에 대해 어떤 글로든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사이토 타마키의 ‘오타쿠’


‘오타쿠’ 정신과 의사


사이토는 스스로를 ‘오타쿠’ 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전투미소녀와 정신분석>에서 ‘어느 의대 정신과에서는 의사들끼리 에반게리온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토론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는 말과 함께, 오타쿠의 성질을 띤 사람은 사회 어느 집단이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 중 <캐릭터 정신분석~만화, 일본, 일본인~>에서도 자신을 ‘내적 지향의 하라주쿠계’ 라 시인한다. 사이토가 책에서 제시한 용어인 ‘하라주쿠계’ 는 한국어 조어에서 빌리자면 소위 ‘아싸’ 와 유사한 벡터를 가진다. (‘시부야계’ 는 ‘인싸’ 이다) 그가 2003년에 코단샤講談社 계간 무크지 <파우스트>의 JET STREAM TALK 코너에서 소설가 타키모토 타츠히코와 사토 유야, 편집장 오오타 카츠시와 대담을 나눈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춘기와 중2병을 주제로 한 이 자리에서 사이토의 정리 발언을 옮겨 본다.


<저는 캐릭터라는 것은 작가의 인격이나 내면을 그대로 출력하기 때문에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씨가 쓰고 있는 캐릭터에는 그런 작가의 인격이나 내면을 초월하는 폴리포닉(polyphonic : 운율적인)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토 씨의 방향성을 막아버리면, 나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고상해서 독자가 따라오지 못하진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오타쿠 컬처 관련 대표 저작인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과 「캐릭터 정신분석」은 제목만 보아도 기성 지식인의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이 전해진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위시한 서브컬처는 호의적인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그런 덜떨어진 낙오자들을 정신력부터 길러 갱생시켜야 한다.’ 는 식으로 말하는 기성 지식인들의 책들이 서점 한구석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저서 「사춘기 포스트모던」의 서두에서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속칭 ‘청년 개새끼론’ 은 어른들에게 ‘요즘 애들 무서워 죽겠다.’ 라는 의미에서 전부 해결된 것과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서 읽고 있는 동안 기분이 나아지거나 마음이 후련해지거나 한다. 무책임하게 천하를 근심해 보이는 일은 ‘어른’ 에게는 그럴듯한 스트레스 발산법이다. ‘청년 개새끼론’ 이 먹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그러나 1989년에 있었던 소녀 연속 살인사건이 계기가 되어 ‘오타쿠’ 라는 말이 단번에 보급되게 된다. 말의 보급과 함께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만들어졌다. ‘오타쿠족族’, ‘오타키オタッキー’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타쿠’는 한때의 유행어로부터 일상적인 구어로 충분한 진화를 달성했다.


그리고 1990년대, 착실하게 증가해 왔던 해외의 ‘아니메(이른바 “재패니메이션”)’ 팬 등을 중심으로 “otaku”라는 말이 수출되었고, “sushi”,“karaoke”등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에서 ‘외래어’ 로 인지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otaku”라는 말이 들어 있는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면 7만 건에 가까운 리스트가 나온다…>


사이토가 밝힌 바에 따르면 오타쿠는 미야자키 츠토무宮崎勤 사건 이후의 사용법으로는 ‘집에 틀어박혀 있으며 대인관계가 나쁘고 어두운(또는 위험한) 인간’ 이라는 네거티브한 이미지도 있으며, 한때 유행어였던 네쿠라根暗(본성이 음침한 사람)의 포지션에 ‘오타쿠’ 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느낌이 있다고 밝힌다. 


사이토는 완전한 오타쿠의 서술 같은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미리 못박아둔다. 그가 인용한 오카다 도시오의 『오타쿠학 입문オタク学入門』에 따르면 오타쿠의 정의는


1. 진화된 시각을 갖는다


2. 고성능의 레퍼런스 능력을 가진다


3. 만족할 줄 모르는 향상심과 자기 현시욕


그리고 현역 오타쿠가 그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로 ‘과잉되었다고 할 만큼의 자기언급성(자칭이 아니다)’ 과 ‘자신이 타인에게 카테고리화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는 두 가지 점을 든다.


그러나 사이토는 오카다가 ‘오타쿠 킹’ 으로 알려져 있는 점을 들며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오타쿠를 자인하기 위해서는 오타쿠를 탈피해야 하는데, 오카다 씨는 오타쿠 나라의 대변인으로 보인다. 그의 저작은 현장으로부터의 리포트로 재미있고 자료적 성격이 높다는 희소성이 있지만 그 자신이 오타쿠 밖으로 충분히 나오고 있지 않다. 그가 오타쿠의 병리적 측면을 굳이 보지 않는 것은 일종의 전략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종종 일면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카다 씨는 오타쿠의 본질인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사회학자 오오자와 마사치大澤真幸의 ‘오타쿠론’을 두고 사이토는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엄밀한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오오자와는 오타쿠라는 현상을 최대한의 한계점까지 추상화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힌다.


