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 (11)

업보Karma는 대물림되는가

by Youngh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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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제게는 오래된 친구 X가 있습니다. 네, 선생께서도 최근에 뉴스를 통해 들어보셨을 그 사람입니다. 한때는 세계적인 미술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촉망받던 신예 작가였습니다만, 이제는 헌정 사상 최악의 정관계 로비 사건의 핵심인물인 △의 장남으로 더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연일 보도가 올라오고 있지만 △의 범죄에 X가 어떤 형식으로든 개입한 정황은 한 번도 나온 적 없습니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어디서 찾았는지 X의 유학 시절 사진까지 올리면서 ‘더러운 돈으로 유학 가서 호의호식했겠네’ ‘원래 돈 많은 집에서도 제일 머리 나쁜 애한테 예체능 시킴’ ‘미술상도 현지의 배우신 꼰대들한테 로비해서 될 뻔했겠지’ 하며 인신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도 ‘아직 직접 관련된 증거는 안 나오지 않았냐, 중립기어 박자’ 는 이성적인 댓글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에 대고 ‘부모덕에 승승장구했으면 나락 갈 때도 같이 가야지’ ‘여기서 연좌제 운운하는 쿨병 걸린 병신들 나중에 자식 낳아서 남의 집 아이와 똑같이 안 대하기만 해 봐라’ 하며 마치 부모인 △의 잘못을 자식인 X가 같이 부담해야한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 주관적인 경험과 감상일 뿐이겠지만, 제가 아는 X는 예나 지금이나 미술에 진심인 한 명의 예술가일 뿐입니다. 그가 △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학비용을 지원받은 게 그가 도매금으로 비난받을 이유라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언젠가 맞을 자신의 파멸을 같이 할 선납금으로써 자식에게 유무형의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잖아요!

대체 왜 부모의 업보를 자식에게 지우는 데 일말의 회의도 하지 않는 걸까요?




□에게



음?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사실 사회적으로 봤을 땐 지극히 건전한 행동양식입니다. 똑같이 배려하고, 똑같이 혼내고,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이 기회를 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요즘 말 많고 탈 많은 ‘상대적 박탈감’ 문제는 불거지려야 불거질 수 없을 겁니다. 괜히 공자가 사심私心을 극복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잖습니까. 나를, 내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남과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원리상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현실의 법과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를 오롯이 실천하지 못할 뿐이지요.

사심을 극복하기가 지난하기에,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가 지난하기에 사람들은 당연한 듯 부모와 자식 간을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보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기심과 자기보존 욕구가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발동되어 왔기에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상에 생육하고 번성해 올 수 있었기도 합니다. 그러니 업보Karma에 대해 스스로의 문제에서 끝나는 게 아닌 자식, 더 나아가 후손에게도 대물림될 수 있다는 관점도 충분히 생겨날 수 있는 법이고요.

물론, 그 관점이 비겁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오늘 펜을 들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업보Karma를 도덕적 의무Dharma와 연결시켜 봅니다. 의무의 이행 결과에 따라 무한한 윤회Samsara의 사슬 속에서 업보를 받습니다. 선한 행위엔 축복받은 윤회를, 악한 행위엔 고통스러운 윤회를 받지요. 여기서 업보는 신에 의한 징벌이 아닌 일종의 자연 법칙입니다.

불교에서 업보는 윤회의 순환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의 중심 원칙입니다. 행동 자체보다는 이면의 의도(째타나cetana)를 강조하며, 모든 결과가 업보는 아니되, 의도에 따른 도덕적 행동이 업을 부른다고 봅니다. 열반(니르바나nirvāṇa)은 욕망과 무지를 물리쳐 이러한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업보 개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책임을 역설하는 몇몇 대목이나 도덕적 인과론과 비슷한 맥락이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윤회에 대한 경험적 증거도 없는 형이상학적 추정에 불과하고, 자칫 개인의 불행에 대해 전부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업을 원인으로 돌리는 폭력적인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업보를 당사자도 아닌 자식에게까지 묻는 게 당연하고, 그것이 일종의 자연적 인과율을 지녔다고 믿는다면,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뚜렷하게 물증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심증은 얼마든지 있는, 공정하지 못한 기회와 결과의 박탈과 특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들의 부모가 사회에서 쌓은 노력과 성취의 소산을 자식이 거저 이어받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 그러잖아요?

부모의 부와 성취를 자식이 거저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면, 부모의 죄와 업보 역시 자식에게 막무가내로 물으면 안 됩니다. ‘전자든 후자든 받기 싫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요? 네, 그게 불완전한 현실의 결과물이죠. 그럼 그들의 몫은 그들이 감수하라 하고 우린 우리 몫을 감수해야겠지요. 정말로 이 불완전한 현실에서 나 때문에 내 자식과 후손이 업보도 공덕도 물려받을 운명이라면, 하다못해 그 운명을 분산시키고 희석시키면 됩니다. 사심을 억누르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실천하고 그 모습을 우리 자식 앞에서도 철저히 보여주면 됩니다. 본인의 르상티망ressentiment을 합리화할 뿐인 노예도덕스러운 사적 제재보단 그것이 훨씬 건설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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