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

by Younghoo Kim






들어가며



마르크스Karl Marx는 생산관계의 총합, 즉 인간이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과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이 사회의 실제 기반을 형성하며, 그 위에 법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이에 상응하는 특정한 의식 형태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생계를 마련하는 생산 방식이 그들의 전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적 삶을 규정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마지막 형태였으며, 그것이 종식됨과 함께 인간 사회의 선사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보았다. 부르주아 사회는 혁명의 시기를 거쳐 종말을 맞이하게 되며,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체적인 정치 정당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일정 기간의 독재를 거친 후 무계급의 공산주의 사회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사상은 비교적 단순한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과 난해한 『자본론Capital』을 통해 주로 알려져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목표를 더 성공적으로 이루어낼수록,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운동의 원칙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강해졌다. 19세기 후반에 대중 정치 정당들이 탄생했으며, 그중에서도 사회주의는 가장 급진적인 흐름으로, 신흥 산업 사회의 혜택에서 배제되었거나 충분히 누리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구별짓는 요소는 혁명적 열정과 변화에 대한 욕망을 역사적 관점 및 과학성을 주장하는 이론과 결합하는 드문 능력이었다. 따라서 거의 필연적으로, 마르크스로부터 물려받은 사상들은 단순화되고 경직되며 점차 경화되어 갔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생애 말년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까지도 고려했다. 그러나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세계 무대의 중심이자 미래 혁명의 무대로 보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사상가인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제3세계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더 널리 존경받는 사상가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원칙은 자원이 부족하여 정치적 자유가 사치로 여겨지는 나라들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된 형태로 근대화 과정에서 대중의 참여를 이끄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왔다.

마르크스의 유산에 내재된 어려움—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관점에서—은 그의 사상이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의 핵심 분야에서 보이는 모호성을 간략히 개괄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연구는 주로 자본주의의 경쟁적 단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독점의 성장에 대해서는 정확히 예측했지만, 그것의 운동 법칙을 분석할 위치에는 있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제국주의는 마르크스의 비전에 있어 주변적 개념이었으나,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세계 경제 체제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사회학에서는 『공산당 선언』에서 계급 대립의 단순화를 언급하며 "사회 전체는 점점 더 두 개의 거대한 적대적 진영,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거대한 계급으로 분열되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가장 큰 공백 중 하나는 농민 계급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었다. 서유럽 농민들이 대체로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르크스가 ‘농촌 생활의 우둔함’이라고 폄하하며, 혁명 운동에서 농민들에게 부차적인 역할만을 부여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가장 큰 공백은 정치 분야였다. 실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지도부, 정당, 대중 간의 관계 문제를 직접 다뤄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활동했던 조직은 수백 명 규모의 선전 단체였던 공산주의 동맹과, 다양한 분파와 노동조합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제1인터내셔널뿐이었다. 대중 정당의 시대는 마르크스 사후에야 도래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철학의 폐지를 언급했는데, 이는 철학이 관념적 원칙이나 본질을 제시하는 한, 이러한 원칙이나 본질이 사회경제적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진 후에는 철학이 그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혁명이 아직 요원한 상황에서,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주석’들은 여전히 다루어져야 했으며, 점점 증가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구성원들은 보편성을 총체적으로 설명해 줄 일관된 원칙 체계로서의 ‘철학’을 필요로 했다.

마르크스 사상에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적 요소(따라서 조야한 의미에서 반(反)과학적 요소)에 대한 재강조는 루카치Lukács György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이 출판됨으로써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1930년 이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주의와 소외 개념에 예상 밖의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청년 마르크스’와 ‘노년 마르크스’ 중 누가 진정한 마르크스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열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구조주의 마르크주의자들 간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이번 글에서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데이비드 매클렐런David McLellan의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Marxism After Marx』에서 마르크스의 인생의 동반자였던 엥겔스Friedrich Engels, 러시아 혁명의 3대 거물인 레닌Vladimir Ilyich Lenin, 트로츠키Leon Trotsky, 그리고 스탈린Joseph Stalin에 관한 장을 정리해 보려 한다.





엥겔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사상을 가장 영향력 있게 해석한 인물은 단연코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의 오랜 동반자이자 협력자로서, 그는 마르크스 저작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특권적인 통찰을 가진 인물로 여겨졌다. 항상 열정적인 서신 교류를 이어간 그는 초기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지식을 사회주의 운동 전체를 위해 아낌없이 제공했다.

독학자였던 엥겔스는 독일 고전 철학에 대한 깊은 학문적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생애 대부분은 공장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데 할애되었다. 심지어 『공산당 선언』의 초안에서도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다소 더 점진적이고 결정론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가 후에 집중했던 관심 분야들은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법론적 강조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엥겔스가 과학 중심의 일반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첫째, 사회주의 운동이 점점 확산됨에 따라 당원들을 명확하게 방향 지을 철학적이고 명확한 선언이 필요해졌다. 특히 이미 경쟁적인 이론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엥겔스가 제공한 체계적인 방향은 영국과 독일에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엥겔스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자연 과학 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사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윈의 작업은 엥겔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는 생물학에서 끌어온 개념들을 사회에 적용했다는 이유로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에 따른 결과로, 엥겔스의 일부 저작은 교육을 받은 노동계층의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향해 있었다. 사실, 엥겔스는 과학이 더 무자비하고 무욕적으로 진행될수록 그것이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망과 더 일치하게 된다고 믿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물질' 개념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접근 방식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반뒤링론Anti-Duhring』에서 엥겔스는 ‘모든 존재의 물질성’에 대해 언급하며, "물질과 그 존재 방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가 최종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엥겔스는 자신의 유물론이 "18세기의 단순한 형이상학적이고 배타적으로 기계적인 유물론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에 반대하여, 현대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최근 발전을 포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연의 변증법Dialectics of Nature』에서 엥겔스는 기계론적 유물론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더욱 강화하며, 셸링과 같은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들과 현대 '생명력' 이론가들과의 친밀감을 지닌 물질에 대한 견해를 탐구했다. 이것은 물질에 숨겨진 영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엥겔스의 유물론에서 중심적인 부분은 헤겔에 대한 그의 이해였다. 후기 엥겔스에게 헤겔은 "가장 뛰어난 천재"였으며, "의식적으로 변증법적 자연과학에 대해 현대 공산주의와 유토피아적 사상가들의 관계와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노년 헤겔의 체계 구축과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연과학적 기초 위에서 체계화하려는 경향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있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처럼 헤겔을 '전도顚倒'시켰지만, 그 결과는 1840년대에 그들의 사고에서 특징적이었던 철학의 폐지와 실현이 아니었다.

엥겔스에게 헤겔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그가 변증법의 주요 법칙들을 명확히 공식화한 첫 번째 사상가였다는 점이었다. 이 법칙들은 주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양이 질로 변하는 법칙과 그 반대’, ‘반대의 상호 침투 법칙’, ‘부정의 부정 법칙’이 그 골자이다.

엥겔스의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관념에 통합된 것은 그의 인식론이었다. 엥겔스에게 인간의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실제 사물과 과정의 반영" 또는 "다소 추상적인 그림"이며, 개념은 "실제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에 대한 의식적인 반사"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발전에 대한 주요 기여는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그의 해석과 역사 연구에 있었다. 대부분의 제2인터내셔널 이론가들처럼, 엥겔스는 철학보다는 역사에서 더 강한 모습을 보였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한 반면, 엥겔스는 그것을 해석하려 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깔끔한 정의일 수 있지만, 이 표현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엥겔스의 역사 연구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즉각적인 정치적 연관이 없는 경향을 보였다. 마르크스가 생애 말년에 원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어 루이스 모건의 책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에서 광범위한 발췌를 했지만, 이 노트를 풀어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이라는 본격적인 작업으로 발전시킨 것은 엥겔스였다.

따라서 엥겔스는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마르크스보다 사회 발전에 대해 더 곧게 뻗는 설명을 제시했다. 물론, 역사적 유물론을 구성할 때 엥겔스는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그가 역사에 마르크스를 너무 단순하게 적용한 결과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당시 존재하던 이론의 조잡한 판본에 대해 비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한 날카로운 비판에 맞서려 했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역사에서 궁극적인 결정적 요소는 실제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 이상은 마르크스나 나도 결코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것을 왜곡하여 경제적 요소만이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 명제를 의미 없고 추상적이며 무의미한 문구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있으며, 그 속에서 끝없는 우연의 무리 속(즉, 내적인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하여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들) 속에서 경제적 운동은 결국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하게 된다.> Engels to Bloch, MESC, p. 417.