<오타쿠에게는 자기동일성을 규정하는 두 종류의 타자, 즉 초월적인 타자와 내재적인 타자가 극도로 근접해 있다.>


사이토의 풀이에 따르면 초월적인 타자에 의해 성립되는 것은 자아 이상, 즉 ‘그렇게 되고 싶은 나’ 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 ‘지적이고 수입이 많은 직업을 갖고 싶다’처럼 일정한 사회적 가치관에 의해 성립되는 자기 이미지, 한편 내재적인 타자에 의해 성립되는 것은 이상 자아의 차원이다. 이는 사회적인 가치판단이 어쨌든 제쳐 놓고 ‘나는 대단하다’, ‘다시 태어나도 내가 되고 싶다’ 는 등의 나르시시즘적 자기 이미지를 가리킨다.


단 사이토는 오오자와의 정의를 두고 정신병리적으로 ‘오타쿠’의 어감을 정신병자적인 것으로 편향시켜 버렸다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또한 ‘우리들도 오타쿠 못지않은 신경증자라는 점에서 심적 장치의 구조상의 차이는 전혀 없다. 따라서 “자아 이상과 이상 자아의 근접”에 대해서도 비유로서는 일면 옳다고 인정할지라도 구조 분석으로서는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한 오오자와 씨의 이러한 표현은 ’내재성‘보다는 ’초월성‘을, ’이상 자아‘보다는 ’자아 이상‘을 좋게 평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염려가 든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현실을 받아들여 어른이 되어라‘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여라‘ 같은 친숙한 슬로건을 보강하게 될 것이다’ 며 우려의 목소리도 내비치고 있다.


사이토는 오타쿠의 특징적인 점으로 ‘소유 양식’을 든다. 정말로 그들은 아니메를 좋아하지만 현물에 대한 수집벽이 오타쿠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오타쿠들이 사랑의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방식은 그에 따르면 ‘허구화의 절차를 통해서’ 이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 가지고 있는 허구를 더욱 ‘자신만의 허구’ 로 레벨업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오타쿠의 패러디 애호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코스프레나 동인지도 우선 이와 같이 허구화의 절차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 (중략) 작품에 스스로 빙의되어 동일한 소재에서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동체에 발표한다. 이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오타쿠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유의 의식’은 아닐까>


그리고 사이토는 ‘모든 오타쿠는 평론 충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에서 미야자키 츠토무도 예외는 아니다.’ 라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타쿠는 자신이 애호하는 대상물을 손에 넣는 수단으로서 ‘그것을 허구화한다’,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방법밖에 모른다. 거기에 새로운 허구의 문맥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캐릭터 정신분석


<…지금까지의 기술記述에 의문을 가지신 분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오타쿠’ 와 ‘마니아’ 는 다른 것일까. 혹은 ‘모에萌え’와 ‘페티시즘’ 은 같은 것이 아닌 걸까. 이미 알고들 계시듯, ‘주체─욕망의 형식’의 조합이란 의미에서 ‘오타쿠─모에’ 와 ‘마니아─페티시즘’ 은 평행 관계이다. 다만 당연하게도 정신분석의 입장에선 양자 사이의 구조적・본질적인 구별을 풀어내기는 어렵다.>


사이토는 「캐릭터 정신분석」 서두에서 ‘오늘날의 수많은 사상들을 횡단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역사적 변이를 파헤치는 방식으로 알려진 ‘중출입증법’을 창시한 야나기타 쿠니오처럼, 비록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내가 어휘를 정의하는 기본적 발상은 야나기타와 같다. 어휘의 용법을 횡단적으로 분석하여 정의된 바를 통해 역사적 변이까지 사정거리에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국회도서관을 뒤지는 게 아니라 임상의로서 현장을 진단하듯 대상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라 밝힌 바대로 일상의 캐릭터, 문학으로서의 캐릭터, 예술 표현으로서의 캐릭터 등을 기술한다. 그리고 이윽고 책의 흐름은 ’오타쿠론‘ 에 이른다.


<『모에萌え』의 현대적 어의・용법을 의미론・어용론을 참조하며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여러 가지 대상을 향한 호의적인 감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을 총칭하는 용어. 대표적인 대상으로는 애니메이션・만화・게임으로 일컬어지는 픽션 등에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의 성격, 특징 등이며, 대표적인 감정으로는 보호 욕구나 비호 욕구를 동반한 유사 연애적인 호의나 애착 또는 순수한 호의나 애착, 페티시즘이나 모에 속성에 관한 기호나 경향 등이 있다.’>


