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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n 26. 2020

『공부 중독』에 빠진 한국 사회

'매뉴얼 사회' 그리고 '오버 퀄리피케이션'

『공부 중독』엄기호, 하지현 著


들어가며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발표와 관련하여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건 수많은 고시생들의 노력을 배반하는 역차별이다'라며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책상머리 공부만이 노력인가'라며 이를 반박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얼마 전 모 프로에서 인터넷 강사 최진기 씨가 "20대는 (최순실 게이트의 정유라, 조국 게이트의 조민을 겪으면서)정의와 공정을 중시하는 우파 지향의 세대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 있다. 이 책은 저 말을 듣자마자 떠올라서 다시 책장에서 끄집어내게 된 것이다. 확실히 장기간의 경기 침체에 따른 취업 불황 가운데 건국 이래 가장 선정적인 스캔들을 실시간으로 본 지금의 청년 세대가 (그들의 지지 정당과는 상관없이)우파지향적 가치관을 갖는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정의'와 '공정'에 대해 작정하고 물음표를 띄워 본 일은 드물었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의 순진한 믿음과 달리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고 정치적이다. 모든 낱말은 뇌의 프레임 회로를 통해 정의된다. 이러한 회로는 도덕적 가치의 특성을 규정하고, 도덕적 가치의 측면에서만 유의미한 특정 쟁점의 본성을 정의한다. (...) 자유, 정의, 공정성, 평등, 단결 등 위대한 추상적 개념 역시 그 자체로는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정말이지 그러한 개념은 각각 '논쟁적인 개념'이다."(『이기는 프레임』조지 레이코프 著, 나익주 譯)


나는 이 글에서 적극적으로 한쪽 진영의 손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내가 관심있는 건 그 저변의 '한국에서의 공부라는 노력에 대한 대우와 성과 판단에 대한 인식의 재고', 바꿔 말하면 '시험 공화국의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인식의 재고'이며, 그에 대한 두 저자의 통찰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간단하게 '매뉴얼 사회'와 '오버 퀄리피케이션'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려 두도록 한다.


① 매뉴얼 사회 : 매사에 '최적화된 루트' 를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만들어 자승자박하는 사회

② 오버 퀄리피케이션 : 공정성에 집착한 나머지 검증된 자격에 목매다는 현상


1. 매뉴얼 사회



매뉴얼 사회는 소수정예 집단, 이른바 '엘리트 지향 집단'일수록 잘 나타난다.


<엄기호 : 특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토론식 수업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견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그 속에서 자기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누구나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답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아니, 당신은 교수니까 알고 있잖아, 정답을 얘기해주면 되지 왜 자꾸 귀찮게 우리더러 토론하라고 하면서 민망하게 만드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죠(...) 저는 이걸 '매끄럽게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이야기해요. / 하지현 : 매끄럽게 공부한다고 말씀하시니 생각하는데, 하다못해 요즘 교재는 형광펜까지 다 칠해져서 나오더라고요. 내가 칠하지 않아도 되게.>

<엄기호 : 굉장히 매끈하게 요약정리해서 정답을 향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돌진하는 형태가 모든 공부의 전형이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야지만 안심을 하고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의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거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들 속에 섞이지 못해 너무나 괴로워하는 거예요.>


IMF 이후 두드러진 사회 변화 중 하나로 공무원, 공공기관 등 '안정적인 철밥통 직군'의 선호의 상승이 있다. 한편에서는 단계론적인 성장이 점점 더 불가능해졌고, 다른 한편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도약을 도박으로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적어도 철밥통은 호봉에 따른 승진이 보장되어 있고, 잘릴 일이 어지간해선 없으니 저 두 가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높은 순도를 원할수록 즉 균질성을 추구할수록 급격한 환경 변화에 의해 멸종이 일어나게 된다.  '매뉴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걸 '사회성' '공동체 정신' 등의 어휘로 정당화하는 사회의 미래는 마냥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현 : (...)특히 정신과가 각광받으면서 최근 7, 8년 동안 똑똑한 친구들이 정신과에 많이 지원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정신과 의사가 잘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 똑똑하고, 공손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영어도 제2외국어도 너무 잘하고… 그런데 정신과의사가 가져야 할 파이팅이 없어요. 아울러 자기가 살아온 세계가 너무 좁으니까 연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고, 마치 요즘 교사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을 이해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물론 학문의 종류에 따라 기존의 패러다임을 충실하게 답습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의학이나 법학 등이 학부 과정에서 기성 지식의 암기와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문, 아니 그를 넘어 인간사의 신변잡기란 늘 새롭게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우린 그에 대해 지나치게 일차방정식처럼 한 가지 해만 있다고 접근하고 있으며, 그런 인간군상을 강요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떠오른 것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다음 문단이었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主題)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면 오히려 당황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한 형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핀으로 고정(혹은 펜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관념은 두려운 것이다―성장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지배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著, 최혁순 譯) 中 