엥겔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상부구조는 경제적 기초에서 비롯되었고, 때로는 그와 함께 발전해 왔다. 상부구조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질 수 있으며, 고유한 구조와 법칙을 가질 수 있다. 상부구조와 기초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상부구조가 일정한 기간 동안 기초의 발전을 결정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상부구조가 기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역사는 지금까지 자연 과정처럼 진행되어 왔으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운동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제적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 구별하여 말했으며, 이는 사회적 과정을 구획화하고 이후의 수정주의 논쟁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는 경향에 따른 것이었다.

엥겔스의 과학적 연구에 대한 일반적인 성향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이분법을 초래했다: "과학자일 때는 관념을 가질 수 없다. 과학적 결과를 도출하고, 당원이라면 그 결과를 실천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과학자가 될 수 없다..." 전후 상황은 엥겔스가 자신의 상당한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했으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약칭 SPD) 지도자들과의 강제적인 고립 속에서 생활했다.

1895년, 사망 직전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Class Struggles in France』 재판에 쓴 서문에서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이 "자연적 과정처럼 자발적이고, 꾸준하며, 저항할 수 없고, 동시에 평온하게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225만 명의 유권자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계속된다면, 세기 말까지 우리는 사회의 중간 계층, 즉 소상인과 소농들의 대다수를 정복하고, 모든 다른 권력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굴복해야 할 결정적인 권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 성장을 중단 없이 계속 이어가, 결국 현 정부 체제의 통제를 넘어설 때까지, 이 매일 증가하는 충격력을 선봉에서의 소규모 충돌로 소모하지 않고, 결정적인 날까지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한 임무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사회주의 전투 세력의 꾸준한 상승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거나 일정 기간 후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 1871년 파리에서의 유혈 사태와 같은 군대와의 대규모 충돌. 장기적으로 그것도 극복될 것이다. 수백만 명 규모의 당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유럽과 미국의 소총 탄창을 전부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상적인 발전은 방해를 받을 것이며, 충격 세력은 아마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결정적인 전투는 지연되고, 연장되어 더 큰 희생을 동반할 것이다.> F. Engels, in Kar] Marx-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hereafter MESW) (Moscow, 1962), vol. 1, pp. 135f.


이러한 구절들은 엥겔스의 정치적 '유언'으로 간주되며, 확실히 SPD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역할을 했다. 다만, 엥겔스가 (매우 마지못해) 베를린 지도자들의 압력에 의해 더 혁명적인 구절들을 실행하기로 동의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엥겔스의 다소 모호한 입장이 마르크스의 정치적 원칙이 변화하는 상황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논쟁에서 양측 모두에게 공격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레닌



레닌은 1870년 사마라에서 태어났다. 거의 모든 다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처음에는 인민주의적 사상에 끌렸었다(그의 형은 1882년 차르를 암살하려는 인민주의자들의 시도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18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3년간 머무는 동안 마르크스주의자로 완전히 전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선전론’을 비판하며 동맹에 참여했고,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도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러한 경험들은 레닌이 조직 전술과 노동계급 의식의 발전을 연구하도록 이끌었으며, 산업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탐구하게 했다. 1895년 그는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What the Friends of the People Are』라는 제목의 첫 주요 저서를 발표했으며, 이는 이전의 인민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 기본적인 이념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통성과 완전히 일치했다.

레닌은 첫째로, 인민주의자(인민의 벗)들이 사회주의를 주장하려 할 때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들이 독재에 맞서고 급진적 민주주의 프로그램을 위해 싸운다면 그들을 하위 동맹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그는 농민들이 점점 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에 열려 있었으며, 농민들이 점차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촌 부르주아지로 분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전체 노동자 및 착취당하는 인구를 대표하는 유일하고 자연스러운 대변자"라는 역할을 주장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의 착취가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지만, 대다수 생산자의 착취는 소규모이고 분산되며 미개발되어 있는 반면,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대규모로, 사회화되고 집중되어 있다." 레닌은 동료들과 달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대 역할과 농민계급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플레하노프Georgi Valentinovich Plekhanov와 비교해 농민계급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1896년 레닌은 체포되어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노동계급 의식과 사회민주당의 발전이 러시아의 경제 발전과 손을 맞잡고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배 생활 중 이 주제를 매우 상세히 연구하고, 종종 과소평가되는 저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을 집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발전 과정을 명확히 문서화한 연구로, 마르크스가 아마도 『자본론』 제3권에서 다룰 내용을 보완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는 임금이 너무 낮아서 내수 시장이 확장되지 않아 자본주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여, 레닌은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설명한 고리대금업 자본과 상인 자본 단계는 이미 일부 지역에서 제조업 자본, 즉 생산 시스템에 직접 적용되는 자본으로 대체되었으며, 산업 자본의 다음 단계가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세한 분석을 통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그들이 모든 러시아 노동자, 즉 장인과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착취를 온전히 이해하고 이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가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루며 이미 도달했던 결론을 위한 경제적 증거를 제시했다.


<착취는 완전히 발전하여 그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며, 복잡한 세부 사항 없이 나타난다.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며, 그의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이유로 공장 노동자는 전체 착취받는 인구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V. Len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 Collected Works, vol. 1, p. 299.


이 관점—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 투쟁에서 인구를 이끈다는 생각—은 1914년까지 레닌의 정치적 사고를 지배했다.

1900년 초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온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연합의 마르토프Julius Martov와 포트레소프와 함께 플레하노프를 지지하여 명확한 정통 노선을 확립하려는 투쟁을 펼쳤다. 그러나 레닌에게 이 순간은 정통파가 힘을 모았을 때만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이스크라Iskra》라는 정기간행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봤다. 이스크라는 정통 노선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배급망을 통해 그동안 부족했던 당 조직을 창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크라가 주로 레닌의 추진력 덕분에 러시아 내에서 확립되었을 때, 그는 해외 연합과 결별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스크라 위원회의 권위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태도에 대해 불평을 제기했다. 이 분열은 두 년 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열을 예고했다. 이스크라 조직의 원칙은 레닌의 긴 팸플릿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is to be Done?》에 요약되어 있다.

