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때로 구원

봄 (1)

by Younghoo Kim

가게 앞을 빗자루로 쓸던 중 참새 한 마리가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우주는 살짝 무릎을 구부려 손을 내밀었다. 참새는 아무 경계심 없이 손으로 깡총 올라탔다.

“뭐냐, 배라도 고프냐?”

그러고 보니 오후에 점심 식사대용으로 먹던 칼로리바란스을 조금 남겼을 터이다. 우주는 빗자루를 들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빼고는 앞치마에 가져갔다. 마침 손끝에 봉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탁!’

손에서 놓은 빗자루가 균형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참새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참새의 모습을 좇자 석양이 시나브로 지는 하늘이 우주의 눈에 들어왔다. 한 달 전만 해도 이미 해가 졌을 시각이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계절이 바뀜에 따라 일상의 풍경 역시 조금씩 바뀌어 간다. 입고 있는 긴팔도 꽤 얇아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오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저녁에 몸이 서늘해지는 건 여전했다.

“우주야, 대충 쓸고 들어와 봐! 확인할 게 있어!”

가게 안에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우주는 “예!” 하고 안을 향해 소리치고는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 놓고 들어갔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담배 냄새가 났다. 사장이 점내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건 그날 영업이 끝났으니 손님을 안 받겠다는 뜻이다. 영업 중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세금 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반나절 지나 담배 냄새가 빠진다고 해도 민감한 손님은 불쾌해 할 거라고 우주가 말한 적 있지만, 괜찮다며 껄껄 웃고 넘어갔다.

사장은 책상 앞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문 채 한 손으로는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일일 매상과 재고를 체크하고 있던 중 호출한 걸 보니 잡담이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것이다.

“우주야, 혹시 오늘 물망초 씨앗 나갔니?”

“아뇨, 오늘 그거 산 손님 없었는데요?”

사장이 뜨악한 얼굴로 우주를 쳐다보았다. “그래, 없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장이 보고 있던 확인표를 우주는 들여다보았다. 분명 팔지도 않은 물망초 씨앗의 재고가 하나 줄어 있었다. 우주나 사장이 팔지 않았으면 남은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가게에 들어와 씨앗 봉지를 훔쳐간 것이다. 우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가게는 그 흔한 방범 카메라 하나 없이도 개업 이래 십 년 가까이 도난을 당한 적이 없다. 그 기록이 오늘 깨져버린 것이다.

“이젠 이 골목도 뒤숭숭해졌네, 이런 가게에까지 도둑이 들다니.”

사장은 알았으니 됐다는 듯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우주는 머리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지켜봤어야 하는데…”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어, 됐어. 그거 원가 천 원은 하냐? 게다가 너한테 가게 일 떠맡기다시피 하면서 방범카메라도 없이 도둑 드는 것까지 막으라고 하면 내가 양심이 없는 거지.”

사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우주가 보기에 이건 단순히 몇 백 원짜리 씨앗을 도둑맞은 문제로 끝날 게 아니었다. 직원이 상주하고 있는데도 침입자가 들어와서 절도를 했다. 이는 가게의 보안에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음을 의미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내일 업자 불러서 가게 곳곳에 방범카메라 설치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꽃집에서 훔쳐가 봤자 꽃인데 뭘. 게다가 손질해 놓은 꽃은 네가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훔쳐가 봤자 이런 씨앗이야. 누가 어디다 쓰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허허 웃고 호기심을 부풀리는 쪽이 로맨틱하지 않냐?”

“도둑이 들었는데 로맨틱이라뇨…”

“물망초라고, 물망초. Forget-me-not! ‘나를 잊지 말아요!’ 뭔가 모종의 메시지가 아닐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달래고자 너스레를 떠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 사장의 말에 우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용주가 저렇게 말하니 피고용인인 우주가 정색하고 나서기도 뭐했다. 뒤이어 사장은 짐짓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우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주 너, 오늘 어머니 늦게 들어오시지?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괜찮습니다. 혼자 해 먹을 수 있어요.”

“오늘은 은비가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온다고. 아저씨가 솜씨 발휘할 건데 한 명이라도 더 먹어 주는 게 기쁘지.”