위엣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이토는 오타쿠와 마니아의 차이를 선호 대상에 대한 지향성의 차이에서 찾는다. 오타쿠의 모에萌え 대상은 애니메이션, 게임(걸girl 게임ギャルゲ─중심), 라이트노벨, 성우 아이돌, 특촬, C급 아이돌, 동인지, 야오이 등이다. 마니아의 페티시즘 대상은 우표(수집), 서적(수집bibliomania), 오디오, 카메라, 천체관측, 새 관찰bird watching, 곤충 채집, 록음악, 그 외 수집 관련 전반이다. 대상의 성격을 들여다보면 오타쿠는 허구 지향성이 강한 반면 마니아는 실체 지향성이 강하다. 마니아의 대상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아서 전시하고 만져 보고 할 수 있는 반면 오타쿠의 대상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현실의 성우, 코스프레, 제작사의 관련 상품이란 실체가 있는 사람이며 물건이라 ‘허구 지향’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빈약하다. 그래서 사이토는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해온 ‘캐릭터’를 꺼내든다. 


<캐릭터 모에キャラ萌え라는 말이 상징하듯 무엇인가에 모에萌え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한번쯤 캐릭터화化하는 것은 불가결하다. 바꿔 말하면 현실의 인간이든 인간이 아닌 무기물이든 일단 캐릭터화化해버리면 모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구체적인 예로 ‘안경 모에メガネ萌え’인 오타쿠가 꼭 실제 안경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안경을 쓴 캐릭터의 화상画像을 선호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캐릭터라는 전체성과 화상이라는 시각적 요소는 불가결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발 페티시靴フェチ 마니아는 신발 사진 같은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현물의 소유에 집착한다. 그렇다고 꼭 그 마니아가 신발의 소유자로서의 ‘인격’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토는 ‘모에’ 라는 말이 없던 때에, 원래 단순히 패러디나 유머로서 기능했던 ‘로리타 지향’ 이라는 것이 오타쿠들에 힘입어 그들의 작품관, 세계관 속 성적 기호로서 구체화되어간 것에 주목한다. 오타쿠들의 문법으로서의 ‘캐릭터’ 와 ‘모에’ 는 불과 이십 년 남짓의 시간 동안 변모한 아키하바라의 풍경을 비롯해 책에서 미처 다 설명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현상임을 지적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의 '오타쿠'


‘소비자로 전락한’ 요즘 오타쿠를 비판하는 1세대 오타쿠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아 왔다. ‘새싹 자르기’ 때문에 밑의 유능한 스텝이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온 대표 사례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있다. 그리고 국내에도 캡처로 수없이 돌아다니는 ‘요즘 오타쿠 창작자들의 문제’ 도 있다.


미야자키의 지론에 따르면 ‘요즘 애송이들’은 직접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영감을 얻으려 하지 않은 채, 어릴 때 방구석에서 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따라하는 것 정도밖에 할 줄 모른다. 이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은 밀어 두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오츠카의 ‘신세대 오타쿠’ 에 대한 시선 역시 이와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출판자 및 기고가 선정우가 오오츠카와의 대담을 정리한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과거 일본에서는 오타쿠라는 계층이 어떤 의미로는 긍정적인 존재였습니다. 단순히 제가 나이가 들어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이낙스GAINAX를 만들었던 멤버,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나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특촬 단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만들고자 했던 거죠. 가이요도의 개러지 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괴수 모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으니까 직접 만들자는 생각이었죠.


저도 만화잡지 편집을 맡던 시절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등단시키고 싶었던 만화가는 주류 잡지에서 기용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만드는 잡지에라도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 식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드는 것이 오타쿠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이런 거 갖고 싶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항상 받는 입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타쿠가 ‘유저화’된 것이죠. 과거에는 오타쿠가 ‘크리에이터’였는데 지금은 ‘유저’가 된 것이 치명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화된 오타쿠 중에서 새로운 세대의 크리에이터가 나오지 않고 있는 거죠. 유저 입장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다 소비하고 나면 또 다른 작품으로 이동해서 그 타이틀을 소비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토쿠마 서점 2층의 주민들


오오츠카는 저서 「2층의 주민과 그 시대二階の住民とその時代」에서 자신의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보아 온, 토쿠마 서점徳間書店 2층에 입주해 온 크리에이터들을 회고한다. 지브리 작품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배경이기도 한 그곳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곳은 이 나라의 서브컬처라든지 재패니메이션이라든지 혹은 오타쿠라든지 부녀자라든지 모에라든지 그리고 지브리까지 포함해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없는 것들의 기원의 장소 중 하나이다>


오오츠카는 최초의 오타쿠들인 2층의 주민들의 공통점으로 ‘상영회’ 와 ‘작품 리스트’를 꼽는다. 고등학생 때 여자 상급생의 권유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사팔뜨기의 폭군やぶにらみの暴君」(이후 왕과 새王と鳥의 프로토판)의 상영회에 참여하고, 이후 그들은 각자 소회를 남긴 작품 리스트를 써 공유하고, 훗날 그들 중 몇몇이 토쿠마 서점 2층에서 잡지 「아니메쥬アニメジュ」를 출간한다.


