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호색시Erotic Poems』서문

괴테의 호색시들을 관통하는 욕망과 열정

by Youngh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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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1988년,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Oxford의 저명한 독문학자 겸 번역가 데이비드 루크David Luke는 괴테의 대표적인 호색시인 『로마 비가Romische Elegian』,『베네치아 경구Venezianischen Epigrammen』 그리고 『일기Das Tagebuch』를 추신과 메모를 곁들여 번역했고, 독일학자이자 비교문학자 한스 바겟Hans Rudolf Vaget은 이에 대한 역사적, 문학적 배경을 정리한 서문을 써 독일어-영어판으로 처음 출간했다. 이는 이후 1997년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에서 세계고전문학 기획의 일환으로 『Erotic Poems』란 제목으로 서적화되었다.

이하 본문은 바겟의 서문을 번역한 것이다.





괴테는 생의 말미, 1830년의 젊은 시인들에게 남긴 짧은 성명에서 자신을 그들의 ‘해방자’라고 표현했다. 이 노(老)시인이 자부심을 담아 스스로를 그렇게 묘사한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그 근거는 그의 호색erotic 시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사실상 그의 모든 커리어에서 ─ 바이마르 고전주의처럼 단순히 복원적인 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보일 때조차 ─ 괴테의 시는 새로운 지평을 끊임없이 열어 나갔다. 그는 훗날 ‘타고난 천재’라는 복음을 부정하고 『파우스트Faust』에서 그것을 풍자했지만, 시인으로서의 괴테는 끝까지 혁신에 헌신하였다. 이는 특히 그가 전통에 경의를 표하는 듯한 방식으로 고대의 규범적 모델들과 교섭하고 그것을 변형시킨 순간들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로마 비가Roman Elegies』가 대표적 예다.

괴테가 독일과 유럽 문학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1770년대 초반, ‘독창성’이라는 이상은 프랑스와 특히 영국으로부터 독일어권에 유입된 새로운 미학 사조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강력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슈트라스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시기에 집필된 그의 초기 작품들—특히 비극적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은 이러한 독창성의 기치를 정당화하며, 젊은 세대가 문학적·사회적 권위의 규범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도록 고무하였다. 따라서 ‘질풍노도(Sturm und Drang)’로 알려진 이 작가 집단이 괴테를 정신적 지도자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공식적이며 짧은 기간에 머문 이 연대連帶는 괴테의 전 생애에 걸친 문학적 생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남겼다.

겉보기에 괴테의 질풍노도 시기는 성숙기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탈피’ 과정, 즉 그가 자주 사용하던 비유로 말하자면 인격의 유기적 성장 속에서 벗어던져야 할 ‘허물’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면밀한 독자는 곧 깨닫게 된다. 괴테의 모든 시적 생산은 그의 초기 돌파기의 미학적 감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감수성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범(汎) 에로틱pan-erotic’일 것이다. 창조적 인격의 생동하는 핵심에서, 이 변화무쌍한 시인은 ‘젊은 베르테르’—자신의 초기이자 아마도 가장 진실한 자기 투영—에게 충실한 채, 그 이름에 수반된 열병과 황홀을 훌쩍 넘긴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생의 말기, 그가 ‘정열 삼부작Trilogie der Leidenschaft’이라 부르는 『마리엔바트 삼부작Marienbad triptych』(1823/4)의 서문시인 「베르테르에게」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 감수성의 은밀한 연속성을 아쉬운 듯 인정한다:


Dann zog uns wieder ungewisse Bahn

Der Leidenschaften labyrinthisch an.

그리고 다시금, 불확실한 열정의 길이

우리를 미로처럼 얽힌 길로 이끌었네.


그러나 우리는 이 「베르테르에게」의 슬픈 목소리에 지나치게 전기傳記적 진실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실상 괴테는 베르테르와 그가 상징하는 것의 귀환을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특히 실러가 죽은 1805년 이후부터 분명히—자신의 젊은 시절 창작 에너지를 회복하려는 회상과 적극적인 기억의 프로젝트에 점점 더 몰두하였다. 1809년에 시작한 자서전은 이 작업의 가장 눈에 띄는 일부일 뿐이다. 괴테는 아마도 말년의 정교하고 섬세한 시적 기법이 초기 시에 담긴 에로틱한 생명력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나이든 괴테에게는 ‘되풀이된 사춘기’(‘wiederholte Pubertät’)가 생물학적 상상이자 문학적 환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강력한 환상이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기억의 창조적 힘을 주제로 삼은 시 『일기Das Tagebuch』는 단순한 에로틱 모험담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괴테는 독일 시를 무엇으로부터 해방시켰는가? 그가 해방자의 칭호를 주장한 짧은 에세이는 그것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굴레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대신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이제 시가 탐색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곧 자기를 표현할 자유—를 상기시킨다. 그는 단언한다. ‘사람이 내면으로부터 살아야 하듯, 예술가는 표현함으로써 ─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 오직 자기 고유의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나를 통해 자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괴테가 동료 시인들에게 남긴 이 마지막 말은 아주 본질적인 지점을 짚고 있다. 이는 괴테와 독일 시문학이 ‘사춘기’를 겪고 있던 바로 그 역사적 순간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즉, 시인의 고유한 사명은 세계를 자기만의 진정한 목소리로 표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1832년에 괴테가 남긴 이 발언은 단지 젊은 시인들을 위한 조언으로 읽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의미 있게는, 자신의 전체 시적 작업을 정당화하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이토록 확신에 차서 시를 자아 표현과 자아 탐색의 도구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는 자아 탐색을 정당화하고 장려하는 시대의 문턱에 서 있었고, 거기서 자아란 완전히 새로운 목적의식을 부여받았다. 계몽주의는 ‘질풍노도’ 운동에 인간의 자율성과 전체성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유산으로 남겼다. 젊은 괴테에게 이 메시지의 원천은 그의 스승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의 친구이자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던 요한 게오르크 하만Johann Georg Hamann이었다. 약 40년 뒤에 집필된 괴테의 자서전은, 하만이 강조한 인간의 전체성 개념이 자신에게 얼마나 해방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여전히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하만에게 있어 자아란 명백히 성적 존재였으며, 천재성이란 영적 차원과 성적 차원 양쪽 모두에서의 창조성을 뜻했다. 하만은 특유의 직설적 언어로 『소크라테스 회상록Socratic Memorabilia』(1759)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생식기가 없는 천재는 천재가 아니다.”

괴테는 ‘인간성(Humanität)’ 개념에 있어 하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인간 욕망의 본질과 힘에 대한 자각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독일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도 그보다 더 큰 기여를 한 시인은 없다. 그의 작품은 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으며, 그 범주는 양성성, 동성애적 정서, 근친애, 나르시시즘, 물상 숭배에까지 이른다. 프로이트가—다른 차원의 해방자이긴 하지만—괴테를 자신의 주요 사례로 삼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를 신화적인 선구자로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프로이트가 독일 문학적 상상력의 예시들에 의존한 만큼, “프로이트는 괴테를 정신분석학의 씨앗이자 원천으로 인식했다”는 것—그리고 그 ‘부성(父性)’이 수반하는 모든 양가적 역학과 함께.

괴테가 에로틱 시의 시인으로서 명성을 쌓았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의’ 그의 에로틱 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다. 이 상황은 모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오늘날의 독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두 번째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의 에로틱한 자유로움, 『파우스트』에서의 정교한 에로스의 신격화, 그리고 독일어권에서 가장 지속적인 연애시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의 정서화된 에로티시즘을 찬탄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괴테의 노골적인 성적 시편들—‘진정한, 벌거벗은 사랑’을 노래한 시들(「비가 III」의 ‘den echten, nacketen Amor’)—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하고 보편적인 평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로마 비가』뿐 아니라 다수의 「베네치아 경구Venetian Epigrams」, 그리고 이 계열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일기』를 포함한다. 물론 『로마 비가』는 현재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E. M. 윌킨슨의 다음과 같은 평가에 동의할 것이다. “형상미의 아름다움과 거리낌 없는 감각성, 에로틱한 섬세함과 문화 유산에 대한 고양된 의식의 결합—이러한 이교적이면서도 고도로 세련된 시편들은 어떤 현대 언어에서도 유일무이하다.” 그럼에도 괴테의 로마 연작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완전한 형태와 원래의 구성대로 대중에게 제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실로 기이하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를 축약된 형태로만 알고 있다. 이는 「베네치아 경구」도 마찬가지이며, 괴테의 가장 대담하고 심오한 에로틱 시인 『일기』는 거의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이처럼 모순된 상황에서 도출할 수 있는 여러 결론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문학적 및 사회적 관습의 힘에 대한 교훈일 것이다. 그 힘은 괴테 스스로가 보인 외교적인, 그러나 마지못한 자기검열에서 드러나며, (그보다 훨씬 정당성이 부족한) 괴테 연구자들이 『일기』 및 『로마 비가』와 「베네치아 경구」의 삭제된 부분을 그의 정전(canon)으로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거부해 온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완강한 왜곡을 초래한 명백한 도덕적·사회적 이유 외에도, 이는 궁극적으로 괴테의 에로틱 문학이 지닌 혁신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일기』는 18세기 구시대의 에로틱 시 형식과 너무나 대담하게 단절하고 있었기에, 최근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소수의 독자들만이 이를 높이 평가해왔다. 괴테의 에로틱 시는 여러 측면에서 H. R. 야우스(H. R. Jauss)가 ‘기대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이라 부른 것을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점은, 오랜 세월 동안 에로틱 시를 지배해온 강력한 관습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고전 로마 문학에서 에로틱 시는 유명한 ‘사랑의 다섯 단계(quinque lineae amoris)’—즉 ‘visus’(응시), ‘allocutio’(말걸기), ‘tactus’(접촉), ‘basium’(입맞춤), ‘coitus’(성관계)—를 다루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서구의 연애시는 이 다섯 단계 중 많아야 네 단계까지만 묘사하는 데에 그쳐야 했다. 그러나 괴테는 『로마 비가』와 『일기』에서 이 다섯 단계를 모두 노골적이고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서구 문학의 가장 강력한 금기를 정면으로 위반한 셈이었다.