꽃집 『메이 플라워』의 사장이자 어릴 적부터 우주를 예뻐해 준 일도는 옛날에 부인을 먼저 떠나보냈다. 홀로 적적하게 살던 일도의 유일한 낙은 딸 은비였다. 우주가 기억하기로 은비는 몸이 아파서 어릴 적엔 계속 집에만 있었다.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대신하며 점차 건강해지고, 우주와는 이전 직장에서 만났다. 그러나 은비는 우주만 보면 피하는 통에 아직까지도 대하기가 어색하다. 얼마 안 가 우주는 영문도 모른 채 해고되었는데, 사정을 알게 된 일도가 우주를 고용해 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좀…”

은비가 신경 쓰이던 우주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 하자 일도는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응? 밥 먹고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하하.”

어깨를 토닥이며 일도는 ‘히~’ 하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우주는 ‘오늘도 역시나 이렇게 되네.’ 생각했다. 옛날부터 우주는 저 미소 앞에서 한없이 약했다. 우주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말이다.




“그래서 그때 미주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한 거지. ‘개인의 윤리적 죄과에 연연하며 세상 깨끗한 척 하는 연놈들이나 손톱 밑의 가시 하나로 온 세상의 상처를 혼자 짊어진 마냥 우는 소리 하는 연놈들이나 지긋지긋하다’고 말이야! 하하하!”

일도는 우주의 어깨를 팡팡 때리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취기가 오른 얼굴만 보면 아주 대작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국산 밀 맥주 두 캔 즉 고작 1000cc를 마시고 만취 상태가 된 것이다. 일도가 말하는 미주 선배는 우주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우주야, 너희 어머니 되시는 강미주 여사는 말이다… 지금은 마트에서 계산대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작가의 소질이 뛰어난 사람이다. 너는 쉽게 상상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일도의 말대로 우주는 미주의 그런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우주의 기억 속의 미주는 그저 소박하고도 온화한 한 떨기 목련과도 같은 여성이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고, 말을 주도적으로 하기 보단 한없이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옛날부터… 그런 선배를…”

일도는 어느새 눈이 풀린 채 굉장히 드문드문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슬슬 곯아떨어질 거예요. 여긴 제가 치울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식사 때도 옆에서 조용히 있던 은비가 오늘 처음으로 우주에게 말을 걸었다. 우주는 고개를 돌려 은비를 보았다. 단발머리의 단정한 얼굴은 우주와 조금도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반찬 따로 챙겨놨으니까 가져가서 두 분이서 드세요.”

처음 만날 때부터 은비는 이런 태도였다. 공손하고 예의바르지만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혹시 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이런 식으로 틈날 때마다 일도에게 붙들려 와서 같이 식사를 하는 상황은 분명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일도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요, 실례했어요. 문단속 잘 하고, 사장님은 대충 침대에 눕히세요. 반찬 고마워요.”

우주는 미안함 반 어색함 반의 감정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안 자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자기 발로 걸어가지?”

은비는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일도를 향해 말했다. 일도는 바로 몸을 일으켜 코사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밤 11시에 입으로는 “딴 따다단 따다다다단~♬” 하며 테트리스 BGM을 흉내 내며 딸에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 중년 남성은 어디다 내놔도 부끄러운 존재였다.

“잘하지? 잘하지? 아빠 연기 완전 배우 뺨치지?”

“그만해.”

은비는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고 내뱉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계속 참고 있었는지 흰자가 벌겋게 된 채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비는 말을 이었다.

“소용없는 일이야. 삼 년 동안 충분히 확인했잖아? 더 이상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

일도는 어느새 은비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웃음기는 어느새 싹 사라진 채 우수에 찬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우주 덕분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있잖니…”



가로등과 달빛이 벗이 되어 주는 밤거리를 우주는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은비가 싸 준 반찬이 들려 있다. 아마 미주도 지금쯤 한창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변변히 저녁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서서 생활비를 버는 미주는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다. 『메이 플라워』의 매출이 워낙 적다 보니 우주는 사장과 비슷하게 받아도 최저시급 정도이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 뿐이니 사실상 우주가 절반을 가져가는 셈이다. 언젠가 좀 덜 받겠다고 우주가 이야기를 하자 일도는,

“하루 8시간씩 일 시키면서 그것도 안 주면 내가 잡혀가. 가게 매상이 적은 건 사장인 내가 신경 쓸 문제니까 걱정 말고 일만 해.”

