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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n 17. 2019

괴테에 나타나는 자기본위의 단서

조지 산타야나 <독일 철학의 자기본위> 번역 - 1

모든 초월주의자들은 자기 자신밖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자기본위에 빠져있진 않다. 몇몇은 그들이 만든 지식의 한계를 슬픈 결함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겸손하며, 인간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모든 현실로부터 절망적으로 단절시키고 마는 사념을 소유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다른 한편 초월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천성이 자기본위인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관심이 초월주의에 없거나, 모든 사색을 불신하거나, 현실의 송사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각과 지성이 행동을 조정하고 사념에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본능적으로 자기본위적인 사람들은 의지와 사변으로 세계를 구축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계의 다른 요소들보다도 자신의 공상적인 이야깃거리와 자신의 선호 대상에 더욱 관심이 많다. 그들이 대상에 관심을 쏟는 모습은 마치 그들이 진정 흥미로운 쪽의 빛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주로 관심하는 것은 첫째로 그들 자신의 경험이고, 둘째로 오늘 생각하는 내용이고, 내일 아마 생각할 내용이고, 그가 가진 친구가 어떻게 그 매력을 잃었느냐의 상세이고, 그가 믿는 종교가 무엇인지 등 대체적으로 우주가 그에게 그리고 그가 우주에게 기여한 상세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만 관심사를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극적인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적절한 개성을 모든 타인에게 부여할 수도 있다. 그가 들었거나 고안한 모든 상황은 그의 분신에서 비롯된 짜릿한 열정과 날카로운 착상들을 마음에 품게끔 그를 재촉한다. 그 분신의 정체는 풍부하게 표현된 그의 선천적 기질의 잠재된 이면이다. 그리고 개인에 관계없는 일반적인 사항들도 그를 매혹시킬 것이다. 자신의 천재성이 충만하게 각성함을 느끼게 해주기만 하면 말이다. 그러면 이제 그는 자신의 은사를 멀리 흩뿌릴 준비가 된 것이다. (시기어림과 배타성을 드러내는) 특정한 진실이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범우주적 연민의 실천을 통해서 말이다.


괴테에게서는 이러한 경향의 일부가 보이는 듯 하다. 비록 철학적 자기본위에 대해서는 그는 접촉도 경미했고, 그의 현명한 격언들 중 몇몇은 그와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낭만주의, 만물에 대한 향상심, 개인의 삶, 모호한 종교관, 「파우스트」나 「빌헬름 마이스터」 등 그의 주요 저작 몇몇에는 독일 철학의 정신이 만연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친근한 소재를 가지고 우리의 ‘진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은 못 해주는 독일 철학 말이다.


괴테에게는 자기본위의 단서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괴테(의 작품관)에는 만물에 대한 단서가 있다. 그런 만큼 그가 초월주의자가 아닐 뿐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당당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증거들을 모으기도 쉽다. 한 예를 들자면, 그는 다방면에 걸쳐 재능이 출중했다(단순히 박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몸을 움직여 직접 대상의 다양한 면을 오감으로 받아들였다(억지로 얽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파우스트에서 그랬듯) 자신의 경험의 단락들을 짐짓 발전하고 있는 듯 보이려 나열하지 않았다. 비록 「파우스트」의 해설자로서 그저 ‘선’을 향한 진전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헤겔은 아마 이 모든 윤리적 태도들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비꼴 심산으로 파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혹평하고 분쇄하고 ‘옛 시대의 작품’ 이라 규정했을 뿐이다. 도중에 집필을 중단한 작품들을 빼면 말이다. 괴테는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아꼈다. 그것들을 비약하길 싫어했고, 본의 아니게 그랬다면 최소한 자신이 잃어버렸던 감상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지속적인 사랑으로 노년에도 온후함과 활력을 유지하였다. 인내심을 유지하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자 크리스천이나 이교도나 에피쿠로스설 신봉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상상의 문제에서 기독교 신앙, 이단의 사상, 육욕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관해 그 자신을 솔직하게 내어놓았다. 이는 선험적 자기본위주의자들이 절대 소화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자만심을 곧잘 공격하던 담론이었다. 


그럼에도 괴테의 연민은 단지 공상적이거나 미학적인 것이었으며, 그 자신의 사변이나 운명과 연관된 정체성보다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온 소재들 간의 흥미로운 다변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독교적 정신은 특정한 군상을 구상하기 위한 필연적인 배경이었다. 가령 그레첸이 그러한데, 그에게서 크리스천의 언어를 제하고 나면 세속성이 보란 듯이 드러난다. 이교 정신은 학습된 가면으로 스스로 깨닫고 벗어날 수 있는 대상이며, 육욕은 자유로운 영혼이 마땅한 때에 마땅히 탐닉할 감정적, 과학적 인가認可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괴테가 느낀 감정은 곧 전지전능한 관찰자의, 여행자의, 감정가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심히 자기본위적인 연민이었다.