성적 사랑을 전면적으로 찬미한 『로마 비가』와, 그와 정반대의 주제인 성적 실패를 다룬 듯한 『일기』가 사실상 깊은 연관 속에 있다는 점은 지금까지 분명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이 두 주요 텍스트, 그리고 주제적으로 보다 다양성을 띠는 「베네치아 경구」를 하나로 묶는 것은, 현대의 감수성에 기초하여 동시대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에로틱 시를 창조하려는 야심이다. 이 장르의 최초의 시도에서는 필연적으로 고대 로마의 모델들이 출발점이 되어야 했다. 후기 고전기 기독교 유럽에서, 시가 관습의 경계를 넘어 방대한 미지의 영역을 탐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대의 형식과 어조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테는 의식적이며 자의식적으로 카툴루스Catullus, 티불루스Tibullus, 프로페르티우스Propertius라는 고전적 ‘삼두정치’ 시인들을 참조했고(「엘레지 VII」 참조), 자신의 시집을 『Erotica Romana』라 명명함으로써 그들의 문학적 권위 아래에서 보호받고자 했다. 그러나 고전주의자의 외피를 두른 것은 단지 신중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는 전략적 시도이자, 이 현대적 비가에 풍부한 상호텍스트성을 부여함으로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 괴테를 괴롭혀 온 전기적 호기심의 시선으로부터 이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다(「비가 IV」 참조).

이십 년 뒤, 그는 더 큰 도전에 나섰다. 즉, 『로마 비가』에서 성공적으로 실현한 해방적이고 노골적이며 진지한 에로틱 시를 1800년 당시의 현실적 세계 속에—출장, 호텔, 여행 중 만남, 집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라는 요소들과 함께—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가에서보다 더욱 분명하게, 이러한 성적 글쓰기를 동시대의 부르주아 감수성 속에 위치시켰다. 그 감수성은 의무(‘Pflicht’)와 사랑(‘Liebe’)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동요하며, 이는 성에 관한 공식적 법률·종교 담론의 핵심 개념이었다.

괴테가 지향했던 새로운 에로틱 시는 동시대 시인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와 빌헬름 하인제Wilhelm Heinse의 시나 운문소설들과도 달랐으며, 또한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쓴 프랑스 로코코풍의 조작된, 감정적인 시들과도 완전히 결별한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괴테의 이 시도는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하인츠 슐라퍼Heinz Schlaffer는 그의 권위 있는 저서 『뮤사 요코사(Musa iocosa)』(1971)에서 독일의 에로틱 시 역사를 1770년 무렵까지 추적하며, 이후의 시들은 중산층 도덕성과 무관하거나 고전의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에로틱 시는 쾌락에 헌신하는 삶의 방식을 제안하며, 가족적 구속 없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무차별적 연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귀족적인 장르이며, 일과 가족, 기독교 도덕을 중시하는 중산층 감수성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기』는 이 틀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놀랍게도, 슐라퍼는 이 작품을 아예 무시한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선입견에 따르면 존재해서는 안 될 작품이기 때문이다—고전의 영향 없이 창작되었으며, 기독교 도덕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부르주아적 세계 속에 위치한 현대 에로틱 시이기 때문이다.

신마르크스주의 정통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은 진정으로 해방된 감각성을 실천할 수 없었다. 이 관점은 현대 에로틱 시의 대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작업 일지Arbeitsjournale』에서 “독일에는 세련된 감각성의 흔적조차 없다”고 썼다. 서정시에서는 “영적이고 히스테리컬하며 육체와 무관한 노래들”과 “저속한 술집 여자의 노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는 일정한 공적이 있으나,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은 오직 과도한 것만을 묘사할 뿐이다. 중세에는 이 분야를 유지한 것이 성직자뿐이다. 독일 귀족은 쾌락주의에 무능했고, 부르주아는 이상적으로는 금욕적이지만 실제로는 저속했다. 독일 학생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토하는 것밖에 못 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신 뒤, 토하는 대신 성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두 명의 위대한 예외를 인정했다—괴테와 모차르트. 하지만 그조차도 『일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듯하며, 『로마 비가』에 대해서도 자신이 중시했던 요소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물론 괴테는 자신이 현대의 에로시즘 시인으로서 직면한 문제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824년 2월 25일, 그의 비서이자 제자인 에커만Johann Peter Eckermann과의 잘 알려진 대화에서 그는 이러한 문제들 중 일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에커만에게 미발표된 시 두 편을 읽도록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일기』였다. 명백히 사전에 준비된 그 자리에서 괴테는 문학적 관습의 힘과 그것이 시에 끼친 해로운 영향에 대해 일종의 기록 차원에서 일반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커만은 기대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일기』가 본질적으로는 매우 도덕적인 작품이라고 괴테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대중은 그 작품이 지닌 ‘자연주의’와 노골적인 표현 때문에 부도덕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테는 이에 동의하며, 시인들이 당대의 관습으로 인해 가장 훌륭한 작품들조차 자신만을 위해 간직해야 한다고 한탄했고, 이는 대중이 진정한 의미의 ‘정신과 고등 교양’(Geist und höhere Bildung)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시대는 변한다며, 머지않아 시인들이 더 큰 자유로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시간은 기이한 폭군이다. 세기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허용되었던 말을 우리는 더 이상 적절하게 할 수 없고, 1820년대의 영국인은 셰익스피어의 왕성한 동시대인들이 감내했던 것을 견딜 수 없어 오늘날에는 『가정용 셰익스피어』(Family Shakespeare)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많은 자칭 괴테 수호자들이 이 기이한 폭군인 ‘관습’ 앞에 고개를 숙여, 여러 세대의 독자들에게 정확히 그런 식의 ‘가정용 괴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비록 『로마 비가』가 바이마르에서 쓰였지만, 이 시집은 본질적으로 1786년 10월부터 1788년 4월까지 괴테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장기간의 체류에서 탄생한 열매였다. 이 시집의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이 구상된 장소인 ‘로마’를 가리킨다. 실제로 『로마 비가』는 그 장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괴테가 시인으로서 새롭게 탄생하게 된 곳, 곧 이 작품들을 쓸 수 있게 된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실질적으로 재창조한 장소가 바로 로마였기 때문이다.

괴테는 37세 되던 해, 독일을 떠나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상상 속을 차지해 온 나라였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이탈리아 여행의 추억이 그 시작이었다. 여러 현실적인 요인들, 그리고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괴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설적인 ‘예술의 나라’에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충족을 찾기 위해 떠나기로 결단했다. 이 여행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가 되어 있었다. 그는 11년 동안 바이마르의 작은 공국 궁정에서 다양한 사회적·행정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점점 과중해지는 장관직의 책임감에 지치기 시작했고, 열정적이지만 전적으로 플라토닉하고 궁극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샤를로테 폰 슈타인Charlotte von Stein과의 관계 속에서 심리적 긴장감이 커져갔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문학 작업들이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786년 9월 3일 새벽, 그는 후원자인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Duke Karl August의 허락은 받았지만 친구들에게는 아무런 알림 없이 보헤미아의 온천 도시 카를스바트를 홀연히 떠났다. 그는 거의 들뜬 상태로 서둘러 여행을 이어갔고, 마침내 10월 29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1787년 봄에는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네 달간 여행했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열 달을 머물렀다. 바로 이 두 번째 로마 체류 기간 동안 『로마 비가』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토록 널리 회자된 이 여행이 괴테의 삶에서 왜 그렇게 해방적이고 중대한 사건이 되었을까? 괴테가 훗날 남긴 『이탈리아 기행』을 보면, 주로 그가 관찰한 풍경, 과학적 성찰, 건축과 회화에 대한 기쁨, 오랜 세월 갈망했던 ‘고전의 땅’(비가 VII)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환희, 그리고 예술가이자 시인으로서 배운 교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핵심은 훨씬 더 내밀한 것이었다. 로마는 괴테의 성적 해방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그가 이전까지 ‘조루’(ejaculatio praecox)와 같은 성기능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성관계를 하지 못했는지, 혹은 그의 삶에 지배적이던 사회적·도덕적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금욕을 실천해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들을 보면 이탈리아 이후의 괴테는 말과 행동 모두에서 성에 대해 새롭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명확하다. 바이마르로 돌아온 후, 그의 옛 친구들은 그가 ‘관능적’(sinnlich)이 되었고 ‘이교도’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괴테는 놀라울 만큼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자기 치료’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보낸 시간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끊임없이 찬미했던 것이다.

괴테의 로마 정부情婦에 대한 궁금증과 추측은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들을 종합해 보면, 그녀는 한 젊은 미망인(비가 Ⅷ 참조)으로, ‘첩(mantenuta)’이라는 명확한 역할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그 관계에 품었던 태도는 비가 Ⅳ에 잘 요약되어 있다.


Besser ist ihr Tisch nun bestellt; es fehlet an Kleidern,

Fehlet am Wagen ihr nicht, der nach der Oper sie bringt.

Mutter und Tochter erfreun sich ihres nordischen Gastes,

Und der Barbare beherrscht römischen Busen und Leib.

이제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잘 먹고, 옷도 넉넉하게 갖추었으며

지금은 우아한 마차를 타고 오페라에 간다.

어머니와 딸은 북쪽에서 온 손님에 만족하며,

로마의 가슴과 육체는 이제 야만인의 지배 아래 있다.