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미주는 “고맙고, 미안하네, 늘…” 하며 쓸쓸한 눈빛으로 일도의 요리를 바라보았다.

우주는 일도가 미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두 사람은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고 했다. 대학교도 미주를 따라 전공까지 맞춰 들어갔었다고.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의 일도의 눈은 마치 연모하던 상급생이 졸업할 때 교복 단추를 받고 싶어 하는 여학생의 그것이었다. 우주는 내심 둘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미주에게 “아저씨 정도면 남자로서 괜찮지 않아요?” 라고 가끔씩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평생 고맙고 또 미안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야. 근데 남자로는 아들을 못 따라가지.” 하며 농담조로 흘려버리곤 했다.

4월의 밤거리는 살짝 쌀쌀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집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미주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주는 미리 밥상을 차려 놀라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앗!”

평소 그곳에 없던 커다란 무언가에 발이 걸려 우주는 앞으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반찬은 지키겠다고 반사적으로 팔을 올려서 봉지는 무사했지만, 나머지 한쪽 팔과 양 무릎을 그대로 돌에 찧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다들 자는 시간이라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뒤돌아서 발 언저리를 확인하자 거기엔 교복을 입은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순간 식은땀이 주르륵 하고 우주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우주는 차분히 정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뛰어가던 성인 남자가 온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크게 넘어졌고, 소녀는 그 무게를 그대로 받았다. 도대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 다쳤을 것이라고 우주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는 소녀의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그러나 들릴 만한 크기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기요, 괜찮아요? 저기요?”

대답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의식이 없어 보였다. 코에 손가락을 대 보니 숨은 쉬고 있었고, 목덜미를 짚어 보니 정맥도 확실히 뛰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소녀를 한밤중에 이런 돌바닥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일단 집으로 옮기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끄응…”

아픈 무릎과 팔꿈치를 어루만질 새도 없이 우주는 소녀를 등에 업고는, 오른손에는 봉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등에 업은 소녀의 둔부를 지탱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옮기는 데는 의식이 있는 사람의 경우보다 배로 힘이 든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오르던 108계단이 오늘만큼은 시지프스의 언덕처럼 느껴졌다.

‘투웅-’

입에 봉지를 물고 집 문을 따고 들어갈 즈음에는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우주는 냅다 소녀를 침대로 던졌다.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소녀의 가방을 벗겨서 신분을 확인할 수단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교과서도 필기구도 그 나잇대 여자아이라면 하나쯤 갖고 다닐 액세서리조차 없었다.

뭐 하나라도 걸리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우주는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가방 밑으로 손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당황하며 그대로 손을 들어 가방을 살펴보니 커터칼로 찢은 흔적, 가래침 자국, 때가 낀 껌딱지 등이 수두룩하게 나 있었다.

“뭐야, 얘…”

우주의 머릿속 생각이 무심코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자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소녀가 움찔거렸다. “일어났어요?” 우주는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문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쌔근쌔근하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주는 ‘그렇다면 좀 더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고는 가방을 관통한 손을 뻗어 손등으로 소녀의 종아리부터 쓸어내려갔다. 파르르 하고 몸을 떠는 것을 손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발바닥에 다다르자 우주는 씨앗을 묻을 흙을 파듯 손끝으로 움푹 들어간 곳을 살짝 긁었다.

“푸흡!”

씨앗을 묻을 토양을 고르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물이 너무 안 스며들면 씨앗이 썩을 수 있고, 물이 너무 잘 빠지면 씨앗이 애초에 싹을 틔우기 힘들다. 어느 생명이든 발아 단계에서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환경이 안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핫, 아하하하! 그만, 그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씨앗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 아스팔트 길가나 전봇대 밑에서 얼마 안 되는 먼지 수준의 흙에 터를 잡고 자라나는 그들을 보며, 생명이란 잘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태어날 생명을 쉽사리 배제할 수 없음을 성찰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사, 살려줘! 항복, 항복할 테니까!”