본서에서 오오츠카가 오타쿠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집약한 소단락 하나를 그대로 옮긴다.


* * *


「애니메이션 잡지 편집 작법」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오타쿠」들의 「편집하려는」 욕망


무언가를 글로 써내는 인간 중에는 그저 만화나 소설이나 비평을 ‘쓰는’ 것뿐 아니라 그를 ‘잡지’ 나 ‘책’ 의 형태로 만든다는 또 하나의 열정을 가진 인간이 있다. 이 에세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민속학의 창시자 야나기다 쿠니오의 말년의 문장 중 ‘내가 직접 만든 책이나 잡지는 꽤 성공적이었다’ 며 편집자로서의 자부심을 밝힌 구절이 있다. 실제로 야나기다는 여러 번 잡지나 총서를 창간하였고 『토오노 이야기遠野物語』만 해도 실질적으로는 자비출판물이다. 내가 야나기다 쿠니오의 이러한 자부심에 공감하는 이유는 역시 ‘편집’ 이란 것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만화나 애니메이션 분야로 되돌려, 테즈카 오사무가 소년 시절에 대학생용 노트에 만화를 그려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단 노트에 만화를 그린 것뿐 아니라 ‘목차’ 나 ‘차회예고’ 가 있고, 그리고 ‘독자’ 가 있다. 독자는 동급생들이다. 테즈카의 후계자들인 토키와장トキワ荘 모임의 사람들 중에도, 두 사람의 후지코 후지오가 수기 원고를 철해서 표지나 권두 그림이나 목차를 삽입한 잡지를 만든 대목이 후지코 A의 『만화도まんが道』에 그려져 있으며,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주재한 동일본만화연구회의 『먹물 한 방울墨汁一滴』은 복각되어 그 일부를 읽을 수 있다. 인쇄 수단이 현재처럼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 만화사의 선구자들은 단 한 권밖에 존재할 수 없는 수제 ‘잡지’를 편집했다.


원화를 그대로 철하는 이런 방식의 동인지는 육필회람지肉筆回覧誌라 하여 내가 중학생 때부터 대학 시절에 걸쳐 소속되어 있던 만화 동인지 · 작화 모임도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 『야마토』 특집을 최초로 짠 잡지 『OUT』(미노리 쇼보みのり書房 출판)가 직후 기획한 것이 아직 동인지 작품 형식이었던 히지리 유키의 『초인 로크超人ロック』의 특집이지만, 이 『로크』도 시작은 작화모임의 육필회람지에 게재되었다. 그것은 내가 입사하기 전의 일이다. 육필회람지에는 작품의 뒤에 열람한 자가 평을 적는 페이지가 반드시 있으며, 『로크』에 대해 하기오 모토萩尾望都나 타케미야 케이코竹宮恵子의 서평이 적혀 있던 걸 본 기억이 있다. 작화 모임은 육필회람지 외에 ‘인쇄’를 통한 회보를 발행하였는데, 내가 입사한 직후 나온 건 ‘등사판’이었으나 머지않아 오프셋 인쇄로 바뀌었다. ‘등사판’, 즉 등사기로 박은 만화 동인지의 회보라 하면 상상이 안 갈 수도 있겠지만(아니, 그 이전에 교편을 잡고 있는 대학의 학생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등사판 자체를 몰랐다), 당시의 동인지에는 납지(등사 원지)를 일러스트 위에 겹쳐 가볍게 트레이싱한 후 철필로 새겨 원화의 펜터치를 재현하는 명인이 있었다. 작화모임은 회원수도 많았고 자본資本 출판사인 토코샤東考社와 제휴해 만화책의 자주自主 레이블을 동인지로 간행하는 등 선구적이었지만, 적은 인원의 모임은 인쇄하려면 등사판이나 청사青焼き복사 그리고 흔히 사람들이 제록스Xerox라 부른 갓 보급된 복사기가 중심이었다. 코믹마켓 등장 전야의 시대이다. 오프셋 인쇄는 아직 절벽 위의 꽃이었다.


2층의 주인들이 토쿠마 서점에 표착하기 전에 공통적으로 경험해온 것이 ‘리스트’ 만들기, ‘상영회’, 거기에 ‘동인지 만들기’ 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화모임에 적籍을 둔 것처럼 2층의 주인들은 여명기의 특촬 팬 잡지에 우선 표착, 이어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리스트’ 만들기의 열정을 지닌 똑같은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고, 몇 개의 전설적인 동인지가 생겨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기고가’ 로서 토쿠마 서점 2층에서 잡지 만들기에 관여한 그들은 다른 면에서는 ‘편집’의 욕구를 지닌 사람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질이 그들 안에 있던 건 토쿠기 요시하루徳木吉春의 다음 증언에서 느낄 수 있다.