이스크라 편집위원회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프로그램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자본주의가 러시아에서 아직 지배적인 생산 방식인지에 대한 이견과(따라서 당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에 관한 논란), 농민과의 미래 관계에 대한 논쟁이 포함되었으며, 레닌은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의 목표를 지지할 것에 대한 신뢰가 플레하노프보다 덜했다. 또한 당과 프롤레타리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 7월 총회를 앞두고 지도부는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이 총회는 이스크라의 러시아 사회민주당 건설을 위한 오랜 투쟁의 결실이었다. 총회는 ‘경제주의자들’에 대한 압도적인 비판과 별도로 조직된 유대인 노동당General Jewish Labour Bund이 주장한 연방주의 원칙의 거부로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의 규약에 대한 논의에서 이 단합은 사라졌다. 레닌과 마르토프는 제1조에 대한 서로 다른 초안을 제시했다. 레닌의 초안은 당원은 "당의 프로그램을 수용하고 당에 재정적으로 기여하며 그 중 하나의 조직에서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자"라고 정의한 반면, 마르토프는 "당의 프로그램을 수용하고 당에 재정적으로 기여하며 당 조직의 통제와 지시에 따라 정기적으로 일하는 자"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자신의 초안이 "이 개념을 좁히는 반면, 마르토프의 초안은 그것을 확장한다"고 주장하며 "(마르토프가 정확히 표현한 대로) 마르토프의 개념을 구별짓는 것은 '유연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당 생활의 시기에 바로 이 '유연성'이 혼란, 동요, 기회주의의 모든 요소들에게 문을 여는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마르토프는 후에 레닌의 초안이 당과 공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불법 조직에 가입할 수 없는 많은 지식인들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을 배제했다고 주장했다. 이 노동자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당에 가입을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문구의 차이가 거의 미미해 보일지라도, 이는 양측 간의 큰 간극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서의 패배를 보상하기 위해 (마르토프의 초안이 소수의 찬성을 얻었다) 레닌은 이스크라의 중앙위원회를 소규모로 구성하고 편집위원회를 축소하는 데 더욱 열정을 쏟았다 — 각기 세 명만을 구성하려 했다. 이는 사술리치, 악셀로드, 포트레소프라는 '구세대'의 은퇴를 의미했다. 비록 이 조치가 효율성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지만 (세 사람은 신문 운영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불만을 일으켰다. 그러나 레닌은 정당 대표들이 총회에서 퇴장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다수파가 되자 (마르토프의 추종자들과 대조되는 볼셰비키들이 다수였다)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의 추종자들은 '소수파' 또는 멘셰비키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의 논쟁은 분명히 인물들에 많이 기인했으며, 마르토프는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에게 이 논쟁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라고 썼다. 거의 1년 후, 악셀로드는 "원칙이나 전술에 관한 명확한 차이가 아직 없다. 조직 문제에 대해서도 차이점은 원칙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받아들이는 조직 원칙의 적용 방법에서 발생한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일시적으로 통합된 제4차 당 대회에서 레닌의 초안은 이의 없이 채택되었다. 조직적으로 볼셰비키보다 멘셰비키가 더 민주적이지 않았으며, 1905~6년 레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제시된 구조를 수정할 때 멘셰비키는 오히려 덜 민주적이었다. 멘셰비키는 1905년 혁명에서 볼셰비키만큼 혁명적이었다. 1905년 이후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멘셰비키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과의 밀접한 동맹을 지지하며 농민을 신뢰하지 않는 반면, 볼셰비키는 그 반대의 견해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민주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라는 오래된 정통적 견해를 버린 멘셰비키에 대한 레닌의 격렬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을 청산하려는" 그의 비난은 대부분 근거가 없었다. 멘셰비키는 단지 합법적(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활동에 참여하여 대중당을 구축하려 했을 뿐이었으며, 이는 1912년 이후 볼셰비키들이 따랐던 정책이기도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당에 관한 레닌의 기본적인 작업이었지만, 아래에서 언급되듯이 그 중요성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레닌의 소책자 부제인 《우리 운동의 불타는 질문들Burning Questions of our Movement》은 역사적 맥락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 특히 중요하다. 플레하노프와 악셀로드의 의견을 반영하며,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두면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카우츠키를 길게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구절을 이어갔다.


<노동자 대중이 그들의 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수 없으므로, 유일한 선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아니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중도란 없다. (인류는 ‘제3의’ 이데올로기를 창조하지 않았고, 게다가 계급 대립에 의해 분열된 사회에서는 결코 비계급적이거나 초계급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경시하거나 조금이라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발성에 대한 논의가 많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운동의 자발적인 발전은 그것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 발전은 크레도Credo 프로그램의 방향을 따른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노동자 운동은 노동조합주의Nur-Gewerkschaftlerei이고, 노동조합주의는 부르주아지에 의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적 노예화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자발성에 맞서 싸우는 것이며, 노동자 계급 운동이 이 자발적인 노동조합주의적 노력으로 부르주아지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고, 그것을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보호 아래 두는 것이다.> V. Lenin, What Is to be Done?, op. cit., pp. 156f.


레닌의 근본적인 이념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열에서 실제로 쟁점이 된 부분이었다. 조직은 전문 혁명가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전문적이어야 했다: 그들은 당 업무에 전념하고, 완전히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정치 경찰에 대한 투쟁은 특별한 자질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문 혁명가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대중 조직에 반대하지 않았다 — 그 반대로, 그는 대중 조직이 당 엘리트와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수와 가장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이러한 집단, 노동조합, 조직을 어디에나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혁명가들의 조직과 혼동하거나, 그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것은 어리석고 해롭다. 대중 운동을 '수행'하려면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전념할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런 사람들은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전문 혁명가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더욱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V. Lenin, What Is to be Done?, op. cit., pp. 228f.


레닌은 당 내부 민주주의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직책에 대한 완전한 공개와 선거를 의미하며, 현재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오직 ‘구제불능의 유토피아주의자’만이 이를 주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도부는 협의의 원칙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다.

1905년 러시아를 휩쓴 파업과 불안의 물결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많은 부분을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레닌의 비관주의는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에 의해 반박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레닌은 대중 회원에게 개방적인 당에 반대했지만, 1905년의 변화된 상황은 새로운 회원들의 폭증을 가져왔다. 당의 회원 수는 10배 증가했으며, 엘리트당과 대중 조직 사이의 구분은 덜 엄격해졌다.

새로운 당 구조는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라는 구절로 요약되었다. 이 구절은 맨셰비키에서 유래했으며, 레닌의 제안에 따라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두 파를 일시적으로 재통합하면서 당의 규약에 포함되었다. 대회에 대한 보고에서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원칙이란 "지방 조직들이 명목상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의 주요 조직 단위가 되도록 지치지 않고 노력하며, 모든 최고 직위의 기관들이 선출되고 책임을 지며 해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 내 소수자의 권리도 보장되었다. 레닌은 자신의 원칙을 ‘토론의 자유, 행동의 통일’이라고 밝혔으며, 행동을 촉구하는 발언은 중앙위원회가 아닌 당 대회에서만 할 수 있었다.

레닌의 혁명에 대한 이념은 그가 플레하노프에게서 물려받은 정통 전통에서 시작되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책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러시아의 경제 발전을 분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인민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논박인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레닌은 러시아가 경제 구조상 이미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부르주아지가 너무 약하므로) 프롤레타리아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닌은 ‘승리하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가 제시한 여러 전제조건들은 그가 이를 먼 미래의 일로 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1916년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가 그의 근본적인 구상을 바꾸기 전까지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의 기본적인 관점은 프롤레타리아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이끈다는 것이었다.

즉각적인 목표가 전제 정치의 전복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립이라는 생각은 20세기 초 거의 모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주요 논쟁의 포인트 중 하나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특히 동맹 문제였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모두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동의했지만, 멘셰비키는 이 동맹의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반면 레닌은 이를 체계적인 불신으로 바라보았으며, 이는 1905년 혁명 동안 더욱 강조되었다. 이 혁명에서의 패배로 멘셰비키는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을 통해 얻은 초기 개혁을 바탕으로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레닌은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이 어떤 혁명적 투쟁에서든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동맹자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레닌은 다가오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에 대해 자신의 사고의 유연성과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점점 강경한 태도는 농민들을 더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고, 그는 농민들이 정치권력에 참여하도록 제안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라 스스로 주장할 수 있었다. 이는 농민들을 고전적인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체계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위치에 놓는 것이었다. 1905년의 사건들은 혁명의 운명이 변경의 집단 그리고 특히 농민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멘셰비키들이 농민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자가 될 수 없다고 본 반면, 레닌은 1905년 여름에 쓴 그의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Two Tactics』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적 독재"를 제안했다. 농민들이 포함된 이유를 레닌은 책의 결론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농민들이 혁명에 참여하는 이유는 급진적인 농업 개혁의 전망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이익에도 관련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싸울 때에도 농민들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민주적인 시스템만이 그들의 이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대중으로서, 다수로서의 우위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수록, 그들은 더 일관되게, 결연하게 철저한 민주적 혁명을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부르주아지와 달리, 민중의 우위에서 두려운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V. Lenin, Two Tactics, Collected Works, vol 9, pp. 98f.


레닌의 사상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과 얼마나 달랐는가? 이는 많은 논란의 주제가 되어왔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이 1905년과 1917년 모두를 포괄하는 일관된 이론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싶어 했다. 트로츠키의 추종자들(그리고 트로츠키 자신)은 나중에 레닌과의 차이를 최소화하려 했으며,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의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대로 주장하려 했다. 이 논쟁은 사용된 많은 용어의 불확실성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분명한 것은 트로츠키가 흔히 주장된 것처럼 농민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레닌 자신도 두 혁명의 관계에 대해 자주 불명확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민주 혁명에서 바로, 그리고 우리의 힘, 즉 계급의식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중단 없는 혁명을 지지한다. 우리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V. Lenin, ‘Social Democracy’s Attitude Towards the Peasant Movement’, Collected Works, vol. 9, pp. 236f.