꽃을 키워 파는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이 자연의 본성을 이용하는 것과 자연이 사람의 인위를 묵묵히 포용하는 것의 비율이 각각 어느 정도나 될지 사색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식용 버섯을 재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통나무에 버섯균을 배양해서─

퍽!

“여자 다리 붙잡고 통나무가 뭐야! 숨질래!?”

일순간 우주의 눈앞이 번쩍하며 코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소녀의 발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코를 감싸 쥐었다. 따뜻한 액체가 손가락에 닿았다. 소녀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성년자 약취 유인에 강간 미수라니… 젊은 나이에 안됐네~”

“뭐, 뭐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상황을 제3자가 본다면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심지어 만인의 브라더인 시국이 형이 이 모습을 본다면 뭘 인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갈喝!”하며 꾸짖을 것이다. 당했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으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건지도 모른다. 코피를 흘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주를 내버려둔 채 소녀는 교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던졌다.

“욕실 좀 빌릴 테니까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쪽 처분은 목욕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볼게.”

우주는 ‘처음 본 남자 집에서 단둘이 있는데 목욕이라니 제대로 얕보였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분명 이 상황을 뒤집을 카드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주는 코피를 채 닦지도 않은 손으로 외투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지갑, 휴대폰… 외에는 별 다른 게 없었다. 지갑에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체크카드, 휴대폰은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액정이 심하게 깨져서 잘못 만졌다가는 손가락을 다칠 것 같았다. 소지품의 행색만 봐도 그다지 평범한 여고생의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소녀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긴 머리칼이 묘하게 젖은 게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룻밤만 재워 줘. 그럼 없었던 일로 할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우주는 “뭐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 어머니가 강미주 작가님 맞지? 수소문해서 겨우 알아냈어. 꼭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소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강미주 ‘작가님’이라, 일도가 술에 취하면 단골 레퍼토리로 읊는 옛날이야기지만 적어도 우주의 기억 속에는 글을 쓰는 미주의 모습은 티끌만큼도 없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낸 게 언제인지도 모를 전직 작가의 사생팬이 여고생이라니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미주는 마트에서 일하며 일반 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워킹맘이었다. 오래 전에 절필한 사람에게 굳이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우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 강미주 ‘작가님’은 없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뭔데 작가님을 못 만나게 하는데?”

우주는 너무나도 뻔한 전개에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지켜져야 하는 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늘 현재다. 아무리 모든 현재가 과거의 선택과 비선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거 때문에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이는 역설적으로 과거를 과거로서 보존하고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 사는 걸 알고 있을 정도라면 지금은 더 이상 ‘작가님’이 아니란 것도 알잖아? 이제 와서 ‘작가님’을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만 돌아가.”

소녀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다…너…때문이잖아…”

우주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소녀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펜을 내려놓았잖아! 나잇값도 못하는 아들이나 건사하려고!”

순간 우주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애써 알아보지는 않았었다. 물론 소녀의 외침은 흔한 우상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에서 비롯된 질투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미주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우주에겐 생판 모르는 제삼자의 외침의 충격이 터무니없이 크게 다가왔다.

별안간 우주에게 와락 달려든 소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다가오는 순간 눈에 들어온 입술엔 익숙한 빛깔의 틴트가 발라져 있었다. 미주의 틴트의 맛은 달콤하면서도 끝 맛이 미묘하게 써서 아련한 향수를 불러들였다. 우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 소중한 감정이 마음 속 저편에서 외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털썩!’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눈만 돌려서 확인하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미주가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내일모레 서른인 아들놈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방에서 여고생과 키스를 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부모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아직 해명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일도의 말대로라면 미주는 이지적인 사람이다. 지금 이 광경도 섣불리 판단하진 않을 것이었다.

“…삼십 분 뒤에 나와 보렴. 저녁 차려놓을게.”

조용히 그 말만을 남기고 미주는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방을 들고 사라졌다. 우주는 황급히 소녀를 밀치고는 입가를 소매로 거칠게 닦았다. 소녀는 어느새 아까 전 우주에게 으름장을 놓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대충 이때쯤 돌아오시더라고. 그렇다 해도 그쪽도 은근히 즐긴 거 아냐?”

