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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10. 2020

코미디와 위트, 아서 플렉과 머레이 프랭클린

프로이트 이론을 중심으로 양자를 비교해보다


<농담이 자신의 잘못된 논리를 감추고 그 위에 그럴듯한 논리의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면(...) 농담은 비난의 화살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농담이 잘못된 논리 위에 아무런 위장 없이 나타난다면 절대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중략) 무의식에서 만들어진 사고를 순수한 형태 그대로 접하면서 그것을 각성 상태의 사고와 비교할 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에너지 소모의 차이가 발생하는데, 농담을 듣는 이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처럼 터무니없이 잘못된 논리를 버젓이 내놓을 때 농담은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 프로이트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영화 조커(2019)에 대한 열기도 식어가는 시국이지만 변방의 브런치를 찾은 방문객들에게 다소 대중적인 소재로 다가갈 필요성을 최근 재고하게 되어 한켠에 묻어둔 글을 다듬어보았다.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란다.





(1) 코미디와 위트


영화 조커에 나오는 아서 플렉과 머레이 프렝클린은 둘 다 코미디언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여러가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블로그 등지에서 나온 영화평이 대부분 '다 가져놓고 고루한 상식을 말하는 꼰대' 와 '비루먹은 흙수저' 라는 언더도그마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어서 오늘은 각 잡고 두 사람이 상징하는 '코미디' 와 '위트' 를 갖고 비교해보려고 한다.


일단 그들을 모두 포괄하는 '농담'에 대해서 말해보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이 대단히 복잡한 계략을 사용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건데, 그래서 꿈을 꾸는 와중에 우리는 그것이 꿈이라고 자각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농담은 '무의식적 사고에 속한 잘못된 논리' 를 가장하거나 보완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일부러 무의식적 사고 유형을 자유롭게 활동하게 해서 효과를 보려는 계략' 이다.

그래서 농담은 규범에 충실한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도 논리와 정당성을 거부할 권리를 가진다.



가령 A가 친구 B가 생활비 없이 다니는 게 안타까워 십만원을 빌려줬다고 치자. 근데 다음날 B의 카카오스토리에 스시집 인증샷이 떡하니 올라온다.

A가 어처구니없어서 B한테 "야, 그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쓰면 어떡해?" 하니까 B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십만원이 없을 땐 먹고 싶던 스시를 사먹을 수 없었는데, 이제 돈이 생기니까 또 사먹지 말라니 나보고 언제 스시를 먹으란 거냐?"


논리라는 겉옷 속에 '잘못된 논리' 를 감춘 농담의 전형적 예시이다. 여기서 B의 뻔뻔함은 일상적 경험을 관장하는 쾌락과 그 위에 존재하는 현실 구조를 뒤집어놓으면서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B가 구구절절 "생활을 근근이 꾸려나가야 하는 건 아는데... 하지만 먹고 싶은 건 어쩔 수 없고.. 중얼중얼.." 이라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에너지가 덜 드는 일인 건 자명하다. 프로이트는 농담적 사고를 할 때 드는 에너지 비용과 규범적 사고를 할 때 드는 에너지 비용 사이의 차이가 바로 농담이 쾌감을 낳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라고 했다.

만약 B가 자신의 논리를 아무 위장 없이 드러내거나 기본적인 논리와 윤리를 무시하고 '생활도 꾸릴 건데 내 입도 충족할 거야!' 하면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A의 나무라는 듯한 질문(현실적인 문제)을 사소한 것(먹고 싶은 것의 문제)으로 전위시켜서 비난을 우회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다음 상황이다. 친구 C와 D 사이에 C의 여친 E가 있는데, C가 유학을 갔다오는 사이에 D한테 'E를 잘 지켜달라' 고 했고, D는 걱정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근데 C가 갔다와보니 D가 E와 눈이 맞아 이미 상견례까지 마친 상태다. D의 멱살을 잡고 "지켜준다며! 네가 친구냐?" 하니까 D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지켜줬어. 나 말고 다른 남자가 뺏어가지 않게."


A와 B, C와 D의 차이는 최소한 B는 A에게 겉으로나마 논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돈이 없는 외부 현실' 과 '먹고 싶은 정신적 현실' 사이에 모종의 타협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한 것이다. 근데 D는 완전히 자신의 정신적 현실에 몰입해서 C에 대한 일말의 타협도 없다.

바로 이게 위트와 코미디의 차이다. 코미디는 위트처럼 요란하게 밑작업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일례로 C와 D의 이야기에선 압축이나 전위의 흔적이 전혀 없다. 소리도, 리듬도, 말장난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의식 속의 모순된 생각들이 위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근데 그럼 왜 코미디에 사람들이 웃는 것일까?