레닌은 여러 번 페라스타니에Perastanie(혹은 ‘한 단계가 다른 단계로 자라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것이 트로츠키와 레닌의 차이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레닌은 처음에 경제학을 농민주의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공부했으며, 러시아에서의 즉각적인 사회주의를 제안하는 것은 그가 이전에 대립했던 상대들을 과하게 연상시켰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 혁명의 승리로 즉시 시작될 것이라고 분명히 했지만, 트로츠키가 ‘다양한 역사적 시기를 혼동하고, 부르주아 혁명을 겪고 있는 러시아를 오래 전에 혁명이 끝난 유럽과 비교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그의 ‘주요 오류’를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무시하고 이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1917년까지 그의 기본적인 견해였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 현상은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 즉 독점 자본주의의 성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형태의 자본주의는 20세기 초반에 경쟁 자본주의를 대체했으며, 선진 경제들이 은행이 통제하는 금융 자본에 의해 지배되면서 독점체나 기업 합동trust으로 집중되었다. 이전 형태의 자본주의는 상품 수출이 특징이었지만, 독점 자본주의는 자본을 수출했다. 잉여 자본은 국내에서 사용될 수 없었는데(그렇게 하면 자본가들의 이윤이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을 후진국으로 수출’했다. 이러한 후진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자본이 부족하고, 토지 가격이 비교적 낮으며, 임금이 낮고, 원자재가 저렴하기 때문에 이윤이 높았다. 이는 결국 국제 독점체들의 영향권에 따라 세계가 사실상 분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레닌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중 하나는 식민지 확장이 독점 자본의 절정기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지만, 그의 개념 정리는 모호하며, 실제로 인과적 논지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레닌은 그의 소책자 8장에서 제국주의의 두 가지 내부적 영향을 지적했다. 첫째, 제국주의의 기반인 독점이 기술 발전을 저해하고 정체시키는 경향을 만들었다. 둘째, 그리고 더 중요한 점으로, 제국주의의 초과이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부를 매수하고, 따라서 기회주의를 조장하며, 형성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레닌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매수되었는지, 왜 해당 국가들의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또는 이것이 혁명적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라고 불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전망은 훨씬 덜 낙관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쇠퇴 경향이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을 배제한다고 믿는 것은 실수이다. 그렇지 않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특정 산업 부문, 특정 부르주아 계층, 그리고 특정 국가들이 이러한 경향들 중 하나 또는 다른 하나를 더 크거나 더 작은 정도로 드러낸다. 전반적으로 자본주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장은 점점 더 불균등해질 뿐만 아니라, 특히 자본이 가장 풍부한 국가들의 쇠퇴 속에서도 그 불균등성이 드러나고 있다.> V. Lenin, Imperialism ..., op. cit., p. 300.


레닌의 혁명적 관점이 발전하는 데 있어, 그의 제국주의 분석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 전쟁은 세계 금융 자본주의를 최종 단계로 몰아넣었으며, 전 세계적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주관적 조건을 도입했다. 이미 1915년 레닌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과제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점화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었다. 1917년 스위스를 떠나기 전, 그는 "제국주의 전쟁의 객관적 조건이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첫 단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혁명이 러시아에만 머물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는 데 몰두했다.

레닌의 국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저작은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이며, 실제로 콜레티Lucio Colletti는 이를 "레닌이 정치 이론에 기여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이 책은 그의 제국주의 이론의 실천적 대응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저서는 1916년 여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국가의 존속 여부를 두고 부하린Nikolai Bukharin과 벌였던 논쟁에서 기원했다. 부하린은 국가의 ‘소멸’ 측면을 강조한 반면, 레닌은 착취자를 몰수하기 위해 국가 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입장을 바꾼 것은 레닌이었다. 1917년 여름에 집필된 『국가와 혁명』의 많은 사상—특히 반(反)국가주의적 주제—는 사실 부하린의 것이었다.

레닌은 국가를 ‘특수한 폭력 기구, 즉 특정 계급을 억압하는 폭력 조직’으로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그는 심지어 의회 민주주의조차도 평가절하했는데, 이는 그가 당시의 관료적·군사적 영향력 증대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지배 계급의 어느 구성원이 의회를 통해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진정한 본질이며, 이는 의회 입헌 군주제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V. Lenin, Selected Works (Moscow, 1960), vol. 2, p. 338.


따라서,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 대해 내린 결론을 모델로 삼은 레닌은 혁명의 과제가 국가를 분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레닌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한동안 ‘부르주아 권리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 국가조차도 존속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국가는 단순히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부패한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레닌은 국가를 ‘무장한 지배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고도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소멸하는가? 그렇다. 그것이 대중과 분리되어 그들에게 반대하는 독립적인 권력으로 존재하는 한, 결국 소멸하게 된다. (여기서 레닌이 최근 소비에트 경험에서 받은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이 과도기적 시기의 제도적 형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강조가 강하게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투쟁의 인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정으로까지 확장하는 사람만을 의미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와 일반적인 소petit(그리고 대big)부르주아를 가장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특징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정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V. Lenin, Selected Works, vol. 2, p. 328.


정치적 영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혁명의 주체인 당(Party)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당에 대한 진지한 언급이 단 한 번 등장하는데, 그때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당을 교육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전체 인민을 사회주의로 이끌며, 새로운 질서를 지도하고 조직하며, 부르주아지 없이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사회생활을 구축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피억압 계층의 교사이자 안내자,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대를 교육한다.> V. Lenin, Selected Works, vol. 2, p. 322.


여기서 '권력을 장악하고 이끄는 능력이 있는' 것이 선봉대인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모호하다. 레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전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지만, 레닌은 이로 인해 자신의 보다 자유주의적인 발언들과 충돌할 수 있는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레닌은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이 권리를 조건에 따라 제한했으며, 결국 실질적으로 그 권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레닌은 그의 초기 공식 중 하나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의 자결권보다는 각 민족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결권에 관심을 둔다. … 국가 자치 요구에 대한 지지는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로그램에서 영구적이고 구속력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지지는 오직 고립된 예외적인 경우에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할 수 있다.> V. Lenin, ‘On Manifesto of Armenian Social Democrats’, Collected Works, vol. 6, p. 327.


따라서 레닌은 국가 독립 요구에 조건부로만 인정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례는 폴란드였으며, 폴란드는 유럽의 종속된 국가 중 가장 크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주제였다. 마르크스는 폴란드 독립 요구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레닌은 폴란드 사회주의당이 자국의 독립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이는 국가 문제가 레닌에게 가벼운 문제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국가적 열망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결합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보다 국가 자결 원칙을 더 강하게 지지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애국주의나 '국가적'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싫어했다. (그가 1914년 12월에 쓴 《대러시아인의 국가 자부심에 대하여On the National Pride of the Great-Russians》라는 기사에서는 대러시아 민족 문화에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전쟁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태도가 완전히 반러시아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레닌에게 국가 자치 문제는 순전히 전술적인 문제였으며, 자결권은 항상 당의 이익에 종속되었다.

따라서 레닌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방 원칙과 국가 문화 자치에 대한 지지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실제로 '모든 민족과 언어의 완전한 평등을 믿으며, 어떠한 강제적인 공식 언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며, '어떤 민족에게도 어떠한 특권도 부여하지 않으며, 어떤 국가 소수민족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 근본 법률'을 주장했다. 이는 '특히 광범위한 지역 자치와 완전한 민주적 지방 자치 정부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같은 입장까지는 가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반동적인 지식인intelligentsia과 소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그에 대해 1913년에 매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분리를 지지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분리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동적인 대러시아 민족주의 때문에 분리할 권리를 지지합니다. 대러시아 민족주의는 민족 공존의 개념을 너무 더럽혔기 때문에, 때로는 자유로운 분리 후에 더 가까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자결권은 우리의 일반적인 중앙집권화 원칙에 대한 예외입니다. 이 예외는 반동적인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고려할 때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우와 같이)이 예외를 거부하는 것은 기회주의입니다.> V. Lenin, Letter to S. Shahumyan, Collected Works, vol. 19, p. 501.