예를 들어 괴테에게는 자신의 고전 양식보다 로맨틱한 것은 없었다. 이피게니아, 헬레나, 그 외 고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낯설 정도의 비애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과장된 달콤함, 열성적인 온건함, 몽유병적인 도덕은 너무 의도성이 다분했고 괴테 자신도 자각하는 바였다. 파우스트에서 헬렌이 사라진 후 그는 주인공이 고향의 산을 다시 방문해 그레첸에 대한 상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는 현명한 귀향인데, 헬렌이 상징하는 ‘고전주의에 대한 광적인 추종’ 은 현실의 삶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 단지 가망 없는 모방과 감상의 흉내로 이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오히려 발푸르기스의 밤에도 그레첸의 정원이 더욱 ‘고전’ 적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고전’으로 상정한다면 결국 괴테조차도 '진정한 고전’에 얽매인 셈이다. 진정한 고전이라면 누구에게도 낯선 게 아닐 테니 말이다. 전통과 예술은 우리 삶이나 자연과 이질적이지 않지만, 시간과 장소가 부여하는 인습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깊이와 적나라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전의 특색을 재생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천연적인 후손이 아니며 본능적으로 그 양식을 답습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방할 수 있는 건 아직 자신에게 스며들지 않은 대상뿐이다. 오직 ‘낯설게 느껴진’ 대상들만을 재구축하여 고고학적인 가면무도회로 전환시킨다. 종교나 예술의 순수한 상속자들은 그를 부활시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 고전에 내재된 우유성偶有性들에 흥미를 갖지도 않는다. 그들은 영구적인 본질을 태어날 때부터 소유하고 있다.

선조 문제에 관해 독일인들은 그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다. 괴테처럼 연민하든, 부르크하르트처럼 조롱하든, 헤겔처럼 둘 다이든, 그들은 고전을 자신들의 토착적인 배경, 상투성, 기록, 무엇보다도 ‘현재’ 와 대조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고전에서 비롯한 전통이 여전히 유효하고 권위를 지녔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ー특히 독일인들ー은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가령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이며, 경험과 이성의 순수한 표현이고,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타당하다고 한들 그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파생된 학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지혜를 감정의 한 단계로, 비대해진 경과로서 수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찬란한 과거의 상’을 현학적으로 재구축하는 용도로는 여전히 유효하도록 둔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고전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 이자 ‘문화사Kulturgeschichte’ 의 정체이다. 영구적인 원천에서 젊고 완성에 이르기 전의 생명들로부터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생명들로부터 빌린 생명력이다. 사실 고전 연구란 그것이 도덕적 측면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고 학문과 삶에서 기준을 제공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사소한 세부 사항들에서 단지 ‘죽은 과거’를 회복하는 데 연연하기 시작할 때부터, 과거의 시공간적 거리감, 아름다움, 그리고 폐허를 대중이 그저 감상적으로 대하도록 유도할 때부터 그들은 무익해지고 학자연하게 되었다. 


괴테의 손이 낭만주의의 동앗줄에 닿았을 때 그는 그 이상 얼마나 더 자유롭고 확신에 찰 수 있었을까. 얼마나 그는 낭만주의 자기본위주의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았을까. 이 낭만주의 자기본위주의자는 그의 관심과 연민의 범위에 특정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세계 전체를 수용한다. 그는 바이런이 아니다. 그처럼 세계가 자기 입에 써서 실쭉거리고 개구쟁이처럼 구는, 상처입고 실의에 빠진 생물이 아니다. 그는 선과 악 어느 쪽이든 공평하게 들여다보고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바이런이나 뮈세의 개인적인 자기본위는 ‘겸허’ 라는 귀결을 향했다. 그들은 자신이 우주 안에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머슨과 마찬가지로, 괴테의 절대적 자기본위는 모든 자연을 소환하여 자신에게 사역하도록 하였다. 모든 자연은 이러한 인간의 창조성의 결단에 순응하지는 않을지언정 적어도 사랑하는 피조물에 대응하는 매력적인 영웅주의의 수단으로 끌어들여져야 했다. 자신만의 온화한 범신론의 눈으로 괴테는 그 자신을 위한, 삼라만상이 떼를 지은 우주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는 삼라만상을 강제로 탄압할 생각이 없었다. 으레 특정 분파의 사람들과 국수주의자들이 특정 무리나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 그 풍요롭고도 공명정대한 우주는 각 생명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구속 없이 서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하였다. 개개의 피조물들은 서로를 탓할 일 없이 양육되며, 역량에 따라 세계의 중심이자 축이 될 터이다. ‘자기 자신’ 만이 스스로를 충분히 폭넓고도 안정되게 계발하여 통찰력, 침착함, 신과 같은 무책임함을 겸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계발만이 유일한 과업이었다.