분명히 괴테가 누렸던 성적 서비스는 대가를 요구했다. 이 로마의 성적 체험이 실제로 괴테에게 얼마의 비용을 들게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금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적인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었던 인물이자, 자신도 정력적인 인물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에게 괴테는 1787년 12월 29일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재정 상태를 “험악한 조건들”(böse Bedingungen)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이 모험을 끝까지 만끽하려는 그의 결심을 흔들 만큼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다 해도, 괴테의 시를 단순히 이 모호한 로마 여인과의 실제 관계를 충실히 재현한 것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로마 비가에서 그려지는 연인의 목가는 명백히 신화와 괴테가 선택한 고전 선구자들의 시에 깊이 뿌리를 둔 문학적 구성물이다. 시인의 연인 이름인 ‘파우스티나’(Faustina) 자체가, 그녀가 가상의 파우스트(Faust)의 동반자라는 점을 암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괴테는 바로 그 시기에 『파우스트』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 작품 중 가장 ‘북구적’인 장면들 중 일부를 로마에서 썼다. ‘파우스티나’라는 이름의 창조는 괴테 자신의 ‘파우스트적’ 욕망에 대한 아이러니한 자각이었을까? 어쨌든, 로마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파우스트의 본질적 욕망 중 하나인 “무한한 자연을 포옹하고”, “어머니 대지의 젖가슴을 빨며”, “인간의 왕관”을 획득하려는 욕망을 충족시켜준 셈이었다.

시와 전기적 진실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듯, 괴테는 훗날 1829년 4월 8일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로마의 엘레지』 뒤에 숨겨진 ‘사실’들에 대한 대중의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시인이 아주 작은 것으로도 일반적으로 훌륭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후 괴테가 겪은, 이와 관련 있으면서도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전해지는 체험에 대해서는 훨씬 더 확실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즉, 바이마르로 돌아온 직후 시작된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Christiane Vulpius와의 오랜, 애정 어린, 충만한 관계다. 1788년 7월 12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중산층 출신의 크리스티아네는 23세였고, 고아였으며 미혼 상태로 인공 꽃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불피우스는 가난한 작가였는데, 여동생에게 괴테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크리스티아네는 바이마르의 일름 강가에 위치한 괴테의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 중이던 괴테에게 이를 전했다. 아마도 로마에서 ‘파우스티나’와의 자기 해방적 만남이 그로 하여금 크리스티아네와의 만남에서 주도권을 잡게 한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괴테와 크리스티아네는 만난 바로 그날 연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아네는 1806년까지 괴테의 애인으로, 이후 1816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아내로 살았다. 바이마르 사회는 교육 수준이 낮은 젊은 여성과의 공개적인 동거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는 손님 앞에서 괴테를 ‘추밀 고문관님’(Herr Geheimer Rat)이라고 정중히 부르며 자리를 물러나는 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특히 샤를로테는 이 옛 친구의 새로운 가정생활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괴테가 ‘작은 자연 존재’(kleines Naturwesen)라고 부른 크리스티아네와의 관계는 지속적이었고, 우리가 아는 한 괴테는 이 관계에 충실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유아기를 넘긴 것은 맏아들 아우구스트(1789년 12월 25일 출생)뿐이었고, 그는 아버지보다 2년 앞선 1830년에 사망했다.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와의 동거를 시작한 직후인 1788년 10월, 『로마 비가』 집필을 시작했다. 그것은 로마의 기억과 새로운 현재의 현실이 상상력으로 설득력 있게 결합된 작품으로, 다양한 문학적 암시들이 유쾌하게 얽혀 있는 시집이다. 크리스티아네가 이 새로운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은 타당하다.

“『비가』의 핵심에는 괴테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행복한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심 체험을 감싸고 있는 문학적 복잡성은 그것의 전기적 핵심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괴테는 로마에서, 그리고 이제 바이마르에서도 새로운 힘과 영감을 얻었고, 그 불꽃을 계속 살려내고자 했다. 그는 남쪽의 따뜻한 공기 아래에서 구상한 시를, 우중충한 하늘과 적대적인 도덕 분위기의 북구 세계로 옮겨올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새로운 시가 향한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1788년 8월에 쓴 두 편의 비교적 긴 시, 『방문Der Besuch』과 『새벽의 탄식Morgenklagen』에서는 절제되고 가정적인 에로티시즘의 두 장면이 묘사된다. 이렇다 할 내용은 없는 이 시편들은 괴테 또는 당대의 어떤 시인이든 에로틱한 주제를 다루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딜레마를 분명히 보여준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대적 형식 속에 관습적인 주제를 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적 형식 속에 대담한 주제를 담는 것이었다.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진정한 현대어 속에서 대담함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테는 이 시점에서 다섯 박의 장단격 단위로 된 불규칙한 길이의 무운 연이라는 현대적이면서도 절제된 형식을 선택했고, 이는 성적 암시를 전통적이고 점잖게 담아내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로마 비가』에서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이 작품은 괴테가 현대의 에로시즘 시를 창조하려는 프로젝트에서 한층 더 나아간 시도였다. 시가 인간 경험의 다른 영역에서 이룬 정직함과 깊이로 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 목소리는 위장되어야 했다. 『방문』에서 괴테는 이미 고전 시인 프로페르티우스Propertius로부터 모티프를 차용했다. 곧, 잠든 연인을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비가 ⅩⅤ 참조)이다. 이제 괴테는 프로페르티우스는 물론, 티불루스Tibullus, 카툴루스Catullus로부터도 상호텍스트적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한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을 지탱하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시적 언어는 선구자들의 리듬과 억양에 순응해야 했다. 『로마 비가』는 현대에 에로시즘 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전 형식을 빌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괴테가 이 목적을 위해 선택한 비가 2행 연구聯句elegiac distich는 이러한 미묘한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그 덕분에 이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괴테는 『로마 비가』를 1790년 완성 직후에 출판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인 비가 XV는 1791년에 잡지에 실렸다. 괴테는 아마도 나머지 비가들, 어쩌면 전부를 출판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카를 아우구스트와 헤르더의 만류로 이를 포기했다. 헤르더는 괴테의 질풍노도 시절 친구이자 멘토였으며, 당시에는 바이마르에서 중요한 교회 고위 성직자였다. 괴테는 1791년 1월 1일, 절친 카를 루트비히 폰 크네벨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어조로 보낸 편지에서 이들의 충고를 “맹목적으로” 따랐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로마 비가』는 수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이는 이 작품들이 마치 개인적인 음란문학처럼 분류되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명백한 오해였다. 그러나 이 비가들은 결국 1795년, 실러가 편집한 잡지 《회렌Die Hören》에서 출판되었다. 괴테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실렸지만, 그의 저자 정체는 곧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실러는 이 비가들의 문학적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이상주의적 교양소설로 잘못 해석되었던 것도 실러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로마 비가』에 대해서도 후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해석을 제공했다. 실러는 이 시들에 감탄했지만, 그 속에 담긴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묘사'는 그를 다소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괴테로부터 직접 비가들을 낭독받은 후, 1794년 9월 14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들을 “확실히 외설스럽고 별로 점잖지 않다”고 표현했지만, 그럼에도 괴테의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1795년 7월 5일, 후원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Duke of Schleswig-Holstein-Augustenburg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 시들의 출판을 옹호하며 “숭고한 시적 아름다움”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이 시들은 어떤 관습적 점잖음에 어긋날 수는 있지만, 진정하고 자연스러운 점잖음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점잖음(Dezenz)’의 문제는 분명 실러에게 고민거리였으며, 그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시인의 수줍음에 대하여》라는 짧은 수필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글 대신 1797년에 출간된 영향력 있는 문학 유형론 《소박시와 감상시(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안에 자신의 생각을 통합했다. 이 글에서 실러는 괴테의 『로마 비가』를 관대하게 평가하고 옹호했으나, 그에는 일정한 대가가 따랐다.

실러는 『로마 비가』를 염두에 두고, '불쾌하고 천박한' 종류의 에로시즘 시와 '아름답고 고귀한' 종류의 시를 구분하려 했다. 그는, 시인이 단지 독자의 욕망을 자극하려 할 때 그 작품은 공허하고 냉소적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불쾌한 것(verwerflich)”이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시인이 정신과 감정(‘Geist und Herz’)을 결합시켜 글을 쓰고 그것이 ‘소박한(naiv)’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그는 “모든 냉랭한 점잖음을 무릅쓰고도 아름답고 고귀하며 칭송받을 만한”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이다. 실러가 말하는 ‘소박함(naiv)’은 고대인들의 정신과 방식 속에서 창작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본질적으로 자기 성찰적이고 의식적인 근대문학과, 그에 반해 고전 그리스 문학의 본질적으로 직선적인 방식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로서는 왜 실러가 괴테 일반, 그리고 특히 『로마 비가』를 ‘소박시’의 예로 분류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괴테의 시들은 명백히 고대 라틴 선례들과 자신이 역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자각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러가 왜 이런 비평적 전략을 선택했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보다 철학적 성향의 글쓰기를 괴테의 시와 구별하고, 그것을 괴테의 이상적 ‘소박시’ 모델과는 다르지만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당화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러의 《로마 비가》에 대한 고도로 세련된 독해도 결국에는 ‘오독misreading’이라 불릴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괴테 비평에서 실러가 지니는 위상을 고려할 때, 그가 괴테의 시에 대해 내린 평가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결과는, 특히 독일 비평에서 괴테를 유럽 낭만주의의 주류에서 다소 동떨어진 인물로 바라보려는 지속적인 경향일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정형화topos는 『로마 비가』의 철저히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양식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상상적 시도 속에 담긴 혁신적 성향—괴테의 비가들이 아마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그러한 성향—을 그 미학 이론과는 구분하여 이해하는 데에도 실패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괴테 전집은 『로마 비가』를 20편의 연작으로 구성해 실고 있다. 이는 1795년에 『비가: 로마, 1788Elegien: Rom, 1788』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을 때의 구성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배열은, 괴테가 그의 유작판Ausgabe letzter Hand에서 후세를 위해 승인한 것이긴 하나, 일부 평론가들이 주장하듯 예술적 고려보다는 관습의 요구와 자기검열에 더 크게 좌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상당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괴테가 실러에게 《회렌》에 출판하도록 제출한 비가는 20편이 아니라 22편이었다는 점이다. 여러 논의 끝에 괴테는, 실러가 제안한 대로 일부 구절을 생략한 채 단편 형태로 실을 바에야 두 편을 아예 삭제하는 쪽을 택했다. 이 두 편을 누가 먼저 삭제 대상으로 고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실러가 처음에는 그 외설성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가 먼저 신중함을 촉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러는 실제로 친구 쾨르너Körner에게 보낸 편지(1795년 7월 20일)에서 “괴테의 비가들 중 가장 노골적인 것들은 점잖음에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생략되었다”고 보고했다. 괴테 역시, 이제 막 친구이자 동맹이 된 실러에 대한 배려와 신생 잡지의 앞날을 생각하여 이에 동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삭제된 두 편의 비가는 오늘날 기준에서는 별로 문제가 될 내용이 아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현대 판본의 제3비가)은 로마 궁전들의 화려함과 연인의 방이 지닌 소박한 아름다움을 대조한다. 이 시는 성적 결합의 기쁨을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로 노래하며 끝난다.