1914년 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견해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힐퍼딩Rudolf Hilferding과 룩셈부르크의 국제 독점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도래했다는 기본적인 주장은 받아들였지만,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결론인 모든 민족 집단이 이제는 구식이 되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발전의 속도는 고르지 않았고, 특히 그가 가장 우려했던 동유럽 지역에서는 발전이 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의 민족 정책에서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내전과 군사 상황에서의 필연적인 중앙집권적 경향, 그리고 산업화 추진에 의해 방해받았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특정한 철학적 구성 요소를 요구한다고 믿지 않았다. 예를 들어, 1894년에 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레닌은 "변증법에 대한 고집 … 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발전한 헤겔주의의 유물遺物일 뿐이며, 그것은 표현 방식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적 내용을 가지지 않았다는 생각은 19세기 말에는 일반적이었다.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이것을 반대의 이유로 보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예를 들어,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은 이것을 특성으로 보았으며,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칸트Immanuel Kant나 마흐Ernst Mach의 사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보충하려 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유배 중, 레닌은 플레하노프를 읽고 마르크스주의가 플레하노프의 사상과 같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이 창당된 후에도, 그는 철학에서 특정한 '당의 노선'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논의는 1905년에 볼셰비키에 합류한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 루나차르스키Anatoly Lunacharsky, 고르키Maxim Gorky와 같은 뛰어난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1908년에도 레닌은 마흐주의를 당 내에서뿐만 아니라 각 파벌 내에서도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파벌 내에서 그것에 반대하는 강력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는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었다. 첫째, 1907년부터 레닌과 오초보주의자들— 제3하원Duma 선거를 보이콧하려는 보그다노프가 이끄는 볼셰비키 동료들— 간의 논쟁이 심화되었다. 레닌은 소수파였고 보그다노프는 그 파벌의 대변인으로 선택되었다. 보그다노프와 그의 친구들은 러시아 밖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가프리의 고르키 집에서 당 활동가들을 위한 볼셰비키 학교를 설립했다. 레닌은 결국 자신의 통제를 재확립하기 위해 보그다노프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그와 함께 그의 좌파 반대자들을 무너뜨려야 했다. 둘째, Die Neue Zeit(*Новое время, 1868년부터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한 정치시사 일간지로 ‘새로운 시대’라는 의미이다)는 보그다노프의 에른스트 마흐와 혁명에 관한 글을 번역하여 독일인들에게 볼셰비키들이 마흐주의 철학을 그들의 파벌의 기초로 삼고, 멘셰비키들이 스피노자Baruch Spinoza와 홀바흐Baron d'Holbach의 철학을 지지한다고 알리는 짧은 서문을 붙였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관한 에세이의 최근 출판은 마흐주의자들의 가장 대담한 출판물이었으며(특히 루나차르스키의 '종교적 무신론'에 대한 발언을 고려할 때), 이 견해를 지지하는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레닌은 볼셰비키들이 철학적 수정주의자들로, 멘셰비키들은 정통 철학자들로 간주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의 목적은 철학과 정치 문제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이었다. 철학과 정치에서의 수정주의를 볼셰비키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멘셰비키들이 철학에서 볼셰비키들의 수정주의를 정치에서의 수정주의로 연결하려 했던 것이다. 레닌이 책을 집필하던 중에도, 데보린Abram Deborin은 멘셰비키 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른바 볼셰비즘의 모든 전술에는 주관주의와 의지주의의 흔적이 있으며, 그것의 철학적 표현이 바로 마흐주의이다. 우리 마흐주의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의식적인 볼셰비키들로서, 볼셰비즘의 실천과 전술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볼셰비키 전술가들은 실용적인 사람들이지만, 부지중에 마흐주의자이자 관념론자들이다.> Quoted in D. Joravsky, Soviet Marxism and Natural Science (London, 1961) p. 34.


따라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진정한 중요성은 철학적 논증 자체보다는 실천적인 정치적 관점에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에 가장 유익한 유일한 철학이라는 그의 견해에 있다. 마흐주의와 같은 당대의 철학적 경향들은 당의 활동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간주되었으며, 당의 실천적 활동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표현된 중심 철학적 견해들은 부차적이며 일시적인 중요성을 지닐 뿐이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마흐와 보그다노프에 대한 장황하고도 매우 논쟁적인 비판이었다. 인식론과 존재론을 동일시하는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한 구절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문제는 유물론의 특정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즉 철학에서의 두 가지 근본적인 흐름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서 감각과 사고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사고와 감각에서 사물로 나아가야 하는가?> V. Len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Collected Works, vol. 14, p. 42.


그리고 그는 물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물질이란 인간에게 감각을 통해 주어진 객관적 현실을 의미하는 철학적 범주이며, 이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사진으로 찍히고, 반영되지만, 감각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두 가지 교리—외부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과 인식의 ‘복사’ 이론—는 레닌 유물론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다. 이 책에서의 기본 개념은 두 개의 철학적 학파, 즉 유물론과 관념론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이었다. 관념론에 대한 가장 작은 양보조차도 객관적으로는 신앙주의와 종교로 귀결되어 결국 부르주아 계급을 돕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감각 인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한 사람들이 사실상 종교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을 뿐만 아니라—훨씬 더 믿기 어려운 주장으로—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이 필연적으로 종교와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1914년의 참사가 벌어진 후, 레닌은 철학에 다시 관심을 돌렸으며, 이전보다 훨씬 덜 도구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유럽 사회주의가 겪은 재앙을 직면하며 자신의 관점을 재정립하기 위해 레닌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 헤겔을 세밀하게 연구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헤겔에 대한 언급이 단 두 개뿐이며—그마저도 피상적이었고—변증법에 대한 내용도 거의 없었던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노트(총 300쪽에 달하는 인쇄물)는 1929년 당내에서 ‘기계론적’ 일탈에 맞선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출판되었다.

이 『철학 노트Philosophical Notebooks』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레닌이 헤겔의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을 연구한 내용이었다. 그의 의도는 헤겔의 관념론을 전복시켜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의 초점은 헤겔에 대한 비판적 논평에서 헤겔 사상의 변증법적 요소를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철학 노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헤겔의 가장 관념론적인 저작 속에는 가장 적은 관념론과 가장 많은 유물론이 존재한다.’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남긴 가장 유명한 언급은 헤겔과 『자본론』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히 공부하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그 첫 번째 장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반세기 후에도 어느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V. Lenin, Philosophical Notebooks, Collected Works, vol. 38, p. 180.


이는 사실 자기 비판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철학적 스승이었던 플레하노프에 대해 “철학에 관해 약 1,000페이지를 썼지만, 정작 변증법에 대해서는 … 전혀 쓰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철학 노트』에서 그는 인식론의 반성 이론에서 말하는 ‘복사’가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우리가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관념론을 단순한 오류로 보지 않고 일면적인 과장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그는 “지적인 관념론은 어리석은 유물론보다 지적인 유물론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변증법적 사고와 비변증법적 사고의 대립으로 대체되었다.

레닌은 헤겔 『엔치클로페디Encyclopaedia』의 제25절을 칭찬하면서,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의지가 주관성과 객관성의 ‘일면성’을 극복하는 두 가지 측면, 두 가지 방법, 두 가지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논하면서,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에서 실천의 기준을 인식론에 도입한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은 단순히 객관적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창조한다”고 결론지었다.

레닌은 변증법의 핵심 법칙으로서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때때로 일종의 ‘비합리적 생기론’에 빠져들기도 했다. 물론 레닌의 헤겔 연구와 그의 이후 정치적 태도 사이의 정확한 연관성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914년의 대격변에 대한 레닌의 철학적 반응인 『철학 노트』는 경제학 분야에서의 제국주의론과 병행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헤겔 독서가 『국가와 혁명』의 일부와, 혁명 과정에서 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그의 정치적 관점, 그리고 1920~21년 무역 조합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



1903년 레닌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은 트로츠키였다. 1879년 비교적 부유한 유대인 농가에서 태어난 트로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혁명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저널리즘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한때 이스크라 그룹의 일원이자 레닌의 가까운 협력자였으나, 1904년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입장을 발전시켰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대중의 의식과 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가졌으며, 혁명적 전위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강조를 거부했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당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반대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멘셰비키보다도 격렬했다. 『제2차 당 대회에 대한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서Report of the Siberian Delegation on the Second Congress』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을 강하게 비판하며, 레닌이 ‘자신 특유의 재능과 에너지를 발휘하여 당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비난했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운동에 적합한 조직 구조를 갖추고, 노동자들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는 당을 원했다. 1904년에 출간된 그의 소책자 『우리의 정치적 과제Our Political Tasks』는 ‘볼셰비즘 현상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상을 ‘경제주의자’들과 동일시하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절망감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경제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역사의 뒤를 따라가는 겸손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막중한 과업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다면, ‘정치주의자’들은 역사를 자기들의 꼬리로 만들려고 애쓰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L. Trotsky, Nashi Politicheskye Zadachi (Geneva, 1904) p, 54, quoted in B. Knei-Paz, op. cit., p. 197.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그의 가장 유명한 예측을 밝혔다.