2. 오버 퀄리피케이션



<엄기호 : 제가 지방 의대에서 강의를 한 적 있거든요. 이들을 보니 격리된 학생들이에요. 왜냐하면 엄청난 엘리트들이고 자기들도 엘리트 의식이 강해서 자신은 이 대학의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엄청 강해요. 한 해에 백 명을 뽑는데 그 백 명이서 6년을 쭉 함께 가요.(...) 저는 그때 '이 안에서 안 미치면 멘탈이 정말 튼튼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 하지현 : (...)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선민의식을 만들어가요. 그러니 보상심도 되게 강하고. 그런데 이런 친구들이 일부 나중에 이상한 행동을 해요. 결혼할 때 아파트 사와라, 뭐 그런 거죠. 스스로는 적절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똑같은 게, 요즘 젊은이들은 "왜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을 쉽게 줘요?" 그래요. (...) 이 친구들에게는 이게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 엄기호 :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공정한 거예요.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서울대 왔는데, 정규직이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화해달라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요구를 하느냐, 생각하죠. 이들의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매뉴얼 사회에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 바로 이 보상 심리이다. '난 여러 자원을 희생해 결과를 이뤘으니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나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나왔듯 드라마 미생에서 이상현이란 캐릭터가 고졸 입사한 장그래를 보고 '내가 여기 들어오기 위해 부모님이 사교육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이건 역차별이다'라 비난하는 장면도 그 발로이다. 또한 박 과장이 '단신으로 억대 계약 따냈는데 돌아오는 건 칭찬 몇 마디와 법카 회식이 전부'인 현실에 '재미없네?' 라 생각하며, 점점 거래처에서 받게 되는 뒷돈에 무감각해지고 당연히 여기게 되는 것을 오 차장 말마따나 '보상받는 거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좋은 예시이다.


혹자는 '경쟁 사회에서 사회가 평가하는 기준을 충족한 만큼의 대우와 보상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지, 무슨 공산주의 사회를 원하냐?' 고 비약할 수 있는데, 이는 생동적이고 유기적이며, 따라서 우연성이 작용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공정함이란 불변의 가치도 아니거니와, 칼로 자른 듯 규격화된 양상도 아니므로, 오히려 그러한 공정함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성격과는 먼 것이다. 일단 마저 본문을 보자.


<하지현 : 따라서 이 친구들은 공정한 시험에 의해서만 평가받기를 원해요. 그런데 그 공정함이라는 게 굉장히 편협해요. 그 시험이 정성평가가 아닌 정량평가이고, 컷오프로 잘라버리는 객관적인 시험일 때에만 인정할 수 있다는 거죠. (...) 이를테면 그 답은 작년에 나온 모범답안이에요. 그때는 기발했어요. 그런데 그 답을 벌써 세 명째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답안이 샜다는 얘기죠. 그럼 너는 네 생각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알려진 걸 말하는 애야, 난 싫어, 그래서 떨어뜨릴 수 있죠. 그런데 이 친구는 그런 것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칼로레아와 논술시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칼로레아는 어떻게 보면 답이 없어요. 구술하는 논리 전개를 보는 거잖아요? 철학적 담론이나 재미있는 주제를 던져주죠. 그런데 우리나라 수리 논술시험은 독특해요. 수학 문제, 통계, 확률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하는 방법과 그것이 왜 그런지를 써라. 이래야 논란의 여지가 없이 채점이 가능한 거예요.>


물론 시험에서 공정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연 공정함의 방점을 어디에 찍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흔히들 '얄짤없이 무거운 엉덩이로 집요하게 한정된 자료를 파고들던' 학력고사 시절, 고졸 사시패스에 훗날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간 노무현을 내세우며 '사법고시 시절'을 공정하다고 한다.


근데 애당초 당시 학력고사는 상위 20개 대학 입학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 였다. 학력고사에 떨어진, 혹은 학력고사를 보지도 못했던 대다수의 수험생에게 누가 관심을 주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노무현이 사법고시 합격한 걸 대서특필할 때, 떨어진 수천 명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몇 년을 고시 낭인으로 보냈는지, 그 동안 가정 형편은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관심을 가진 적 있던가. 쉽게 말해 이 사회가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험의 공정함은 '최상위권summa cumme laude' 을 위한 공정함이고, 그 아래엔 관심이 없다.


자, 그래서 소위 '고시 낭인'의 원흉 사법고시가 배알이 꼴려서 로스쿨을 만들었다. 그러자 어느 학교 로스쿨인지, 학부는 어딘지, 아버지가 어디 판사라 인사에서 유리하게 작용됐다든지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어, 이거 음서제잖아, 공정하지 않잖아?' 결국 여기서도 정량평가에 집착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마치며


여기서 다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프롬의 이 책은 '소유 양식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정의하는 스노비즘에 대한 경고' 가 내내 이어진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학교는 통상 학생들을 인간정신의 최고의 위업에 접하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히 이러한 환상을 기르는 데 솜씨가 뛰어나다.(...)>『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著, 최혁순 譯) 中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한정된 사태에 대한 한정된 의견을 피력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이 글을 읽게 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에 대한 터미널로 작용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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