Uns ergötzen die Freuden des echten nacketen Amors

Und des geschaukelten Betts lieblicher knarrender Ton.

우리의 사랑은 진짜고, 참되며, 벌거벗은 사랑이다.

우리 아래에서는, 리듬에 맞춰 침대가 삐걱이며

우리의 기쁨의 노래를 사랑스럽게 연주한다.


다른 하나의 비가(XVII)는 검열당한 이유가 좀 더 납득된다. 이 시는 성병에 걸릴 위험이 창녀뿐 아니라—문제가 된 구절—자기 아내에게서도 올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Jetzt wer hütet sich nicht, langweilige Treue zu brechen!

Wen die Liebe nicht hält, hält die Besorglichkeit auf.

Und auch da, wer weiß! gewagt ist jegliche Freude,

Nirgend legt man das Haupt ruhig dem Weib in den Schoß.

Sicher ist nicht das Ehbett mehr, nicht sicher der Ehbruch;

Gatte, Gattin und Freund, eins ist im andern verletzt.

지루한 애인에게 충실함을 꺾는 걸 누가 주저하랴?

사랑은 우리를 붙들지 못해도, 경계심은 이중으로 생각하게 하네.

심지어 집에서도, 누가 알랴! 어떤 기쁨도 위험이 없지 않다.

자신의 아내 품에서도 지금은 안심할 수 없는 세상!

결혼 안에서도, 밖에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남편과 아내, 애인은 서로에게 해를 끼친다네.


현대 독자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괴물’을 두려워하는 시대 속에서, 이 구절이 당시 괴테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예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편의 비가가 일부 판본처럼 제자리를 되찾는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로마 비가』 전체를, 괴테가 처음 구상했던 순서와 방식대로 온전히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원래 괴테는 『에로티카 로마나』에 두 편의 비가를 더 포함시켜, 총 24편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남근 다산의 신인 프리아푸스를 찬양하는 시들이었고, 괴테는 이들 작품을 실러에게 제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프리아푸스 풍의 시에 전통적으로 수반되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성격이 이들 작품을 출판 부적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그 작품들이 괴테의 전체 기획에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필수 요소였다는 사실을 가려서는 안 될 것이다.

괴테는 당시 고전 문학의 ‘삼두정치triumvirate’로 일컬어지는 주요 작가들의 에로틱 시뿐만 아니라, 훨씬 덜 존경받는 《카르미나 프리아페아Carmina Priapea》도 함께 읽고 있었다. 카르미나 프리아페아는 1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남근 신 프리아푸스를 찬양하는 약 80편의 에피그람(짧은 시)으로 구성된 시집이자 연작이었다. 이 시편들은 세기마다 암암리에 전파되었고, 특히 16세기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했다. 괴테는 이 시들에 대해 단순한 관심 이상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1789/90년 겨울 동안 르네상스 학자들의 박식한 주석이 첨부된 17세기 판본을 통해 이 시들을 탐독했고, 그중 아홉 편에 대해 자신만의 학문적 주석을 달았으며, 선배 해설가들을 따라 일부 구절에 대한 텍스트 교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주석은—물론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Princeps Augustus’에게 헌정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괴테의 성적 고백을 자주 공유받았고 이런 글들을 즐겼던 바이마르의 칼 아우구스트 대공을 가리키는 듯하다.

괴테의 프리아페아 관련 에세이를 분석한 쿠르트 R. 아이슬러Kurt R. Eissler는 이 글이 강한 감정적 가치를 지닌 주제들을 탐색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했다. 언어적으로는 ‘문헌학’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금기시되고 외설적인 것들을 끄집어내어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건조한 객관성과 외설적인 주제의 결합은 이 겉보기에는 가벼운 작품들이 지닌 독특한 매력을 이룬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글들은 괴테가 의도한 만큼 가볍지만은 않다. […] 그는 마치 그 주제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처럼 그 주제에 매혹되어,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괴테의 이러한 개인적이고 전기적인 동기와는 별개로, 그의 프리아페아 독서는 『로마 비가』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괴테 자신도 대공에게 헌정한 서문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참새처럼, 인간이 비너스의 기쁨을 끊임없이 누릴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카스파르) 쇼페Caspar Schoppe와 더불어 그 점을 안타까워하지요. 하지만, 지극히 훌륭한 군주님, 저는 우연이 제게 허락하지 않은 것을 애타게 갈망하기보다는, 자연이 제 쾌락 사이사이에 마련해 놓은 간극을 유익하고 즐거운 어떤 일로 채우려 애써온 사람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저는 이제 막 끝나가고 있는 이 겨울의 긴 밤들을 비너스와 보다 너그러운 뮤즈들 사이에서 번갈아 보내며 스스로를 즐겁게 했습니다.


이 서문과 함께 첨부된 프리아페아 일부 시편에 대한 주석은, 그 겨울 괴테가 밤마다 즐긴 보다 쾌락적인 활동의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그 겨울 괴테에게 에로틱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훨씬 더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 무렵은 크리스티아네가 처음 임신했을 때였고, 그녀는 1789년 12월 25일, 괴테의 다섯 아이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우구스트를 출산했다. 괴테가 언급한 ‘보다 너그러운 뮤즈들’은 단순한 독서뿐 아니라 창작 활동까지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는 프리아페아 시집에 대한 관심을 단순한 취미가 아닌 『로마 비가』라는 보다 큰 기획의 일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괴테의 프리아푸스 찬가들 역시 『로마 비가』와 분리할 수 없는 일환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789/90년 겨울, 괴테의 관심을 지배했던 이 독특한 정신적 풍경은 현대 독자에게 다소 당혹스러움을 준다. 프랑스 혁명이 막 발발했을 무렵이었고, 괴테는 이 사건을 깊은 불안 속에서 지켜보았으며,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강렬한 정치적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이 시기에, 자신의 사적 삶 속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혁명’, 곧 성적 삶에서의 변화로부터 탄생한 시 창작에 몰두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무관한 활동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둘 사이에는 숨은 연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프랑스에서 전개된 사건들의 급진성과, 괴테가 독일 시를 특정한 문학적 관습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급진적 시도 사이에 어떤 평행성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가 프리아푸스 및 프리아푸스적 시에 대해 가졌던 집착은 단순한 심리적 관심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고대의 다산신 프리아푸스는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크게 표현된 나무 남근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되며, 고대 문화의 하층민적이고 민속적인 층위를 대표한다. 이는 프리아푸스를 기록한 초기 그리스 기념비적 자료들과 1세기 로마의 프리아페아 시집, 즉 이 숭배가 패러디적 단계로 이행한 시기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괴테는 이러한 민속적이고 거칠며 대중적인 에로틱 시의 전통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으로 해방된 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남근 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혹은 인간 성(sexuality)에서 남근이 갖는 중심적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그리하여 훗날 프로이트가 중심적으로 다루게 될 심리 개념들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비가 Ⅰ과 비가 XXIV에 등장하는 프리아푸스의 부활이 《로마 비가》가 지닌 명백한 반기독교적 성격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괴테의 시에서 찬양되는 행위에 대한 공식적·기술적 용어는 간음fornication이다—즉 중대한 죄악이다. 교회의 용어에서, 결혼 외의 모든 성적 쾌락은 죄였고, 심지어 결혼 안에서도 성행위는 신의 생육 명령을 고려하여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보여주었듯, 초기 교부들로부터 이어져온 교회의 공식적이고 정교한 성 담론은 역설적으로 성에 대한 자각을 오히려 자극하고 심화시켰다. 기독교 윤리는 에로틱 시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초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는 결혼하지 않은 연인들이 등장하는 『로마 비가』보다는, 결혼한 주인공을 내세운 『일기』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괴테는 그 작품에서 기독교가 규정하는 성의 원칙들에 더욱 명확히 접근한다.

괴테의 프리아페우스 시편 중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은 프리아페아의 전형적인 모티프를 발전시키며 프리아포스를 자신의 '정원'—여기서 말하는 정원은 물론 『로마 비가』 자체를 의미한다—의 수호신으로 임명한다. 이 정원에 자라나는 ‘삶의 황금 열매’를 누구든지 자유롭게 따먹어도 좋지만, 프리아포스는 그 정원을 더럽히려는 ‘악당들’과 ‘순수한 자연의 열매’를 혐오하는 ‘위선자들’을 그의 거대한 도구로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짧은 시는 분명한 서문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보다 다소 긴 두 번째 시에서는 프리아포스가 직접 말한다. 그는 자신을 방치하고 모욕한 세월에서 구출해주고, 신들 사이에서 정당한 자리를 되찾게 해준 ‘정직한’ 시인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구원의 행위는 『로마 비가』를 통해 성취된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프리아포스는 시인에게 신화적인 성적 능력의 기쁨을 약속한다.