<당내 정치에서 이러한 방식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당 조직이 당을 대체하고, 중앙위원회가 조직을 대체하며,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체한다.> L. Trotsky, op. cit., p. 54.


1905년 소비에트에 대한 그의 경험은 이러한 견해를 더욱 강화했으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두 계파 사이에서 조정자로 활동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이 자신의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라고 결론 내린 것은 1917년의 위기 속에서였다.

트로츠키의 당에 대한 견해는 결코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그의 분석과 혁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결론은 독창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04년 봄 뮌헨에서 파르부스Alexander Parvus와 만난 일이었다. 파르부스는 독일 사회당 좌파에서 두드러진 망명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그는 1904년 이스크라에 발표한 「전쟁과 혁명War and Revolution」이라는 일련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국가라는 개념은 해외 시장을 향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쟁과 끊임없는 산업 확장으로 인해 빠르게 시대에 뒤처지고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러시아 역시 이러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러시아의 낡은 사회 구조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 더욱 붕괴될 것이고, 이는 혁명의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세계적 과정은 러시아에서 정치적 격변을 초래한다. 이는 다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치 발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 것이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혁명의 전위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N. Parvus, Rossiya y revolyutsiya (St Petersburg, 1906) p. 133, quoted in A. Zeman and W. Scharlau, The Merchant of Revolution (London, 1965) p. 64.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취약성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유일한 진정한 혁명 세력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즉각적인 노동자 정부 수립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파르부스는 ‘나를 사회 혁명의 문제로 더 가깝게 이끌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을 천문학적인 “최종” 목표에서 우리 시대의 실천적 과제로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1905년 혁명의 사건들 속에서 이를 확인했으며, 자신이 직접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이론적 틀을 구축했다.

이 이론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결합적이며 불균등한 발전이라는 사회경제적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정치적 대응 개념인 영구 혁명이었다. 이 두 가지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사회주의 혁명 전망을 가장 급진적으로 재정립한 시도이거나, 최소한 수정한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사회경제적 분석은 러시아의 후진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러시아 사회 발전의 주요 특징은 상대적인 원시성과 느린 발전 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특정한 내부 경제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 러시아 사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회-역사적 환경의 영향, 심지어 압력 아래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경제 발전의 여러 단계를 건너뛸 수 있었지만, 이는 특이한 사회 구조를 초래했다. 즉, 중앙집권적인 전제 정부, 귀족적 특권, 광대한 농민 계층이 존재하는 한편, 고도로 발전한 산업과 결속력 있는 소규모 노동 계급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중간 계층과 같은 완충 요소 없이 구체제와 신체제가 결합된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트로츠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사회 발전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행정적, 군사적, 재정적 권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러한 권력이 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만이 유일한 출구가 되도록 만들었다. 더 나아가, 절대주의의 강대한 권력이 국민과의 사이에 깊은 심연을 파놓을수록, 이 혁명은 더욱 급진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L. Trotsky,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3rd edn (New York, 1969) p. 44.


훗날 ‘영구 혁명’ 이론으로 알려지게 된 사상은 이러한 분석에서 비롯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그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대규모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소규모 기업의 노동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산업은 규모가 크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서구와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진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자본주의적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지도 않았다. 노동계급은 다른 몇몇 나라보다 산업을 마비시키고 도시 중심지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선진국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 정치적으로 미약한 자본가 계급, 그리고 강력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동시에 갖춘 국가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강력한 계급인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전국적인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을 떠맡게 되었다’는 카우츠키의 말을 인용했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점점 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혁명적 정부가 사회주의 다수를 가진 채로 권력을 이양받는 즉시, 우리의 프로그램을 최대 강령과 최소 강령으로 나누는 것은 원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한계 내에 스스로를 가둘 수 없다.> L. Trotsky,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3rd edn (New York, 1969) p. 78.


그러므로,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어떤 특별한 형태, 즉 민주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또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에 대해 논할 수 없다. 노동 계급은 민주적 강령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재의 민주적 성격을 유지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어떤 환상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사회민주주의를 처음부터 타협시키게 될 것이다.> L. Trotsky,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3rd edn (New York, 1969) p. 80.


이것은 '중단 없는 혁명의 이념 … 절대주의와 봉건주의의 청산을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짓는 이념'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적 조치들은 (특히 불균등하고 뒤처진 사회 구조를 고려할 때) 매우 강한 내부의 반대를 초래할 것이며, 외부의 지원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게 될 것이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 없이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일시적인 지배를 지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할 수 없다.> L. Trotsky,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3rd edn (New York, 1969) p. 105.


물론 그의 말대로 바로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이후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원은 전혀 오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레닌이 뇌졸중으로 물러났다가 서거하여 스탈린이 집권하자, 한때 붉은 군대의 지도자였던 트로츠키 자신의 신변 역시 더 이상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스탈린



스탈린의 혁신은 모든 것을 (볼셰비키주의의 국제적 차원과 당의 구조까지 포함하여) 농업 부문을 희생시켜 급속한 중공업화 목표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러시아의 생산량이 연간 거의 20퍼센트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한 ‘초산업화론자들’인 트로츠키 등을 비웃었다. 그러나 1929년 중반에 자본 투자의 할당은 갑자기 5배나 증가했으며, 대규모 농업 집단화로 나아가기로 결정되었다.

당면한 위기에 대한 긴급한 조치가 필요했고, 정치국은 분열되었다. 부하린은 미국 모델을 기반으로 한 농업 확장을 통해 진행되는 NEP, 즉 신경제정책(그리고 반트로츠키주의) 정통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1928년 1월, 부농kulak들로부터 그들의 잉여물을 빼앗기 위한 처벌적인 임시 조치를 승인했다. 사실, 이러한 조치들은 스탈린의 통제 하에 당 기구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정치국의 결정이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고, 동시에 나중에 ‘과잉’에 대해 불평할 수 있었다.


당을 장악한 스탈린은 이제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1928년 내내 곡물 공급 문제는 계속되었고, 1928년 여름에 그는 여전히 농촌에서의 계급투쟁과 부농들에 대한 몰수를 거부했지만(첫 번째 5개년 계획은 1933년까지 농업의 20%만 집단화할 것을 규정했음), 1929년 하반기 동안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 그의 ‘상부로부터의 혁명’의 조짐을 드러냈다. 결정은 점점 더 스탈린 혼자서 내리게 되었고, 농민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반우익 캠페인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집단화 캠페인에서 정부가 직면한 분명한 어려움을 반영하기 위해 ‘인격 숭배’가 강화되었다. 코민테른에서도, 트로츠키가 이전에 강하게 비판했던 비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과의 동맹 정책은 폐기되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적 파시스트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파시스트들보다 더 큰 적으로 여겨졌다.

농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확장하기로 한 결정은 신속했으며 그 결과는 참담했지만, 이러한 조치를 위한 전제 조건은 이미 한동안 쌓여왔다. 1929년 내내 도시의 식량 공급은 심각한 상태였고, 이는 광범위한 불안을 야기했다. 농민들이 정부의 요구에 반대하면서 농업 가격은 상승했다. 예를 들어, 할당량을 이행할 수 없거나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제조된 제품 공급을 차단하는 엄격한 조치는 긴장을 더 악화시켰다. 스탈린이 ‘대전환’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당시 산업 부문, 특히 산업 건설 부문에서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이에 비해 고집 센 사유지와 비교해 작은 집단화된 농업 부문에서의 곡물 공급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스탈린은 사회주의가 접근함에 따라 계급투쟁이 심화된다고 강조했다. 보다 실용적으로, 그는 산업화의 취약한 추진력을 농업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고 느꼈다. 농민들을 외부의 장벽으로 보는 오래된 볼셰비키들의 불신은 여전히 강했고,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 정책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이 쉬웠다. 농업의 집단화로, 중공업 발전에 중점을 둔 계획 경제의 틀이 확립되었다.