ー본능처럼 해 왔지요. 집도 좁아서 만화 같은 걸 사다보면 일 년 지나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아깝지만, 『아톰』 같은 만화의 포즈를 전부 잘라내어 그림용지에 붙여 포즈집 같은 걸 만들었지요. 그것이 나중에 (잡지 만들기의)구성에 한몫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쇼넨少年’ 지 같은 경우 모든 연재본의 등장인물을 전부 순서대로 늘어놓았습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예를 들어 매 호마다 짤막하게 실려 있는 걸 책 한 권으로 정리하곤 했습니다. 가령 괴수의 사진을 정리한다든지, 『007』을 좋아해서 그가 실려 있는 잡지는 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서 전부 정리해서 책 한 권을 통째로 무크지처럼 만들었어요. (인터뷰 中)


만화잡지의 캐릭터만을 잘라내어 분류하고 재편집한다, 그것을 거의 본능처럼 해 왔다, 그렇게 토쿠기는 말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중학생일 때 하기오 모토나 타케미야 케이코의 작품과 처음으로 만난 건 반 여자애들이 하기오의 작품만을 잡지에서 오려 정성스럽게 철한 수제 작품집이었다. 하기오의 단행본이 나온 건 그로부터 2, 3년 뒤의 일이다.


나는 지금의 ‘오타쿠’ 와 우리들 초대 세대 ‘오타쿠’가 어떻게 다른지 학생에게 질문 받았을 때, 우리들은 잡지든 단행본이든, 애니메이션이든 만화든 프라모델이든, ‘원하는 것’ 이 우리들의 안에서 명확한데 그것이 아직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한 적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만이 아니라 편집이나 영상 제작 방법이나 코믹마켓 같은 직접 판매 행사나 전용 숍 같은 인프라까지 아우른다. 근래로 따지면 아마 이런 열정은 한때 웹 상업 변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인터넷이 만인에게 열린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기업가’ 와 ‘사용자’ 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무미건조하게 분열된 듯 보일 때도 있다. 가령 인터넷의 ‘정리 사이트まとめサイト’ 역시 일종의 ‘리스트’에 대한 열정의 발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웹 검색기능이나 몇 개의 서비스가 인프라에 탑재되어 있다. 즉 암암리에 ‘유저’일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홈페이지, 블로그, 메일 매거진과 같은 자전 미디어를 갖는 것도 용이해졌지만 커스터마이징된 느낌이 편리하면서도 동시에 위화감이 든다. 나는 그것을 조금 부자유스럽게 인식하는 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쾌적하다고 인식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드왕고dwango가 시작한 메일 매거진 시스템의 이용을 권유받았지만 사업 계획이 전면에 나온 안내 문서에 살짝 질려서 건드리지 않았다.


* * *


오타쿠의 정신사


이 책은 오오츠카가 학자의 기량을 살려 오타쿠 문화와 산업 그리고 소비층이 어떻게 변모해갔는지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풀어낸, 『토쿠마 서점 2층의 주민들』보다 다소 학술적 성격을 띤 책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오타쿠를 정리하기 전에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우선 사회학 용어로서 일본의 세대 분류어인 신인류新人類. 경제학자 쿠리모토 신이치로栗本慎一郎가 맨 처음 사용한 표현으로 1980년대 당시의 청소년, 청년층을 종래와 다른 가치관과 감성, 행동양식 등을 가진 세대라는 뜻으로 이후 학계와 매스컴에서 곧잘 인용되었다. 그리고 전학공투회의(약칭 전공투)와 뉴웨이브. 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학생 운동인 전공투는 기치의 성격상, 또 과격파가 무장 투쟁 노선을 걷는 등 시간의 경과에 따라 공통된 뚜렷한 슬로건보다는 사회 속에서 각자의 지향점을 찾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출판사 만화 잡지를 중심으로 한 청년만화계에 일어난 변화 양상을 뉴웨이브라 칭한다.


오오츠카는 뉴웨이브 말기에 당시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족한 로리콤 대상 만화잡지 『망가 부릿코漫画ブリっ子』의 편집인으로 입사한다. 이 당시 만화잡지들은 전공투 세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집진과 작가진으로 구성되어, 극화체의 삼류 에로 만화 일색으로 도처의 도색잡지의 그라비아 포즈를 대놓고 트레이싱하는 관행도 자행되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집장도 그만두고 유일한 편집자가 된 오오츠카는, 그해 말 폐간이 확정된 망가 부릿코의 기성 극화 작가들을 모두 해지하고 아직 10대에 불과했던 신인들로 새로운 작가진을 구성했다. 얼마 후 망가 부릿코는 외부 기고가의 특집 연재를 게재하는데 그가 앞서 사이토 타마키 장에서 언급한 나카모리 아키오다.