Dafür soll dir denn auch halbfußlang die prächtige Rute

Strotzen vom Mittel herauf, wenn es die Liebste gebaut,

Soll das Gleid nicht ermüden, als bis ihr die Dutzend Figuren

Durchgenossen, wie sie künstlich Philänis erfand.

“그러므로 나는 너의 훌륭한 중심 막대를 축복하노니,

사랑하는 이의 뜻에 따라 늘 반 자(尺)는 우뚝 서게 하라.

너희 둘이 필라이니스Philaenis가 묘사한 열두 가지 체위를

모두 마치고, 기쁨의 춤을 끝낼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하라.”


이 두 프리아페아 비가가 구조상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명백하다. 그것들은 나머지 22편의 비가를 위한 하나의 틀로 기능한다. 현존하는 원고들에는 24부 구성에 대한 명시적 단서는 없지만, 칼 오토 콘라디Karl Otto Conrady가 지적했듯, 이러한 구성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들은 많다. 이러한 ‘틀 장치’는 《카르미나 프리아페아》의 구조에도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다. 『로마 비가』의 첫 시이자 ‘서문’에 해당하는 시에서, 전통적으로는 뮤즈나 비너스를 불러오는 자리에 괴테는 대신 프리아포스를 시의 진정한 수호신genius으로 호명한다. 또 다른 프리아페우스 시, 즉 ‘종결시’에서는 『비가』의 비밀스러운 사명을 드러내고 이를 확증하는데, 그것은 바로 프리아포스의 회복과 정당화다.

여기서 기억할 만한 것은 ‘회복(recovery)’ 또는 ‘구원(Rettung)’이라는 주제가 괴테의 문학적 정체성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초기 문학 프로젝트 중 다수는 역사적 혹은 신화적 인물을 망각이나 오명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극 『괴츠 폰 베를리힝겐Götz von Berlichingen』(1771), 서사시 『한스 작스의 시적 사명Hans Sachs's Poetic Mission』(1776), 그리고 무엇보다도 1770년대 초에 시작된 『파우스트』는 이러한 ‘구원’의 개념을 가장 심오하게 확장한 예이다. 『로마 비가』에서 이러한 구원의 제스처는 프리아포스를 중심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다른 사례들처럼, 추방되고 학대받은 남근 신의 회복은 ‘해방’─즉 구시대적이고 비생산적인 에로틱 시의 틀로부터의 해방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프리아페우스 시편이 『로마 비가』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가를 읽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두 프리아페우스 시편은 전체 24부 구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제13 엘레지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암시되는 남근 신에 대한 언급의 중요성을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제21 엘레지 마지막에 호명되는 ‘신(Gott)’ 역시 프리아포스, 혹은 프리아포스적 형상으로 구현된 사랑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이 두 편의 숨겨진 시편은 비가 Ⅱ 서두에 불려 나오는 ‘수호신(genius)’이 실제로는 프리아포스임을 암시한다. 다수의 평자들이 생각하듯 애매한 장소의 정령(genius loci)이 아니라, 프리아포스야말로 『로마 비가』의 진정한 수호신이다. 비가의 시적 목표가 단순히 ‘로마(Roma)’와 ‘사랑(Amor)’의 언어유희나 현재와 과거의 막연한 교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프리아포스의 회복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적에 있다는 점은 이제 자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평자들이 프리아페우스 시편을 『비가』 본문에서 분리하려 애쓴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어느 정도 정당하게도—이 비가 전체가 지녀야 할 ‘도덕적’ 성격이 프리아페우스적 요소로 인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프리아포스에 대한 거부감은 전통적인 문학비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기 연구에서는 괴테의 작품 전체에 대한 선입견과 『로마 비가』 구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프리아포스는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야심찬 이론적 전제들이 남근 신을 해체시키고 있다. 예컨대 연인─『비가』의 시인─은 실제로는 ‘삶’보다 ‘문학과 문학적 명성’에 더 큰 열정을 품은 ‘수동적인 연인’이라는 해체적 독해가 그것이다. 괴테가 20편만 출간하여 전체 시편을 ‘단축’시킨 사실은 그의 성적 정체성이 ‘거세되었다’는 해석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해에서는 두 프리아페우스 시편의 제외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시인 내면의 필연적 요구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가』가 본래 24편 구성임을 인정하는 순간,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더 나아가 어떤 해석은 『비가』에 묘사된 성행위들을 ‘상호 자위 행위’로 간주하고, 특히 유명한 비가 Ⅶ (시인이 애인의 등 위에서 육각운hexameter을 두드리는 장면)를 동성애적, 빈켈만적Winckelmannian 감수성의 상징으로 읽기도 한다. 여기서도 『비가』 전편에 스며든 프리아포스의 주제는 무시된다. 프리아포스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고, 그 불편함 자체가 그를 해체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결국 『로마 비가』의 프리아포스의 구조는 단순한 성적 표지가 아니라, 분명한 미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독자에게 처음부터 이 작품이 외설적인 허구의 이교적 요소들과 기독교적 독자 의식 사이를 유쾌하게 매개하는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 아이러니는 종종 간과되며, 동시에 괴테의 에로틱 시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요소—즉, 현대 에로틱 시인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자기반성적 성찰—역시 무시된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20년 뒤 그의 또 다른 에로틱 시의 기념비인 『일기』에서도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베네치아 경구』로 알려진 짧은 시 모음은 괴테의 주요 시적 선언에 속한다고 보긴 어렵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이 시집을 확연히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괴테가 기분이 찌푸린 어느 날 심심풀이로 써낸 결과물쯤으로 취급한다. 실제로 이 『베네치아 경구』는 “괴테의 가장 읽히지 않으며, 가장 저평가된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는 안타까운 일인데, 왜냐하면 이 시들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흥미를 지니며, 괴테의 에로틱 시 전체를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필수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백히 에로틱한 내용을 담은 시는 그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무정한 어조와 우상 파괴적 성격을 정확히 평가하며 이 시편들을 옹호한 인물은 다름 아닌 니체였다. 니체는 바그너의 최후의 작품 『파르지팔Parsifal』에서 드러난 성적 해방에 대한 배신을 격렬히 비판하던 시기에, 괴테의 경우를 바그너에 대한 선행 사례로 삼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성이라는 신경질적 도취에 빠진 노처녀 같은 독일에서 괴테가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우리 모두 안다. 독일인들은 언제나 그를 불쾌해했으며, 괴테의 유일한 진정한 팬은 유대계 여성들이었다. 귀족적이고 고상한 말을 늘어놓은 쉴러—그들이 좋아한 건 그런 인물이었다. 괴테에 대해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무엇인가? ‘비너스베르크Venusberg’를 썼다는 것, 그리고 ‘베네치아 경구’를 썼다는 사실이었다. (…) 헤르더는 한때 괴테를 언급할 때마다 ‘프리아푸스’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 무엇보다도 고귀한 처녀들이 분노했다. 독일의 모든 자그마한 궁정, 모든 바르트부르크Wartburg가 괴테를 향해 십자성호를 그었고, 괴테 안의 ‘부정한 영’에 맞서 싸웠다.”


니체는 괴테를 자신과 마찬가지의 ‘자유정신’으로 인식했고, 그러한 자유정신이 바로 이 짧은 시들 속에서 간결하고 불경하며 때로는 공격적인 어조로 표출되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경구 : 1790년 베네치아Epigramme: Venedig 1790’라는 제목 아래 처음 명명된 이 시편들은 거의 전부 1790년 3월 11일부터 5월 22일 사이, 괴테의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중 베네치아에서 쓰였다. 괴테는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한 공식 임무로 마지못해 이 여정을 떠났는데, 그녀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귀환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도착은 계속 지연되었고, 베네치아의 매력은 괴테가 바이마르에 두고 온 크리스티아네와 그들의 첫 아이 아우구스트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괴테는 이 예기치 못한 이탈리아 재방문을 실망스럽고 허탈한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통스럽게도 자신이 이상향Arcadia으로 기억했던 그 땅이 더 이상 마법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인정해야 했다. 1790년 4월 3일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번 여행이 자신과 이탈리아의 사랑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고까지 표현했다. 물론, 이런 과장된 표현은 실제로는 지나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 속에는 환멸과 실망의 정조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로마 경구’와 같은 주제적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으며, 그나마 ‘다양성’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성과 구성의 부족은, 시편들이 보여주는 억제되지 않은 호기심과 신선한 관찰력으로 충분히 보상된다. 괴테는 베네치아에서의 이 예기치 않은 장기 체류를 통해, 바이마르 궁정의 숨 막히는 엄숙함 속에서 잠잠해지고 말라가던 자신 안의 독설적이고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감수성을 되살릴 기회를 노렸던 듯하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금 ‘국가, 종교, 그리고 도덕Staat, Götter und Sitten’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넘나드는 목소리를 배우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 세태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독립성과 자유사상가로서의 자기 인식을 되찾게 되었다.

괴테는 환멸의 기분을 하나의 미덕으로 삼아, 베냐민Walter Benjamin이 상징적 현대인물로 정의한 ‘배회자flâneur’처럼 거리의 관찰자로서 냉소적이고 아이러니한 시선을 택했다. 실제로 볼프디트리히 라쉬Wolfdietrich Rasch의 지적처럼, 괴테의 베네치아 도시 생활에 대한 관음적 관찰은 이후 하이네, 보들레르Baudelaire, 릴케Rilke가 파리에서 경험한 매혹을 예견하는 듯하다. 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예는 ‘저글러Gaukler’—떠돌이 곡예사와 거리 공연자—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괴테가 묘사한 곡예사들은 약 100년 후 피카소, 릴케 등 현대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게 된 ‘살탐방크saltimbanques’ 계열에 속한다.