안데르센의 걸작 '벌거벗은 임금님' 의 내용을 다들 알 것이다. 거기서 '임금님은 발거벗었어요!' 라고 말한 어린아이를 제외하면 사기꾼들도, 궁정 귀족들도, 거리의 백성들도 입도 뻥긋 안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C와 D의 이야기는 'C가 배신자 D를 죽였다' 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코미디에서는 외부 현실의 논리를 뻔뻔하게 거부하는 대상을 보고도 '비난' 은 작용하지 않는다. 아이의 외침이라는 현실원리가 작동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위트는 두 현실 세계의 요구에 모두 귀를 기울여 둘 사이에서 타협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다. B의 "나보고 언제 스시를 먹으란 거냐?" 는 정신 현실의 탐욕과 외부 현실의 위치를 살짝 전위시켜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반면 코미디는 외부 현실을 아예 거부한다. 친구 여친을 가로챈 D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아무튼 다른 남자로부터 지켜줬다' 며 얼토당토않은 내부 현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2) 아서와 머레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커로 각성한 아서가 고담 시의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는 것을 단순히 흙수저들의 죽창 수준으로 보는 건 아주 낮은 수준의 통찰일 것이다. 필자는 아서와 머레이의 대립에 대해 얼마 전 정리한 바 있는, 미국의 초창기부터 그 뿌리를 둔 반지성주의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반지성주의는 종교적 확신을 근거로 한 철저한 평등관에서 시작되었다. 신 앞에서는 학식이 있든 없든,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무식쟁이든, 모두 똑같이 귀중한 인격체다.

종교 개혁을 거치며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 가 탄생했고, 프로테스탄트가 압도적 주류였던 미국에서는 '평등'이라는 가치관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원리가 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에도 부합해 한층 강해졌다. 미국의 국가 이념으로서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성의 능력은 분명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보다 소박한 도덕적인 분별력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져 있다. 제퍼슨은 이렇게 제안하는데, “시험 삼아 도덕 문제를 하나 내보는 것도 좋다. 농부는 대학교수와 같은 수준으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쓸데없는 규약이며 결정들에 얽매이지 않는 만큼 대학교수보다 나은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반지성주의의 성장의 토대가 되는 미국 사회의 철저한 평등주의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사회의 기본 패턴은 교회형과 종파형의 대립이다. 교회형의 정신은 국가와 정부를 지상에 있는 신의 도구로 간주하면서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사회 건설을 지향하고, 종파형의 정신은 지상의 모든 권력을 인간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필요악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큰 정부에 대한 종파주의 특유의 경계심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토대로 하는 미국의 헌법 이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에서 권력이란 항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 아래 작동해야 한다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종파주의가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엔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사기꾼' 을 추앙하는 테제가 정립해 있다. 정의로운 사기꾼은 결코 약자에게 사기를 치지 않는다. 그들의 대상은 대부분 가진 자, 권력자이며 대중은 그들이 맥없이 당하는 데 열광한다.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 강한 미국을 부르짖는 부시와 트럼프가 지극히 엘리트 관료적인 상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데는 그런 정서가 기여했다.


위에서 설명한 위트와 코미디의 차이를 대입하자면, 위트는 그걸 짜내는데도, 이해하는데도 다소의 수고가 든다. 옛날에 소위 '하이 개그'가 유행했던 걸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두 번 생각해야 웃긴 개그 말이다. 문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피식도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는 그냥 얼토당토않은 상황 자체에 (다크나이트의 조커의 표현을 빌려) 살짝 등을 떠밀어주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퍼져나간다.


트럼프도, 부시도 일반적인 이미지가 위트보단 코미디에 가깝다. 엘리트와 거리가 멀고, 논리정연함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늘 그들의 지지층은 중산층 이하의 화이트 푸어들이다. 당장 그들의 주머니 사정에 도움이 되느냐보단, 저 가증스런 주류 페미니즘과 PC주의라는 '가짜 정의'에 대고 가래침을 뱉어줄만한 사람이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대략적으로나마 아서와 머레이를 대표하는 상징들의 윤곽을 드러내보았다.




머레이는 (최소한 작중 시점에서)위트를 지향하고, 질서를 지향한다. 외부 세계와 정신 세계의 구분을 칼같이 하고, 그래서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아서의, 그리고 아서에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당신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본 적은 있어?" 농담과 현실을 구분하는 '위트' 머레이의 지극히 상식적이고 고상한 언사는 아서의 역린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아서(조커)는 코미디를 지향하고, 무질서를 지향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외부(현실) 세계와 정신 세계의 구별을 못하고, 결국 붕괴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고담 시에 그토록 많은 조커의 추종자들이 생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토마스 웨인' '머레이' 라는 현실원리는 자신의 위트에 치중하여 현실의 맥락에 연연했지만, 조커의 코미디는 발작적인 웃음, 철자가 엉터리인 소재 노트, 증권맨, 랜달, 어머니, 머레이 살해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현실적인 맥락이 결여되어 있었다. 만약 조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비슷한 대의명분이라도 입에 담았으면 제3자 입장에서는 '윤리도덕' 운운하는 머레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선문답 하나만 던지고 글을 마무리해보자.


"글 처음에 대중적인 소재 운운한 것 치고는 전개가 대중적이지 않은데?"

"그럼 코미디로는 성공한 거 아닐까?"

"그 말 꺼낸 시점에서 위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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