나카모리 아키오는 아사히 저널朝日ジャーナル이 신인류 특집으로 소개한 해당 세대 중 한 명이다. 그가 맡은 특집 연재의 제목은 「오타쿠 연구(『おたく』の研究)」. 작금의 ‘오타쿠 팬덤’을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오타쿠라고 명명한 대목이다. 당시 나카모리가 가리킨 ‘오타쿠’ 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오타쿠 팬덤’ 의 여러 고정관념이 형성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훗날, 그러니까 90년대 중반에 나카모리는 오타쿠 비판론을 전개한다. 요지는 ‘요즘 오타쿠들은 다들 똑같이 철지난 메이커 청바지와 운동화를 입고는 코믹 마켓에 가서 숄더백에 만화나 꽉꽉 채워올 뿐이다’, 한마디로 그저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언급하며 오오츠카는 80년대 당시 신인류 세대와 오타쿠의 차이를 설명한다. 신인류 세대는 이미 기성세대가 오락거리를 포함한 사회 인프라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그들은 수많은 선택지들 중 남과 구별될 만한 걸 선택하여 치장하고 내세우는 ‘기호의 차별화 게임’ 에 휘말렸다는 것이 오오츠카의 주장이다. 이어서 ‘그들은 기호의 차별화에 전전긍긍하느라 자신이 갈고닦은 것을 바깥에 드러내 대중 앞에 내세우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아사히 저널에 소개된 수십 명의 신인류 중 지금 그 분야의 저명인사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극히 적다’ 고 오오츠카는 말한다.


오타쿠의 경우 오오츠카는 ‘동세대의 신인류와 달리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던 것들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고, 인프라의 면에서는 결여된 부분도 많았다. 우린 그걸 우리 손으로 채워나가야 했다. ’기호의 차별화‘ 같은 걸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오오츠카나 나카모리가 보기에 지금의 오타쿠-인프라가 갖춰지고 전방위에서 콘텐츠가 쏟아지고 공급의 빈약함을 자급자족하여 채워야 하나 고민할 일이 없는-들은 신인류 이후 ‘소비자로 전락한 세대’ 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종장에서 오오츠카는 ‘쿠로코의 농구 작가 협박 사건’을 중심으로 소비자로 전락한 오타쿠들에 대한 질책과 연민을 동시에 나타낸다. 마크 슈타인버그는 『Anime’s Media Mix』에서 일본발 서브컬쳐 콘텐츠가 세계 곳곳에서 소비되는 현장의 공통점이 ‘결손가정’ ‘빈민가’ 등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주 소비자’ 임을 지적한다. 오오츠카 역시 프랑스에서 만화창작 수업을 하던 당시 유독 과거에 식민지였던 나라나 민족 출신자가 열의를 보인 점을 든다.


오오츠카는 일찍이 『이야기 소비론』에서 기업 주도의 미디어믹스(OSMU, One Source Multi Use)의 양산이 결국 소비자들을 스스로 이야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굴레에 빠뜨릴 것이라 경고했다. 그리고 ‘쿠로코’ 작가 협박 사건의 용의자의 글을 통해 오오츠카는 “창작자로서 상위 계층에 설 수 없는 대다수의 오타쿠들이 결국 카도카와, 니코니코동화를 위시한 출판기업들의 에코시스템economy system에 착취당할 수밖에 없음을 범인은 간파하고 있다” 고 논한다.


오오츠카의 지론에 따르면 팬픽, 동인지 등의 2차 창작조차도 돌고 돌아 계층 상위의 출판사와 원작자의 배를 불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들 미디어 평론가들이 낙관적으로 ‘한 이야기의 상호 다면화와 시장의 윤활화’ 라 말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그러한 그늘이 있다는 것이다.


2015년 봄에 오오츠카가 한국에서 소규모 강연을 열 때, ‘쿠로코의 농구 작가 협박 사건’을 소재로 당시 거론되던 TPP를 들어 ‘2차 창작자의 수익구조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는 요지의 주장을 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오오츠카에 따르면 범인 와타나베는 ‘객관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으면서 주관적으로 행복한 사람=오타쿠, 객관적으로 착취당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시스템 외부에 그를 부딪치는 사람=넷우익, 객관적으로 착취당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그저 한결같이 자신을 탓하는 사람=노력교 신자 혹은 잠재적 자살지망자’ 로 분류한다.


과연 오오츠카의 우려대로 오타쿠들은 이야기를 소비할 뿐인 사회의 비주류로 머물게 될까. 그러다가 익명의 공간에서 난봉꾼이 되고, 혹은 자신을 깎아내리기만 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데 불과하게 될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계속 지켜보며 고민할 일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


‘오타쿠’를 관찰하는 ‘오타쿠’ 철학자


내가 아즈마 히로키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앞서 사이토 타마키 문단에서 언급한 계간지 「파우스트」에서였다. 몇 회인가에 걸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의 단편 연재본을 읽던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포스트모던이니 시뮬라크르니 생경한 개념들을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어느새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2권까지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아즈마의 철학서 몇 권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제는 일본 철학계의 어엿한 선두주자들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아즈마지만 삼십 대에 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대중서뿐 아니라 학술서로서도 여전히 그를 대표하는 책이다.