괴테는 이러한 원칙들을 실제로ー이론보다도 더 적나라하게ー드러냈다. 그의 가족, 친구, 그리고 자신의 감정들은 그의 도덕 이력을 보조하는 수많은 디딤돌이었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관록을 확장해나간 것이다. 그의 연애사 역시 그 자신의 더욱 충실한 실제의 수단이었다. 그의 연애사가 방종했다거나 근간을 이루는 무신앙의 정체가 무정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수시로 그를 깊이 각성시키고, 마음 속 시상을 개방하여 도약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둘러싼 환경의 정확한 기능이었다. 모든 온화한 정열은 그에게 자신의 굳건한 지성이 이끈 최고의 여정으로서 눈앞에 열려 있었다. ‘길을 걷다 피치 못하게 꽃무리를 밟는다면 그보다 더 큰 슬픔도 없다.’ 이런 게 괴테의 심상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러한 순수한 슬픔과 불가피한 죄책감은 시인의 경험에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소중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가 차례차례로 교제하던 모든 애처로운 연인들은 그에게는 일종의 벨기에 사람과 같았다.(*1 참조)  그는 한탄하면서도 모두를 똑같이 거칠게 다루었고, 순결한 그들의 고통을 두고 마음에서부터 피를 흘렸으며, 독일 총리처럼 사후事後에 “그녀가 마땅한 격을 갖추지 못했다” 며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를 유혹하는 운명대로 강행해야만 했다. 그의 정신은 성장과 더불어 그녀를 희생시키고 또 그의 상처 입은 감정을 희생시키길 요구했다. 자신의 영속성의 제물로써 말이다. 더욱이 그가 생각하기를 이 소명은 진정 위대하여 우주 만물도 마땅히 스스로를 희생하여 그의 편에 서서 불멸의 삶을 부여해야 했다. 그 고귀한 자기 확장이 영구히 진행되도록 말이다.

낭만적 자기본위를 향한 괴테의 완벽한 통찰은 파우스트에도 나타난다. 특히 기묘할 정도로 예언자적인 마지막 부분에서 말이다. 만약 그 서사시의 주인공이 ‘부드러움’, ‘즉흥적’, ‘감정적’ 이면서도 ‘옹고집’, ‘불굴’ 과 같은 모순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 그런 조건은 순전히 그를 절대 의지 - 정력적이고 끝없이 활력적인 직분을 수행하는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절대 의지의 이야기다 - 를 위한 적합한 수단으로 변모시킨다. 파우스트는 처음에는 열정적이고 탐구심으로 가득 찬 학자였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참을성 없는 성격 탓에 마법을 연구하겠다고 과학을 포기했다. 그를 공격하는 가짜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개인적이고 편견 없는 과학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지적 충족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자신이 티 없이 진리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여전히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의지는 한 가지 관심에 제한될 수 없었다. 하물며 신뢰할 수 없는 형식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더더욱 구속될 수 없었다. 굳이 ‘발견해야 하는’ 진리를 인식했다면 그러한 의지는 절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자신이 만든 진리만을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데 따르면 그러한 진전의 방식은 우선 특정한 전제들을 폐기하는 데에 있는데, 가령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든지, ‘인간 세상과 그 진보는 지속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전제들을 충족시키면 무엇이든 진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명백히 이러한 전제들이 거의 전적으로 틀린 이상, 절대 의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닌 오직 신념일 뿐이다. 이에 대한 기꺼운 실례實例가 파우스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잠시 루터를 본따 사도 요한 – 그가 가장 호감을 느낀 사도이다 – 의 첫 번째 서신서의 번역에 착수했을 때였다. (상술한 대로면)주안점은 따분하게 복음서 저자들의 의미를 밝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어떤 의미여야만 하고’ ‘어떤 의미임이 바람직한지’ 가 주안점이었다. ‘말씀’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뜻’은 그보다 어딘가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태초에는 ‘힘’이 그보다 더욱 장려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절대 의지의 요구가 그에게 번득였고, 그는 만족스럽게 다음과 같이 썼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Auf einmal sie’ ich Rat

Und schreibe getrost: Im Anfang war die That!