스탈린의 정책이 당에 미친 영향도 마찬가지로 극단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에 대한 정치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당은 부하린주의자들의 축출로 약화되었지만,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의 좌회전을 지지하기 위해 다시 유인되었다. 1934년 말 키로프Sergei Kirov의 암살은 숙청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지노비예프Grigory Zinoviev와 카멘예프Lev Kamenev는 정치적 반대 이유로 첫 번째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1938년 부하린의 재판을 정점으로 한 대규모 공개 재판은 대체 정부의 가능성을 사실상 지워버렸다. 도이쳐Isaac Deutsch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재판에서 피고석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제외한 모든 레닌의 정치국 멤버들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요 피고였다. 그들 중에는 또한 한 명의 전 총리, 여러 명의 부총리, 두 명의 전 공산주의 국제 총무, 노동조합 총수(재판 전에 자살한 톰스키), 총참모장, 군 정치 담당 최고사령관, 모든 중요한 군사 구역의 최고 사령관들, 유럽과 아시아의 거의 모든 소련 대사들이,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두 명의 정치 경찰 총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I. Deutscher, Stalin: A Political Biography (Harmondsworth, 1966) pp. 368f.


정부 인사는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새로워졌다. 약 300만명이 사망했고, 1934년 당대회 대리인의 3%만이 1939년에 다시 나타났으며, 1934년에 선출된 중앙위원회 멤버들 중 70%는 처형되었다. 새로운 관리자들이 숙청으로 비워진 자리를 채웠고, 1936년의 새로운 '민주적' 헌법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허울들은 무시되었다. 스탈린의 집권 기간 동안 당대회는 총 네 번만 열렸고, 국제공산주의대회(코민테른)는 세 번만 열렸다.


스탈린이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매우 섬세한 사고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온화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널리 퍼진 마르크스 이론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왔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이 그것이다. 스탈린주의 이론을 요약한 주요 문서는 1938년에 발간된 《소련공산당 역사(볼셰비키): 간략한 강의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Bolshevik): Short Course》로, 이는 거의 20년간 공산주의 이론의 주요 권위로 여겨졌다. 이 역사서에는 여러 가지 혁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엥겔스의 순서를 반대로 하여 스탈린은 철학보다 변증법적 방법을 먼저 논의했다. 엥겔스의 후기 저작과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크게 의존하면서, 변증법적 방법(스탈린은 이를 형이상학과 대조시켰다)은 모든 자연 현상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모든 현상이 운동 상태에 있으며, 운동은 갑작스러울 수 있고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는 견해로 정의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이는 관념론과 대조되었다)의 주요 특징은 세상이 본래적으로 물질적이며, 물질은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요 객관적 현실이고, 정신은 물질의 2차적 반영이며, 세계와 그 법칙들은 완전히 인식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스탈린이 엥겔스의 변증법 법칙을 두 가지로 줄였다는 것이다. 그는 대립의 상호 침투와 양이 질로 변하는 것을 언급했지만, 부정의 부정 법칙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 법칙의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적 유물론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후자를 다룰 때, 스탈린은 관념의 역할에 대해 그것의 기원으로 축소할 수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새로운 관념은 적절한 물질적 발전을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이들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역사 속에서 이들 요소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 이들은 사회의 물질적 삶의 발전에 의해 설정된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는 데 중요한 힘이 되며,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는 힘이 된다.> J. Stalin, History of the CPSU: Short Course (Moscow, 1943) p. 116.


관념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1939년 스탈린의 선언에서 한층 더 관철된다.


<소련에서 노동자, 농민, 지식인 간의 공동의 이익은 소련 사회의 도덕적·정치적 통합, 소련 내 민족들의 상호 우정, 그리고 소련 애국주의와 같은 동기적 힘들의 발전의 기초를 형성해왔다.> The Essential Stalin, ed. B. Franklin (New York, 1972) p. 367.


소련에 관하여, 스탈린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부농들에 대한 수탈에 관해 스탈린은 “이 혁명의 특징은 그것이 위에서,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아래로부터는 수백만 명의 농민들에 의해 직접 지원되었다는 점”이라고 썼다. 또한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도입되면서, 계급은 계속 존재했지만, 그들은 ‘비적대적’으로 정의되었으며, 그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계급을 억압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국가 안의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원칙은 국가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은 국가가 공산주의 시대(소련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포위가 해소되지 않고, 외국의 군사적 공격의 위험이 제거되지 않는 한" 국가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후, 철학적 질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광범위한 ‘철학적 토론’이 일어났으며, 이는 알렉산드로프Georgy Aleksandrov의 『서유럽 철학의 역사History of Western European Philosophy』가 지나치게 ‘객관주의적’이라며 비판으로 끝났다. 이는 대부분 즈다노프Andrei Zhdanov의 주도로, 그는 스탈린의 모든 지적 문제에 대한 대변인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유전학에 대한 멘델주의를 반대하는 리센코Trofim Lysenko의 견해를 지지하며 개인적으로 개입했고, 이는 이후 학문적 영역에서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혁신 중 가장 눈에 띄는 예는 1950년에 일어난 언어학 논쟁에서 그가 소련의 가장 저명한 언어학 이론가인 마르Nikolai Marr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마르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의 일부이며, 언어 체계 간에 계급 발전과 연관된 질적 차이가 뚜렷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했다.


<사고가 언어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고, 계속해서 우위를 점할 것이다. 새로운 무계급 사회에서는 말로 된 언어 체계가 폐지될 뿐만 아니라, 단일한 언어가 창조될 것이다. 이는 이후에는 몸짓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말로 된 언어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Quoted in G. Wetter, Dialectical Materialism (London, 1958) p. 196. For by far the most original Soviet contribution to linguistics, written in 1929, see V. Volosinov,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New York, 1973).


반대로, 스탈린은 언어가 특정 계급이 아닌 전체 인민의 창조물이며, 언어는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는 마르가 관념주의자라고 주장했으며, 언어는 결코 사고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더 넓게 보면, 스탈린은 관념의 상대적 독립성에 대한 논의를 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했다.


<기반은 바로 그것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그것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며, 낡고 죽어가는 기반과 그에 따른 낡은 상부구조를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수 있도록 상부구조를 창출한다.> The Essential Stalin, p. 408f.


그는 비대립적 계급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반복하며, 사실상 소련에 양과 질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부정했다.


<이런 폭발에 대한 열망이 있는 동지들을 위해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폭발을 통한 오래된 양에서 새로운 양으로의 전이 법칙은 언어의 발전 역사뿐만 아니라 일부 기초적이거나 상부구조적인 사회적 현상에도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적대적인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에는 필수적이지만, 적대적인 계급이 없는 사회에는 전혀 필수적이지 않다.> Ibid., p. 425.


특히,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언어를 기초 위의 상부구조로 볼 수 없다"며 "언어와 상부구조를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선언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정확성이 그것이 표현된 시기에 한정된다는 견해을 전개했다. 스탈린의 일부 이론이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공식은 사회 발전의 두 다른 시대에 해당하며, 바로 이 때문에 두 공식은 각각 그 시대에 맞게 올바른 것이다. 이 두 공식이 서로 모순되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서로 배타적이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지배 시대와 사회주의의 지배 시대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와 같다.> Ibid., p. 443f.


이론적 혁신과 스탈린주의 정치 실천 사이의 상관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의 출현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원래의 사고를 억제했지만, 하나의 매우 독창적인 기여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트로츠키의 소련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는 그의 파시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과 함께 망명 중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스탈린이 1920년대 이후 트로츠키(혹은 정확히 말하면 프레오브라젠스키Yevgeni Preobrazhensky)가 지지했던 여러 견해를 차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하린은 심지어 스탈린의 정책을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항복’이라고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경제적 고립주의’나 서구 혁명을 저평가하는 그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또는 민족화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그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따라서 소련을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의 분석의 중심에는 마르크스가 여러 번 언급한 관료제 현상이 있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치적 및 행정적 조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암시한 것과 달리, 트로츠키는 관료제가 러시아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후진성의 산물이었다. 그의 주요 저작인 『배신당한 혁명The Revolution Betrayed』에 그는 이렇게 썼다.