오오츠카의 「이야기 소비론」에 이어 아즈마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주창한다. 둘 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담이지만 앞서 이야기한 사이토 타마키의 지론이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같은 시기에 ‘오타쿠’를 논한 세 사람에게 영감을 준 학자들이 구조주의 이후 데리다, 들뢰즈와 같은 해체주의 세대라는 것이 재미있다.


‘이야기를 소비하는 오타쿠’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오타쿠’ 로


<...시스템(=커다란 이야기) 자체를 팔 수는 없으므로 그 한 단면인 한 회분의 드라마나 한 단편으로서의 ’물건‘을 겉보기로 소비하게 한다. 이와 같은 사태를 나는 ’이야기 소비‘ 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중략) 소비자가 ’작은 이야기‘의 소비를 계속한 끝에 ’커다란 이야기‘ 즉 프로그램 전체를 손에 넣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작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소비‘ 의 위상에서는 이와 같은 개별 상품의 ’진짜‘ ’가짜‘의 구별이 불가능한 케이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오오츠카 에이지, 「이야기 소비론」中)


오오츠카의 이런 논지를 보강하여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인터넷을 위시한 포스트모던의 도래에 따라 트리형 모델(근대의 투사 모델)이 무너지고 데이터베이스 모델이 새로이 확립된다. 인터넷에는 커다란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지만 또한 그것은 표층적 기호만으로 성립하는 세계도 아니다. 2차 창작, 미디어믹스 등의 시뮬라크르의 표층이 있는 한편 그를 구성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심층이 명백히 존재한다. 


'시뮬라크르의 전면화' 와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은 트리 모델의 앞면과 뒷면이라는 것이 벤야민과 보드리야르의 논의이다. 이에 대해 아즈마가 주창한 '데이터베이스 모델의 대체' 는 종래의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를 함께 이야기하는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 와 대조적으로,   양자의 2층구조를 역설하며 오타쿠들은 그를 구별하며 우열을 두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작품의 핵은 설정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다. 따라서 오타쿠들의 감각으로는 2차창작이 아무리 작품으로서의 원작(시뮬라크르의 수준)을 침해했다고 해도 정보로서의 원작(데이터베이스의 수준)의 오리지널리티는 지켜지고 있으며 또 존중되고 있기도 하다. 거꾸로 2차창작 작가들 쪽에서는 시뮬라크르가 늘어날수록 원작의 가치는 점점 높아진다는 쪽으로 생각할 것이다."


‘커다란 이야기’가 필요하던 오타쿠에서 필요하지 않은 오타쿠로


“...50년대까지의 세계에서는 근대의 문화적 논리가 유력했으며 세계는 트리형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커다란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교육되며 또 욕망되고 있었다. 그 표출의 한 예가 학생들의 좌익주의로 기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60년대에 크게 변해, 70년대 이후로는 반대로 포스트모던의 문화적 논리가 급속하게 힘을 키운다. 거기에서는 이미 커다란 이야기는 생산도 되지 않고 욕망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변동은 그 시기에 성장한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가 데이터베이스적인 모델로 움직이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기관이나 저작물을 통해 낡은 트리형 모델(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이식받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모순은 특정한 세대로 하여금 잃어버린 커다란 이야기의 날조를 향해 강하게 구동되게 한다.(중략)당시의 제1세대 오타쿠들에게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관한 지식이나 동인활동은 전공투 세대의 사상이나 좌익운동과 매우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즈마는 70년대에 대두한 1세대 오타쿠와 후발 주자들의 차이로 ‘커다란 이야기’ 의 수요를 든다. 1세대 오타쿠들의 리얼타임 원탑 작품이라 하면 단연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건담 시리즈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며 감독은 달라지지만 총감독 토미노의 감수 아래 일정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다. 건담 팬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주세기Cosmic Era로 대표되는 세계관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요소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90년대에 청소년이었던 사람들의 대표작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세계관이 아니라 캐릭터의 전투복의 외양이나 성적 코드 등이다. 그들에게는 몇 년 몇월 몇일에 신지와 아스카가 만났는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극장판들을 보아도 세계관을 기조로 한 새로운 이야기나 숨겨진 이야기보다는 TV판 애니메이션의 사건들을 다른 인물의 입장이나 관점에서 본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변화는 또한 소비자나 2차창작자 쪽에서만이 아니라 원작자 쪽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건담>은 1979년에 방영된 최초의 TV 시리즈 이후 계속해서 속편이 만들어진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총감독인 도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의 감수 아래 하나의 가공의 역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이에 비해 <에반겔리온>은 속편이 제작되지 않았으며 또 제작될 예정도 없다. 대신에 원작자인 제작사 가이낙스Gainax가 전개하고 있는 것은 이 장의 서두에서도 말한 것처럼 코미케에서 팔리는 2차창작에 가까운 발상의 관련 기획, 예를 들면 등장인물을 이용한 마작 게임이나 에로틱한 도안의 전화카드, 나아가서는 여주인공인 아예나미 레이를 대상으로 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두 경우 원작에 대한 생각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중략) 이러한 특징은 모두 <에반겔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원래부터 특권적인 오리지널이 아니라 오히려 2차창작과 함께 놓이는 시뮬라크르로서 제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작품에서 가이낙스가 제공한 것은 TV 시리즈를 입구로 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가 아니라 오히려 시청자 누구나 마음대로 감정이입하고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 없는 정보의 집합체였던 셈이다."


