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도 선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도덕~
오늘 퇴근길에 우연히 딸이 하교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았습니다. 딸의 옆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눈이 작고 뚱뚱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딸보다 옆의 아이가 계속 말을 이어가고, 딸은 말없이 이따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딸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며 “그런 친구가 있으면 집에 한번 데려오기라도 하지.” 라 말하자, 딸은 “미쳤어? 내가 왜?” 라 정색했습니다. 뒤이어 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는 제 귀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 여사님. 척 봐도 끕이 다르잖아, 끕이. 진지하게 걔랑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너는 왜 그 애랑 같이 다니는 건데?” 저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애한테 다가가는 것만으로 내 이미지가 좋아진다면 해볼 만하지 않아? 걔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고.”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느니, ‘네가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것 같냐’느니 하는 도덕적인 격률에 의거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저 스스로도 저를 둘러싼 숱한 관계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딸도 저도 위선자입니다. 사실 그런 위선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혹자는 ‘실천하는 위선은 선’이란 주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모두가 알고 있듯 위선과 선은 명백히 다른 개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위선은 위선일 뿐입니다. 그것이 당장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거나 유익을 줬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그것이 위선이라는 성찰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남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양심에 대한 아포리아일 뿐이죠.
…라고 끝맺으면 너무 무신경하고 무책임하니, 잠깐 윤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윤리는 인간 행동에 대한 도덕원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덕virtue과 부덕vice 등에 관여합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윤리학에서는 덕 윤리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덕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모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에서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옳은지는 보편적 규칙이나 원칙을 통해 이해되는 게 아닌 오히려 도덕적 사고, 욕구, 행위의 좋은 습관과 결부되어 있는 감수성 내지 세련된 식견의 문제라 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국가관 내지 세계관과도 연관이 있는데요, 그들은 도덕적 이상을 그들이 속한 폴리스 차원에서 추구하였고, 폴리스의 좋은 시민이 되는 것 즉 시민의 덕을 함양하는 것을 젊은이들의 교육 목표로 삼았습니다.
<국가(폴리스)가 본래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각 개인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자족적이지 않다면, 그는 전체 국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마치 부분들이 그 전체에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이러한 사회체제 속에 들어갈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족적이라면, 그는 국가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는 짐승이거나 신神임에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中
즉 폴리스가 그들이 상정한 도덕 공동체의 범위였습니다. 사회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이 생물학적 본성 상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규모는 소규모집단 정도라고 합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철학자들이 상정한 도덕의 임계선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죠.
역사 시대에 접어들며 인간의 집단생활은 그 규모가 커지고 그에 걸맞은 이타적 감정이 요구되었음에도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이를 뒤따르지 못해 괴리가 생겼고, 인간의 윤리 체계는 바로 이러한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사회적 장치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집단적 이성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는 개별적 행위자나 집단의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기에 ‘원리’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도덕적 감수성이 미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적용되어야 하기에 ‘의무’ 의식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그런 신념을 기저에 둔 보편적 윤리를 추구한 대표 주자인 칸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칸트 하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정언 명령’이 있습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도덕 법칙, 바꿔 말하면 ‘목적으로서의 도덕’이지요. 그에 따르면 따님이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급우와 어울린 것은 이에 위배됩니다.
칸트는 타인의 행복을 배려하는 것을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의무’로 규정하는 반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직접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은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특별히 의무로서 부과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의무이다. 왜냐하면 많은 걱정에 싸여 있고 또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의 와중에 있는 자기의 처지에 대한 만족의 결여는 자칫 의무를 위반하려는 커다란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에 주목하지 않고서도 모든 인간은 스스로 행복을 향한 극히 강렬하고도 열렬한 경향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모든 경향성은 바로 이 행복이라는 관념에 수렴되어 있기 때문이다.> 칸트 『유작』 中
칸트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선의지’ 뿐이라고 말합니다. 선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에 의해서나 어떤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해서가 아니라 그 의욕만으로 즉 그 자체만으로 선한 것입니다.
의지가 선한들 그 실현은 현실적 조건에 막혀 원래 목적에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의존하기에 순전히 행위자의 의지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으며, 그가 완전히 예견할 수는 없는 힘의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도덕성은 오로지 행위 주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즉 행위자에게 가능한 것하고만 관련되므로, 객관적으로 관찰된 결과는 도덕성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도덕성은 행위 자체가 아닌 행위의 의지, 행위의 준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제 다시 덕 윤리로 돌아가 볼까요. 사실 덕 윤리는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게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전통적으로 강조되고 지켜져 온 윤리의 전형이자,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윤리 그 자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덕 윤리는 도덕 법칙, 규칙, 원리보다는 유덕한 개인들, 그들을 유덕하다 규정짓게 하는 내적 특성, 성향, 동기에 주목합니다. 한마디로 행위보다는 행위자에 주목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어쨌든 따님은 소외된 급우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그가 학창 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는 데 일조했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지요.
덕 윤리의 옹호자들이 볼 때 공리주의나 칸트주의는 윤리를 단일한 제1원리에 근거지우려는 폭력적인 교조로 보입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의 도덕적 삶은 풍부하고 또 복잡하니까요.
위에도 말했지만 우리의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미치는 범위는 대개 소규모 공동체 정도입니다. 공리주의나 칸트주의 같은 높은 수준의 보편주의를 표방하는 윤리는 냉정히 말해 아직은 이성적 추론의 산물이자 이상理想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나랑 친한 학교 친구와 저어기 아프리카 전쟁고아에게 똑같이 도덕적 의무를 다할 수 있다.” 고 말하는 사람은 위선자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아니면 순진하거나 바보고요.
<공평한 합리성에만 호소하는 윤리는 공평한 합리주의자들만이 따를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을 위한 윤리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거나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기준에 입각해 만들어져야 한다. 만약 진화로 인해 사람들이 인간 일반보다 도움을 준 사람과 혈연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선을 도모하라는 권고는 선천적인 인간 본성을 무시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피터 싱어 『실천윤리』 中
하지만 그렇다고 덕 윤리가 기존의 근대 윤리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이미 보편 윤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집단생활의 규모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기후, 식량, 에너지, 환경, 핵 문제 등은 전 지구적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근대 윤리학과 덕 윤리학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끕’이 다른 급우에게 친근감을 표하고 온정을 베풀어 그에 대한 소산으로서 이미지 향상을 노리는 건 사실 반드시 인과적인 수순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따님이 오래 전부터 꾸준히 행동원칙을 고수해 온 게 아니라면, 그러한 모습을 보고 순순히 ‘쟤 참 다정하고 따스한 애네’라 생각해 줄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순진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선 ‘실천하는 위선은 선’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어떤 면에선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실천을 유지하려면 중용이 필요하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도 질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위선적으로 사는 것도 딱히 만만한 일만은 아니겠죠? 환멸하실 것도, 힐책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저 부모로서 끝까지 따님이 가는 길을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