괴테는 실제로 거리 공연자 무리를 목격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베티나Bettina’라는 젊은 여성 곡예사의 아버지였다. 이 시편들 가운데 중심부에 해당하는 미니 사이클은 바로 이 베티나를 묘사한 약 15편 가량의 짧은 시들이다. 이 시들에서 베티나는 숨 막히는 공중제비부터 자위성 커닐링구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불가능한 묘기를 펼쳐 보인다. 물론, 시인 자신이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거리 생활에 대한 배회자적 즐거움은 확연히 드러나며, 베티나의 양성적 매력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 등장하는 미뇽Mignon의 성적 모호성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시인은 곡예사와 시인의 유사성—‘저글러와 시인(Gaukler und Dichter)’—이라는 흥미로운 친연성을 유희적으로 다룬다.

베티나의 기예는 괴테가 종교적, 성적 우상 타파적 본성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한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성향은 그의 젊은 시절 못지않게 강렬하게 남아 있으며, 몇몇 시편(19, 28, 29)에서는 인상적인 신성모독의 형식을 취한다. 이 ‘베네치아 유서’는 괴테의 전체 작품 중에서도 부르주아-기독교적 관습과 이교적 프리아푸스적 감수성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가장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반기독교적 제스처 중 하나로 평가된다.

물론, 베네치아 체류 중 창작한 모든 시를 공개할 생각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1796년 괴테가 『로마 비가』와 마찬가지로 다시 익명으로 쉴러의 《뮤즈 연감Musen-Almanach》에 발표하기 위해 103편의 경구시를 선별했을 때, 그는 예방 차원의 자기 검열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외설적인 53편을 제외했는데, 이는 실로 현명한 조처였다. 니콜라스 보일Nicholas Boyle이 열거하듯, 그 53편은 ‘나체, 발기, 자위(남녀 모두, 여성의 경우 구강 자위 포함), 매춘, 남색, 성병, 그리고 베네치아 운하에 비유된 느슨한 질에 대한 실망감’ 등 용납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외된 53편 역시 덜 외설적인 다른 경구시들과 동일한 창작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들은 전집의 필수적인 일부로 간주되어야 하며, 두 편의 프리아푸스풍 비가가 《로마 비가》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시들에 담긴 거의 무심한 공격성은 괴테의 자유정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괴테가 발표한 시편들과 그가 보류한 시편들 모두에는 반反교권敎權주의적 독설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는 괴테가 프리아푸스의 가면을 쓰고 추방된 고대 신을 대변해 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로마 비가》와는 달리, 이 《베네치아 경구》는 전통적인 의미의 어떤 성적 모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괴테적인 강렬한 체험의 의미에서 이 경구시들이 어떤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크리스티아네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새로운 자기 확신의 반향일 것이다. 괴테가 이 작품에서 프리아푸스적 의제를 추구해야 했던 동기는 시인으로서의 자각된 관심 때문이지, 절실한 사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것은, 프리아푸스가 독일 시의 신전pantheon에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회복시키려는 시인의 노력이다. 이런 점에서 《베네치아 경구》는 《로마 비가》를 상기시키고 《일기》를 예고하며, 근대적 에로틱 시인의 곤경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고, 괴테의 작품 전체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외설적인 제스처—즉, 기독교의 십자가에 못 박힌 신과 꿋꿋한 프리아푸스 간의 정면충돌—를 위한 길을 닦는 것이다.

분명히, 괴테의 ‘가장 읽히지 않고 가장 저평가된’ 이 작품은 《로마 비가》와 《일기》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며, 괴테의 프리아푸스적 기획의 범위와 내적 일관성을 드러낸다.


《일기》의 출판 역사는 《로마 비가》나 《베네치아 경구》보다도 더욱 기이한 역사를 지닌다. 이 역시 자기 검열의 사례이다. 괴테는 《일기》를 1810년 4월에 집필(혹은 완성)했으며, 여러 정황은 그가 이 작품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으나 출판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이 시를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 장에 쓰일 예정이었던 사탄 미사 등 ‘불가능한’ 텍스트들과 함께 자신이 ‘발푸르기스 자루’라 부른 곳에 보관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친구들에게 낭독하거나 보여주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이 시의 필사본은 두 종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괴테의 문헌 자문이자 아들 아우구스트의 가정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머Friedrich Wilhelm Riemer의 필사본이며, 괴테의 자필 수정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정체불명의 필사자에 의한 것이다. 괴테의 친필 원고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기》는 1861년 베를린의 서적상 잘로몬 히르첼Salomon Hirzel이 사적으로 소량 인쇄하여 처음 출판했으며, 그가 어떻게 이 시의 원고를 입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히르첼은 그것이 괴테의 친필 원고라 믿었고, 그 인쇄는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비공식적 특수판들로 반복 출간되며 문학적 망각에서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시는 대부분 60세의 괴테가 겪은 성적 무능과 불륜 시도에 대한 창피한 고백으로 해석되어 왔다.

1885년, 칼 아우구스트 대공의 손녀며느리 소피아 대공비 후원 아래, 대규모 바이마르 판 《괴테 전집》이 준비되던 중, 편집자들은 ‘발푸르기스 자루’의 내용을 후원자에게 제출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마마께서는 시녀들과 함께 《일기》와 미출간 베네치아 경구시를 낭독하며 단어들을 펜칼로 긁어냈고’, 이후 대부분은 복원되었다. 그녀는 그 모든 자료가 계속 비공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 자료가 학문적 양심에 의해 검열을 넘어서게 된 것은 그녀가 사망한 지 13년 후인 1910년의 일이었다. 당시 편집자들은 히르첼의 (왜곡된) 텍스트를 본문 비평 부록 속의 음지에서 간신히 수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시의 가장 대담하고 악명 높은 두 행(135행 이하)은 부분 삭제된 채 남아 있었고, 1914년에야 이례적으로 난독화된 이문 목록 속에 복원되었다. 이후, 올바르거나 거의 올바른 텍스트는 우수한 《괴테 전집》에 정식으로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의 시 선집이나 방대한 학술용 선집(예: 에리히 트룬츠Erich Trunz의 함부르크 판)에서는 여전히 《일기》를 제외하고 있다. 반면, 이 시 단독의 사적 인쇄물은 여전히 활발하게 발간되며, 종종 경박하고 왜곡된 삽화와 함께 제공된다. 최초의 영어 번역(산문)은 1964년 데이비드 루크David Luke가 펭귄Penguin 출판사에서 출간한 괴테 시선집에 수록되었고, 최초의 영어 운문 번역은 존 프레더릭 님스John Frederick Nims가 시도하여 1968년 《플레이보이 매거진Playboy Magazine》에 발표했다.

《일기》는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과의 성적 만남에서 실패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서사를 펼친다. 시인들이 이 주제를 다룬 일은 매우 드물며, 대개는 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주제를 다룬 세 가지 주요 사례는 오비디우스Ovid의 《사랑의 노래Amores》 (3.7), 아리오스토Ariosto의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8권 46행 이하), 그리고 존 윌모트 로체스터 백작John Wilmot, Earl of Rochester(1647–1680)의 시 《불완전한 쾌락The Imperfect Enjoyment》에서 찾을 수 있다. 괴테는 로체스터의 시는 알지 못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아리오스토의 작품에 익숙했고, 오비디우스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동일한 성적 실패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괴테의 시와는 상황이 다르다. 오비디우스의 시에서는 젊은 남성이 실패하고, 그의 상대인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여성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피하기 위해 관계에 성공한 척 연기한다. 아리오스토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음탕한 늙은 은둔자로, 잠든 안젤리카를 강간하려 한다. 괴테의 시에는 이 두 작품의 희미한 메아리가 있지만, 그것들은 시의 중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보다 가능성이 높고 생산적인 출발점은 바로 그의 《로마 비가》였다. 그 시집의 마지막 프리아포스 비가에서는, 시인이 프리아포스를 복권시킨 사랑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성적 능력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그런데 《일기》에서는, 여행 중인 상인이라며 노골적으로 변장한 가면 뒤의 같은 시인이, 프리아포스로부터 받은 필경 확실한 선물이 어째서 실패로 돌아갔는지를 대놓고 성찰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괴테가 비가에서 성취한 프리아포스의 회복을 스스로 취소하려는 충동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런 식의 제안을 전혀 하지 않는다.

두 텍스트 간의 연결 고리는 그 밖에도 쉽게 발견된다. 본래의 구상대로라면 《로마 비가》와 마찬가지로 《일기》 역시 2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중에 쓰인 《일기》는 《비가》와 유사한 액자식 구성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 구조 또한 뚜렷한 대칭성을 보여준다. 괴테는 에로스의 자연적 무법성natural lawlessness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형식의 규율과 엄격한 미학적 법칙의 부과를 통해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두 작품에서 괴테는 동일한 인물 구성을 사용한다. 즉, 여행 중인 작가와 젊은 여인이라는 구도를 통해, 양쪽 작품 모두의 핵심 주제—특히 《일기》에서 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사랑의 행위와 글쓰기의 행위라는 인간 창조성의 두 가지 본보기 사이의 긴밀한 상호의존성을 성찰한다.

로마 비가 VII에서는 이 주제가 다음과 같은 육각운 운율의 리듬을 여인의 등 위에서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시를 짓는 장면으로 불멸화된다.


Oftmals hab ich auch schon in ihren Armen gedichtet

Und des Hexameters Maß leise mit fingernder Hand

Ihr auf den Rücken gezählt

나는 자주 그녀의 품 안에서 시를 짓는다,

육각운의 박자를 세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조용히 두드리며.


괴테는 《일기》에서 성적 능력과 예술적 능력, 두 가지 모두의 실패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랑의 행위와 글쓰기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자신 있게 탐색한다. 두 능력의 실패는 서로를 반영하며 해명한다.