스노비즘 오타쿠들이 만들어낸 의사疑似적인 일본


독일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우선 자기의식을 갖는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자기의식을 갖는 ‘타자’와의 투쟁에 의해 절대지絶對知나 자유나 시민사회를 향해 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투쟁의 과정이 곧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역사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근대사회가 탄생할 때 종언을 맞는다고 선언한다.


‘헤겔 독해 입문’을 출판한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미국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동물로의 회귀’ 와 일본적인 스노비즘. 동물은 자연(미국적 생활양식)과 투쟁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산다. 인간이 다리나 터널을 건설하는 것은 새가 새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편 ‘스노비즘’ 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으며,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 대립을 만들어내어 즐기고 애호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주장을 제련하여 ‘냉소주의’ 로 다듬는데, 그는 이 허위의식이 20세기에 전세계를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전쟁의 폐허 위에 미국적 생활양식이 들어서기 시작한 일본에서는 가까운 시대의 자국의 경제, 문화적 중흥기를 재고하는 ‘스노비즘’적인 욕망이 있었는데, 이는 교토 학파를 중심으로 한 ‘근대의 초극’ 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1세대부터 지금까지의 오타쿠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지론에는 공통적으로 국가적인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아즈마는 주장한다.


“오타쿠계 문화의 근저에는 패전으로 인해 ‘좋았던 시절’의 일본이 망한 이후에 미국산 재료로 다시 의사疑似적인 일본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복잡한 욕망이 숨어 있는 셈이다”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오타쿠


아즈마는 책의 초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실조되고 '신'이나 '사회' 도 쓰레기junk 같은 서브컬처에서 날조될 수밖에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근대에서는 신이나 사회가 인간성을 보증하며 구체적으로는 종교나 교육기관이 그 실현을 맡고 있었다면, 그 양자의 우위가 실추된 후에 인간의 인간성을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의미와 동물성으로의 환원, 인간성의 무의미화, 그리고 시뮬라크르 수준에서의 동물성과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인간성의 해리적 공존. 아즈마는 이를 집약하여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이라 칭한다. 이를 풀어 말하면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시뮬라크르 수준에서의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욕망'. 전자에서는 동물화하지만 후자에서는 의사疑似적이며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 '의미' 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어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는 인간.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은 채 표류하는 세계의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며


이들이 오타쿠를 보는 시선, 그 이전에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굳이 대자면 ‘모더니즘의 완고한 트리’를 지향하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겠다. 어디까지나 이들의 글로서 미루어보는 감상이지만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근원적인 회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들의 글이나 이 졸문이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혹 정말로 그런 감상을 받았다면 유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 바람직함과 부적절함, 19세기 이전에 구축된 모더니즘의 잣대를 갖고 이러한 현상을 무리하게 재단하기보단 열린 마음으로 담담하게 앞으로의 양상을 지켜보려 한다.




참고 문헌


斎藤 環 『戦闘美少女の精神分析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ちくま文庫, 2006)


斎藤 環『思春期ポストモダン―成熟はいかにして可能か사춘기 포스트모던 - 성숙은 어떻게 가능한가』(幻冬舎新書, 2007)


斎藤 環『キャラクター精神分析~マンガ、日本、日本人~캐릭터 정신분석 ~만화, 일본, 일본인~』(ちくま文庫,2014)


大塚英治, 선정우「순문학의 죽음 ~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북바이북, 2015)


大塚英治『二階の住人とその時代 転形期のサブカルチャー私史 2층의 주민과 그 시대 전형기의 서브컬쳐 사사』(星海社新書, 2016)


大塚英治『「おたく」の精神史 一九八〇年代論오타쿠의 정신사 1980년대론』 (星海社新書, 2016)


東浩紀 『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 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사회』 (講談社現代新書, 2001)


東浩紀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 (講談社現代新書, 2007)


파우스트 Vol.1 2006년 봄호 (학산문화사, 2006)


파우스트 Vol.2 2006년 여름호 (학산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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