<관료주의적 지배의 기초는 소비 재화의 부족과 그로 인한 각자 모두가 서로 싸우는 상태에 있다. 상점에 물건이 충분히 있을 때는 구매자들이 언제든지 올 수 있다. 물건이 적을 때는 구매자들이 줄을 서야 한다. 줄이 매우 길어지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을 배치해야 한다. 이것이 소련 관료주의의 권력의 출발점이다.> L.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 (London, 1937) p. 110.


그러나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관료주의의 등장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트로츠키에 의해 명확하게 답변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소련 사회에 대한 설명에서, 국유화된 재산을 사회적 재산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 재산의 과도기적 형태가 사라질 때만 존재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소유권의 변화는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었으며, 특히 우수 노동자Stakhanovite들에 대한 대규모 임금 차별과 관료적 계층 구조가 동반될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배신당한 혁명』의 중요한 9장에서는 트로츠키가 이 설명을 거부했다. 관료주의는 새로운 계급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고, 자본가들처럼 그들의 재산을 축적하여 후세로 넘기지도 않았다. 관료들은 임용되므로 경제 구조에서 독립적인 재산 뿌리가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계급 착취의 예시가 아니라 사회적 기생주의의 예시였다.

그렇다면 소련 정권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트로츠키에 의하면, 그것은 생산력의 사회화가 증가하는 것과 분배에서 점점 더 부르주아적 규범이 강화되는 것 사이의 모순으로 특징지어졌다. 따라서 그것은 과도기 사회였지만, 반드시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도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즉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것이었다. 관료주의의 장기적인 지배는 자본주의의 복원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배신당한 혁명』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유사성이었으며, 트로츠키는 자코뱅의 최종 몰락을 나타내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의 등장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던 테르미도르의 러시아에서의 재현을 찾으려 했다. 1920년대 후반, 그는 부하린과 우파 반대파로부터 테르미도르의 위험이 온다고 보았으며, 당시 그는 프랑스 테르미도르를 부르주아지의 복원으로 해석했다. 스탈린의 부상은 계급 간 권력의 이전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에 맞춰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러시아의 보나파르트라 부르기로 했으며, 1934-5년, 키로프 암살 이후에는 테르미도르가 혁명운동 내에서 부르주아지 대중에서 소수의 부유한 계층으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라고 보았다. 소련의 유사점은 1924년 이후 프롤레타리아 대중에서 관료주의와 노동자 귀족 계층으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었다. 이는 반혁명이 아니라 혁명 내의 반응이었다. '하나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는 관료주의 지배로 이어진 테르미도르의 원칙이었다. 바로 이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티즘과의 유사성을 그렸다.


<테르미도르의 정책을 더욱 발전시킨 나폴레옹은 봉건 세계뿐만 아니라 ‘폭도’와 소규모 및 중산층 부르주아지의 민주적 세력과도 싸움을 벌였다. 이렇게 그는 혁명에서 태어난 정권의 결실을 새로운 부르주아 귀족 계층의 손에 집중시켰다. 스탈린은 10월 혁명의 성과를 봉건-부르주아 반혁명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주장, 그들의 초조함과 불만에 대해서도 보호한다. 그는 특권이 없는 노동자 계층의 질서 있고 진보적인 역사적 경향을 표현하는 좌파를 억압한다. 그는 임금, 특권, 계급 등에서 극단적인 차별화를 통해 새로운 귀족 계층을 만든다. 새로운 사회적 계층 구조에서 가장 높은 계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가장 낮은 계층을 압박하면서 — 때로는 그 반대 — 스탈린은 권력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집중시켰다. 이 정권을 소련 =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The Workers’ State, Thermidor and Bonapartism’, Writings of Leon Trotsky, 1934-35 (New York, 1971) p. 181.


파시즘의 보나파르티즘과의 강한 유사점은 모두 정치가 권력의 의인화를 통해 사회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한 위기 정권이라는 점에서 나타났다. 트로츠키에게 중요한 차이점은 스탈린주의가 젊은 계급의 볼셰비키 보나파르티즘이었다는 점이고, 파시즘은 늙고 죽어가는 계급의 보나파르티즘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소련과 결별하지 않았다. 그에게 소련은 여전히 어떤 면에서 혁명의 나라였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소련만이 사회주의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국유화된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였고, 퇴화된 상태였고 정치적 혁명이 필요했지만, 사회적 혁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또한 소련이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에서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좌우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트로츠키가 1934년에 스탈린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설립한 제4인터내셔널 내의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반대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탈린을 소련과 쉽게 분리할 수 없었고, 10월 혁명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견해는 제4인터내셔널의 미국 지부에서 특히 널리 퍼졌는데,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과 맥스 샤흐트만Max Schachtman과 같은 작가들이 소련의 관료주의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하는 세계적인 관료주의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자신도 이러한 생각에 영향을 받았고, 생애 끝자락에서 소련을 위한 세 번째 대안을 구상했다. 다가오는 시대가 사회 혁명의 시대인지 아니면 전체주의적 관료주의로의 쇠퇴인지를 묻는 질문을 제기하며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의 모든 시대 경험과 현재의 새로운 전쟁의 결과로 사회의 주인이 되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모든 희망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한 더 유리한 조건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The USSR in War’, in L. Trotsky, In Defense of Marxism (New York, 1973) p. 15.


그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될 수 없는 선천적인 무능"과 "현재의 소련이 국제적 규모에서 새로운 착취 체제의 선구자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의 상승 이유가 1917년 볼셰비키의 성공을 이끈 이유 — 즉, 러시아의 사회적 제도와 경제적 기초의 빈곤, 그로 인한 급진적인 조치와 계획된 산업 확장이 권력을 집중시키고 관료제를 증가시킨 정치의 고립 상태 — 일 수도 있다는 점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추측은 트로츠키 사상의 주요 주제를 대표하지 않았으며 (그는 그것들을 확대 해석하는 이들을 화가 나서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론이 그의 생애 말기에 얼마나 실험적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치며



21세기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실패한 사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젝Slavoj Žižek 같은 현대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 사상가조차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고착된 자본주의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위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기보단 수많은 시사 이슈와 예술 작품들을 변증법적으로 독해하며 인식의 틀을 깨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것이 그저 학자연한 행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약자인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pity이었다. pity의 어원은 라틴어 pietas로 여기에는 신앙심, 신의 정의, 그리고 자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란 말까지 하며 신앙을 포함한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그의 사상의 기저에는 이미 반드시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신화적인 구원이 있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스탈린도, 그 외 수많은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공산주의 사상가들도 처음 마르크스의 사상을 접했을 땐 그러한 점에 공감하며 이후 평생을 투신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양 진영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냉전 체제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근대성 획득의 유예(여기엔 기근이나 숙청으로 인한 무수한 인명 손실도 포함된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철학의 실천이 실패로 끝난 것을 그들의 최초의 연민까지 없었으면 좋았을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사적으로는 부르주아 출신이었으며 평생 자신을 후원해 준 엥겔스에게조차 무례하고 냉담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진심을 변조시키는 요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신앙(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일수도 있고 열정과 광기의 근간이 되는 단순한 혹은 복잡한 관념일 수도 있다)을 철학에 담는 족속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학자는 자신의 신앙을 학문에 담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앙이 밖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해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은 버려야 할 것도 아니거니와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싯적에 내가 철학을 진심으로 대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 기인했다. 그곳엔 진리는 없을지언정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세상이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장 내일 세상의 모든 철학이 사라지더라도 좌절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배운 진리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가감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세계 속에서 내게 허락된 사태를 담대히 맞이할 것이다. 내 안의 pietas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 계기를 제공해 주신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신의식 교수께 감사드린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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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Trotsky, Nashi Politicheskye Zadachi (Geneva, 1904) p, 54, quoted in B. Knei-Paz, op. cit., p. 197.

L. Trotsky, op. cit.,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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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d in G. Wetter, Dialectical Materialism (London, 1958) p. 196. For by far the most original Soviet contribution to linguistics, written in 1929, see V. Volosinov,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New York,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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