일기는 근대 시인이 직면한 특정한 딜레마를 매우 명확히 반영한다. 즉, 에로틱 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 형식의 정립된 규범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미 인용된 1824년 2월 25일의 중요한 대화에서, 괴테와 에커만Eckermann은 ‘시적 형식들이 만들어내는 신비하고도 위대한 효과’에 대해 논의했다. 괴테는 로마 비가가 ‘바이런Byron의 『돈 주앙Don Juan』의 스타일과 운율’로 쓰였다면 ‘지극히 외설적인 작품’으로 여겨졌을 것이라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에커만은 《일기》도 고전적 운율로 쓰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느꼈다. 그런 형식은 작품을 동시대 현실로부터 떨어뜨려 놓았을 것이며, 시에 필요한 품위의 베일을 제공하여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에커만을 불편하게 한 것은 작품의 주제가 아니라 바로 그 형식이었다. 특히, 《일기》가 ‘오늘날의 언어로 오늘날의 에로틱한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 시는 정말 1810년대의 시어를 사용했는가? 이 질문에는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 어휘는 분명히 현대적이며, 괴테의 1809년 장편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언어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8행시ottava rima라는 운문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더 오래된 시적 전통을 소환한다. 그렇다면 이 특정한 연형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리고 괴테는 왜 로마 비가를 ‘외설적’으로 들리게 만들었을 바로 그 형식을 일기에 선택했을까?

물론 『돈 주앙』은 괴테의 작품보다 약 10년 후에 출간되었으므로 그 시형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두 작품은 모두, 모든 근대 8행 시의 위대한 모범인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를 참조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 시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부각시킨다. 즉, 에로틱한 경험은 동시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적 전통은 단절되어 있어, 시인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양식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기》에서는 이러한 불일치가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매우 현대적인 에로틱 체험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인 형식, 주제의 자연주의적 속성과 형식의 장엄하고 화려한 외양 사이의 간극이 바로 그것이다.

8행시의 기술적 요구가 워낙 엄격하기에, 괴테가 이 형식을 매우 드물고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한 것은 놀랍지 않다. 그가 이 형식을 어떤 유형의 시에 사용했는지를 주목하는 일은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는 즉시 다음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다. 개인의 운명, 우연, 사랑, 필연, 희망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아 8행 연에 압축한 『원초어 : 오르피스(Urworte: Orphisch, 1817)』 또는 쉴러의 감동적인 추모시 『종의 노래에 부치는 에필로그(Epilog zu Schillers Glocke, 1805)』, 그 밖에도 1784년에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은 상징적 서사시 《신비들(Die Geheimnisse)》, 그리고 두 편의 《헌정시(Zueignung)》도 있다. 첫 번째는 1784년에 쓰여 신비들의 서문이자 괴테의 시인으로서의 자기 평가를 담은 시였고, 두 번째는 1797년에 쓰여 파우스트 집필 재개의 시점에서 삶과 시업을 회고하며 그의 대표작에 헌정된 서문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개인적이고 심오한 작품들 사이에 《일기》가 놓이는 것은 다소 의외이지만, 동시에 이 시 역시 그와 같은 ‘신비롭고 심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암시가 된다.

우리는 또 괴테가 아리오스토 외에 보다 근래의 이탈리아 작가에게서도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압바테 지암바티스타 카스티Abbate Giambattista Casti의 8행시 형식의 『노벨라 갈란테Novelle galanti』 시리즈다. 괴테는 로마에서 이 성직자 작가와 교류하며 그의 운문 소설 『프라하의 대주교L'Arcivescovo di Praga』의 낭독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그것이 ‘약간 외설적이지만 8행시 형식으로 대단히 훌륭하게 쓰였다’고 평했다. 놀랍지 않게도, 괴테는 1808년 8월경, 본인도 다소 외설적인 주제를 다룬 노벨라 갈란테를 구상하면서 카스티의 작품을 다시 살펴본 것으로 보인다.

『일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친화력』을 집필하던 초기 단계에 처음 떠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한 후 다시 『일기』로 돌아가 1810년에 실제로 이 시를 썼다. 이는 『일기』의 구상이 『친화력』이라는 강렬한 창작의 시기 전반에 걸쳐 그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두 작품 사이의 주제적 유사성을 고려할 때 이는 실로 놀라운 구도이다. 소설과 시 모두 결혼과 간통, 즉 일어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간통을 다룬다. 두 작품의 중심에는 현재의 배우자가 아닌, 부재한 욕망의 대상을 통해 성욕이 자극되는 심리적 상황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의 해결 방식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소설에서는 그 결과가 피할 수 없이 비극적이지만, 『일기』는 화해적인 결말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시는 소설이 초래한 비극적 균형의 붕괴를 회복하려는 괴테의 반성적 보정補正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카스티의 노벨라는 전통적인 베일에 싸인 형식으로 에로틱한 일화를 다루며, 독자에게 다소 예상 가능한 교훈을 제공한다. 『일기』에서 괴테는 이 장르의 관습을 장난스럽게 다루는 듯하다. 그는 노벨라 갈란테에서 기대할 법한 에로틱한 모험담을 전면에 내세우고, 위안을 주는 듯한 교훈도 제시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정말 이 시가 독자가 예상하도록 유도된 바로 그 교훈을 제공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 장년의 기혼 남성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차 바퀴가 부러지는 바람에 도중에 하룻밤 더 머물게 된다. 그는 일종의 작가로, 아내와 떨어져 있을 때는 매일 밤 그날의 일을 일기에 적어 두는 습관이 있다. 그는 여관에서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하녀를 만나고, 그 밤에는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유창하게 일기를 쓰지 못한다. 알고 보니 그 하녀와의 성행위도 불가능한 상태이다. 하녀는 그를 첫 연인으로 삼고 싶어 하며 그의 방에 함께 있지만, 그는 뜻밖의 무력감에 빠져 절망에 빠진다. 그녀 곁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젊은 시절 지금의 아내와 나누었던 순수하고 평온한 사랑의 기억을 애정을 담아 떠올리기 시작한다. 특히 결혼식과 그 의식이 생생히 떠오르고, 이는 괴테의 작품 중 가장 도발적인 장면 중 하나로 이어지니, 십자가와 발기한 남근의 대면이다.


Und als ich endlich sie zur Kirche führte:

Gesteh ichs nur, vor Priester und Altare,

Vor deinem Jammerkruez, blutrünstger Christe,

Verzeih mirs Gott! es regte sich der Iste.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결혼했을 때, 나는 고백하노라

그 제단과 그 사제 앞에서,

그대의 저 참담히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주 예수여,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그때 일어났노라, 어린 주인 이스테Iste여.”


이 마지막 연의 표현은 1914년까지 정확한 문구가 인쇄본에 공개되지 않았다. 괴테가 이 시를 쓴 이후 한 세기 이상, 모든 초기 인쇄본에서 문제의 마지막 두 행은 편집상 훼손되거나 아예 생략되었다. 이는 이 절정의 연이 지닌 도발적 의도가 널리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남근과 기독교의 중심 상징물인 십자가의 병치는, 괴테가 스스로를 즐겨 불렀던 '명백한 비기독교인dezidierter Nicht-Christ‘의 노골적인 도전이자 논쟁적 몸짓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괴테는 독일어로 남근을 지칭하는 표현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수치심 없이 성숙한 시를 쓰기 위해 필수적인 그 단어에 적절한 독일어 표현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과거 그를 베네치아식 프리아포스풍의 유명한 풍자시(제9편)로 이끌었으며, 이 시는 다른 여러 편과 함께 100년 넘게 미출간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일기』에서 그는 '남근der Schwanz‘을 '이스테'(der Iste)로 표현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여'(Christe)와의 압운을 위해 선택되었다. 이 단어는 라틴어 지시대명사로, '이것'이라는 뜻이며, 신성한 문맥에서, 특히 『로마 비가』에서 남근의 신 프리아포스를 중심 인물로 내세운 점을 감안할 때, 이 단어 '이스트'는 프리아포스 자체를 암시하는 환유적 표현(부분으로 전체를 지칭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슷한 신성모독적 병치는 괴테의 또 다른 미공개 풍자시 제28편에서도 나타난다. 성 금요일 전야의 가짜 성유물 진열을 본 한 소녀가 특정 유물을 달라고 히스테리적으로 외치는 장면이다. 이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불쌍한 영혼이여! 어찌하여 그토록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성기를 찾는가?

프리아포스를 찾으라! 그 신의 성기가 바로 그대에게 필요한 약이니라.”


두 작품 모두에서 이 이교 신은 십자가의 대항물로 제시된다. 괴테가 개인적으로 십자가와 기독교적 상징에 대해 느낀 반응은 극도로 강렬했으며, 뉴턴Newton의 색채 이론에 대한 그의 혐오감과도 견줄 만하다.

시의 제17연에 내포된 비밀스러운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젊은 시절의 야성적 성욕을 되살리는 이 회상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불면의 여행자는 다시 발기력을 회복한다. 기억의 행위가 신체적으로도 기억해내는 힘을 가졌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법한 대로 그는 곁에 자고 있는 동행을 깨우지 않는다. 대신 놀랍게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다른 활동—즉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작가의 능력, 곧 성적 능력과 창조적 능력은 모두 회복된 것이다. 이 새로 얻은 힘의 원인이 단순히 아내를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라고만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 아내가 된 여인에 대한 젊은 날의 열정적 사랑을 육감적으로 되새긴 데에 있다. 그녀와의 유대는 단순한 성적 매력을 넘어서,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는 복합적이고 깊은 관계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기 쓰는 화자의 아내와의 관계는 남근기적(phallic)이 아니라 생식기적(genital)이다. 바로 이 관계야말로 그가 116행에서 슬며시 언급한 ‘마법 같은 사랑의 매듭’이었던 것이다.