나는 문득 (영의 도움으로)좋은 생각이 떠올라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쓴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느니라!”


이런 흥미진진한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사유하는 생활은 그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는 그의 과학에 대한 지식도 자신의 마술과 마찬가지로 생애에 걸쳐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로운 나머지 그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미적 감각도 성찰하는 습관도 잃지 않을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업적은 곧 그가 축적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진정 커다란 진전이었다. 그러나 삶의 관심이란 언제나 무언가 새로운 것이다. 그는 다방면에 걸친 모험 – 사랑도 마찬가지다 - 으로 향한다. 여정에서 그는 제국 정치를 겪었고, 비현실적이기보단 감정적인 고전주의로 인한 슬픈 혼란을 겪었고, 결국에는 전쟁을 하고, 공공사업을 하고, 교역을 하고, 해적을 하고, 식민지를 세우고, 교회의 종소리에 저항하며 새로운 문화Kultur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루한 옛 원주민에게서 얻은 땅을 정리했다. 이러한 공적인 송사들에서 그가 더욱 만족할 수 있던 건, 단지 그가 그 한가운데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괴테의 낭만적 자기본위의 단서들이 단순히 그의 유년기와 그 주변의 철학들의 반향일까? 피히테의 체계를 거부했듯 추상적이고 교리적인 형태로 직면했다면 거부했을 반향이었을까? 그라면 쇼펜하우어를 좀 더 온화하게 판단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니체를, 그 거친 원칙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분명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니체의 윤리학을 두고 그들이 배타적으로 강조한 절대 의지에 대한 신념을 지지하고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옹호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똑같은 신념이 그의 천재성의 깊은 저변의 요소로 내재되어 있었다. 독일인과 독일 철학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갖고 있지 않기가 어려운 비범한 지성의 요소로 말이다. 


George Santayana, <Egotism in German Philosophy> 中




*1.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괴테의 작품 『에흐몬트』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에흐몬트』는 『괴츠 폰 베를리힝엔』과 나란히 괴테의 대표적인 역사극이다. 실존 인물 에흐몬트는 네덜란드 민족 수난사에서 희생된 비운의 주인공으로, 네덜란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장성하며 외교적으로 여러 공을 세워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의 카를 5세에 의해 기사단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정권을 이양받는데, 유화 정책을 기조로 하던 아버지와 달리 종교재판을 이용한 강경 진압을 하던 펠리페 2세에게 에흐몬트는 '상전의 아들은 곧 상전' 식으로 충성했다. 연이은 저항이 일어나자 펠리페 2세가 소요의 가능성을 근절하려는 일념으로 충복 알바 공작에게 역모 혐의가 있는 귀족들을 사형 판결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하자, 네덜란드인들의 존경을 받던 오라닌 공작은 밀정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에흐몬트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에게 도피를 권유하나, 펠리페 2세의 신임을 믿고 버티던 에흐몬트는 체포되고, 이듬해 참수당한다. 그러나 이는 예상과 달리 네덜란드인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 결성,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 30년전쟁이 끝난 1648년에 네덜란드 합중국으로서 독립국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단 가톨릭을 고수하던 남부 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는 계속 스페인의 속국으로 남아 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 1714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되며, 괴테가 『에흐몬트』를 탈고하던 1787년 시점까지도 여전히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쉴러는 『에흐몬트』에서 괴테가 임의로 사실을 바꾼 데 대해 비평한다. 괴테는 역사적 인물 에흐몬트의 가족관계를 탈바꿈했는데, 실제로는 열한명의 자녀를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던 에흐몬트를 괴테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의 청년으로 등장시킨다.  쉴러가 지적했듯 작중 에흐몬트의 연인인 빈한한 평민 집안의 처녀 클레르헨(Klärchen)은 신분제 사회인 16세기의 네덜란드나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평민과 귀족의 사랑' 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괴테 역시 평생의 반려자였던 불피우스Vulpius가 모자 제조공 출신의 하층민 여성이고, 바이마르 궁정에서 용납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기에 57세가 될 때까지 혼례식도 올릴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상기하면 『에흐몬트』에서 에흐몬트와 클레르헨의 관계는 괴테 자신의 기구한 개인사와 직결되어 있으며 당대적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임홍배, <괴테가 탐사한 근대:슈투름 운트 드랑에서 세계문학론까지>, '자유의 찬가 에흐몬트' 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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