『친화력』과의 비교는 여기서도 다시금 시사적이다. 『친화력』의 중심 사건은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부부가 관계를 맺는 순간 발생한다—하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부 관계라기보다는, 각자가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 품은 채 서로를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와 함께하는 상상을 하며, 샤를로테는 그녀의 연인이 될 뻔한 대위와의 상상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에두아르트는 자식을 잉태시키고, 샤를로테는 아이를 갖는다—그 아이는 ‘상상된’ 부모를 닮은 신비로운 외모로 인해 생물학적 부모가 마음속으로 간음했음을 드러낸다.

반면 『일기』에서 여행 중인 남편의 리비도는 부재한 아내에게 강하게 고착되어 있어, 처음에는 유혹에 실패하고 나중에는 아예 그럴 의지도 잃는다. 그의 성적 능력은 회복되지만, 간음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부재한 연인이 아내를 대신하고, 시에서는 부재한 아내가 연적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행들에 담긴 모호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괴테는 주인공이 성관계를 포기하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함으로써, 노벨라 갈란테의 관습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24연은, 독자를 더욱 놀라게 하며, 겉보기에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는 듯하다: 사랑은 의무보다 더 강한 선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너무나도 자명하고 평범한 격언처럼 읽는다면, 이처럼 대담하고 정교한 텍스트의 결론으로서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결말의 행들은 ‘의무’와 ‘사랑’라는 두 핵심 단어가 맥락상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단순함을 잃는다.

‘Pflicht’(의무)의 경우, 『일기』에서 괴테는 이 단어를 현재는 사라진 고어적 의미—즉, 결혼 의무라는 특정한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친화력』이나 희곡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 또는 그가 작사한 가곡 《신과 무희Der Gott und die Bajadere》 등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이와 유사한 용례로는 영어 단어 ‘plight’가 있는데, 고어로는 ‘약속’이라는 의미였고, 예컨대 ‘to plight one's troth’(서약하다)와 같이 사용되었다.) 괴테의 작품 맥락을 넘어서서 살펴보면, ‘Pflicht’는 성과 결혼에 관한 법적·종교적 담론에서 핵심 기술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법률가이기도 했던 괴테는 당연히 이러한 의미망을 인식했을 것이다. 장 루이 플랑드랭Jean-Louis Flandrin의 지적처럼, ‘의무debitum’란 개념은 성과 결혼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에서 중심적인 개념이었으며, 그 기원은 바울St. Paul과 히에로니무스St. Jerome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부부 간의 성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중세 교부들은 부부가 서로의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임무, 즉 ‘의무’를 지녔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쾌락voluptas을 그것 자체의 목적을 위한 행위로 여기는 것은 금지되었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는데, 히에로니무스는 “아내를 정부처럼 사랑하는 것만큼 천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통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1800년경까지만 해도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었으므로—『일기』는 다른, 미묘하게 전복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만약 ‘Pflicht’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결혼 제도의 형식적 유대를 뜻하며, 아내에게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관계에서 성적 능력을 보이고 심지어 자식을 낳아야 할 ‘의무’를 의미한다면, 반대로 ‘Liebe’는 단순한 부부 애정이 아니라 원초적인 성적 욕망, 즉 리비도libido를 뜻한다면, 괴테의 이 구절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의 가르침—욕망 자체를 억제하고 규제하던 가르침—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읽힐 수 없다. 또한 이는 혼외정사를 비난하거나, 혼인 사랑을 찬양하는 단순한 시로도 읽혀선 안 된다. 오히려 이 시는 욕망의 본성과 작용에 대해 보다 심오한 성찰을 요구한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넘어질’ 때(190행),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두 가지 힘을 구분하는데, 하나는 결혼이라는 형식적 유대에 대한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에 근거한 사랑이라는 보다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힘이다. 자연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문화보다 우위를 점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며, 『친화력』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기』는 ‘의무’를 ‘사랑’ 위에 두는 가치의 위계를 거부함으로써, 같은 논지를 다른 각도에서 제시한다. 《로마 비가》가 그러했듯이, 『일기』는 기독교가 억제하고 규제하려 했던 바로 그 힘—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에로스의 힘—을 긍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일기』는 에로스가 혼외정사의 추진력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결혼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우리가 간음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 에로스의 신비로운 심신 작용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친화력』의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인 상황을 상기할 수 있다: 에두아르트는 상상 속에서 간음을 저지르지만 현실에서는 부부의 의무를 이행한다. 반면 『일기』의 주인공은 현실에서 간음을 하려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의 상상 속에서는 아내와의 에로틱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두 경우 모두 실제 간음은 일어나지 않지만, 혼인의 긍정은 모호하고 아이러니하게—소설에서는 비극적 아이러니, 시에서는 화해적 아이러니로─표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기』를 ‘도덕적 경향의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에커만이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분명 괴테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괴테는 이미 자신의 연대기 1810년 노트에서 이 새로운 시를 ‘에로틱-도덕적(erotisch-moralisch)’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묘사한 바 있다—이 충격적인 문구는 번역에 저항적이다. 괴테는 자신이 제시하는 ‘에로틱한 도덕성’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20세기의 위대한 괴테 숭배자인 토마스 만이 보여준 입장과도 통한다. 그의 작품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괴테가 시작한 이러한 ‘아이러니한 에로틱 도덕성’의 전형이자, 그 자신도 이를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괴테의 텍스트가 지닌 이처럼 매우 현대적인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일기』가 찬미하는 사랑의 개념은 《로마 비가》와의 긴밀한 친연성을 다시금 드러낸다. 《비가》에서 에로스의 힘은 프리아푸스의 형상으로 표현되었고,『일기』에서는 그 힘이 17연의 ‘이스테(Iste)’로 표현된다. 이는 강력한 목적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1810년의 이 시가, 《비가》에 영감을 주고 심지어 보다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던 베네치아 경구에 초점을 제공한 동일한 기획, 동일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그것은 바로 프리아푸스에게 현대 신들 가운데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되돌려주고, 시의 중심에 그를 다시금 자리매김하려는 의도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기』는 이상적 결혼에 대한 관념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재교육을 기록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겉보기에는 간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에로스를 도덕적 힘이자 ‘의무’의 규범과 제약보다 더욱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반으로 간주하는 결혼의 재정의를 제안하고 있다. 몰락하는 지주 계층이라는 구 사회 질서의 도덕적 딜레마에 초점을 맞춘 『친화력』과 비교할 때, 『일기』는 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독일에서 젊은 낭만주의자들—특히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이 그의 악명 높은 자유연애 소설 『루신데Lucinde』(1799)에서 처음 제안했던—현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개념을 호출한다. 영국의 경우에도 비슷한 발전이 있었는데, 로렌스 스톤Lawrence Stone은 그의 권위 있는 연구서 『영국의 가족, 성, 결혼The Family, Sex and Marriage in England, 1500–1800』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스톤에 따르면, 18세기 말에 이르러 ‘결혼과 성적 열정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이상’의 성 윤리가 점점 우위를 점해 가고 있었다. 바로 이 ‘아내와 정부의 역할의 통합’이라는 이상이, 『일기』가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바다.

무엇보다도 『일기』는 근대 에로시즘 시의 이정표로서 눈에 띈다. 이 시는 주제적으로 매우 새로운 영역, 즉 성적 실패의 심리학이라는 영역에 과감히 진입한다. 흥미롭게도, 1907년 이 시는 빈 정신분석학회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당시 막시밀리안 슈타이너Maximilian Steiner가 ‘기능성 발기부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언급한 시는 제목은 밝히지 않았으나 분명히 『일기』였다. 둘 다 1904년에 출간된 학술 재판에서 이 시를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슈타이너와 프로이트 모두 이 시를 ‘심인성 발기부전’의 사례로 인용했다. 프로이트는 이 시에서의 성적 실패의 심리적 원인에 대해 슈타이너와 해석을 달리한다. 그는 발기부전의 유형을 설명하면서 ‘심리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성적 활동이 정신적 요소 없이는 불가능한 개인들, 즉 환상 세계가 지배적인 사람들, 더 일반적으로는 성적 활동이 여성적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문명인Kulturmenschen 모두는 어느 정도 심인성 발기부전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정의에 근거하여, 프로이트는 여성을 지나치게 존중한 결과로 발기부전이 발생한다는 슈타이너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는 대신 발기부전의 원인을 ‘리비도가 무의식적(억압된) 관념이나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어서 이용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고 보며, 구체적으로는 ‘부재한 연인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본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는 여기서 부재한 ‘연인Geliebt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사랑하는 이’라는 뜻이지만, 특정 맥락에서는 ‘정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급은 위에서 설명한 『일기』에 대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시인들 중에서, 괴테는 발기부전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그리고 외설이나 위선 없이 다룬 최초의 인물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일기』가 유럽 낭만주의 시가 결정적으로 자기반성적 경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이 시는 사랑의 행위와 글쓰기의 행위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을 성찰함으로써, 프리아포스 이후의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시인의 조건을 조명한다. 또한 이 시는 흔히 ‘에로틱 문학’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실망시키는 지점—경박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혹은 단순히 외설적인—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 시는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으며, 진정으로 대담하면서도 경박하지 않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자들—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물론 노발리스Novalis와 브렌타노Brentano 같은 인물들—이 성을 문학적으로 다룰 때 짊어졌던 철학적, 종교적 짐으로부터 시를 기적처럼 자유롭게 유지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괴테는 성의 권력 게임에 대한 집착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드Marquis de Sade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은밀한 공간을 끊임없이 탐색하게 했던 바로 그 집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 작가가 쓴 에로틱 시와 마찬가지로, 괴테의 이 서사시는 남근 중심적 자기도취의 흔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은 소녀에 대한 서술자의 섬세함과 다정함(111행, 167행 이하)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완화된다. 『일기』는 사실상 고도로 정교한 인간 문서이며, 그 언어의 우아하고 능숙한 기교와 결합하여 괴테의 시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힐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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