“시끄러워. 너보다 십 년은 더 살았어. 스무 살도 안 된 발랑 까진 꼬맹이 장난질에 동요할 것 같아?”

그러자 소녀는 요염하게 왼손 검지와 중지를 펼치더니 교복 셔츠의 두 번째 단추와 세 번째 단추 사이를 벌렸다. 어렴풋하게 골짜기가 파인 속살을 리본이 달린 핑크색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었다.

“아직 깐 거 보지도 않았으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주는 이를 보며 꼬맹이 장난질이라 생각하며 코웃음 쳤다. 필사적으로 강한 체를 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꽤나 무리하고 있다는 걸 우주는 알 수 있었다. 우주는 미성숙한 빈유를 자랑하는 소녀의 턱 밑 10cm까지 얼굴을 가까이 댔다. 10초… 20초… 소녀의 체온이 미묘하게 올라가며 목 위로 피가 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얼굴은 안 봐도 뻔하다. 마무리를 지을 겸 우주는 소녀의 목덜미에 바람을 후 불었다.

“꺄앙!”

하이 톤의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소녀는 다급히 뒤로 몸을 뺐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수치심과 공포와 쾌락이 뒤섞여 있었다. 조금만 밀어붙여도 이렇게 동년배 여자아이다운 반응을 하는 아이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전직 작가를 만나려고 이렇게 대담한 짓까지 하며 모르는 남자가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비일상과의 조우가 로맨틱하게 흘러가는 건 어디까지나 창작물에서다. 더 이상 깊이 관여하면 귀찮아진다고 우주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주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무언가를 살며시 내려놓고는 눈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우주는 다가가서 파란 포장지의 그것을 주워들었다. 가로 세로 각각 2.5cm의 정사각형에는 ‘듀○스’라고 쓰여 있었다. 우주는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정 무렵, 부엌 식탁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며칠 굶기라도 한 건지 소녀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미주는 자신의 수저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는 소녀가 식사를 마치는 순간 내쫓을 작정이었다. 일도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마토 된장국까지 그릇째 들이키고는 소녀는 ‘끄윽’ 하며 배를 든든히 채웠다고 과시하는 생리현상을 발했다. “자, 그럼…” 하며 우주가 운을 띄우려 할 때였다.

“그럼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자야지? 잠옷은 빌려줄 테니 걱정 마렴.”

미주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권유는 이십여 년 전에 나온 게임의 미망인 캐릭터를 방불케 했다.

“아뇨, 어머니.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학생은 집에 돌아가야죠, 안 그래?”

우주는 말끝을 최대한 차갑게 하며 노골적으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으로 ‘허튼 소리 하지 말고 제발 조용히 가 다오’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소녀는 우주를 바라보지도 않고 미주를 향해 강아지 눈을 하고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오늘은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그러더니 단전에 손을 모으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란 걸 우주는 깨달았다. “이 늦은 시간에 ‘학생’을 바깥으로 내몰 수 없잖니?” 미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이면엔 미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럼 소파에서 자. 내일 아침 밝는 대로 알아서 나가고.”

우주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일어서서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뒤따라 일어서서 반찬 뚜껑을 덮고 냉장고로 가져갔다. 우주는 살며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밤중에 어머니 침실로 쳐들어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소녀는 “걱정 마, 그 정도 예의범절도 없을까봐?” 라 조그맣게 대꾸하며 팔을 걷고 고무장갑을 끼려 했다. 그러자 식탁을 닦던 미주가 입을 열었다.

“우주야, 손님에게 뒷정리를 시키는 게 어디 있니! 학생은 날 따라와요, 마침 딱 맞는 여자용 잠옷이 있어요.”

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는 정리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그녀를 따라 안방으로 향했다. 소녀는 살짝 뒤를 돌아보고는 우주에게 혀를 쑥 내밀었다. ‘초딩이냐?…’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던 우주는 다시 혼자서 부엌 정리를 계속했다.


침대에 누워 독서를 시작하려는 우주의 방문이 빼꼼하고 열렸다.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소녀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소녀는 의아한 어조로 우주에게 물었다.

“어째서 모자 가정에 이런 잠옷이 있는 거야?”

원피스형 잠옷은 소녀의 체형에 딱 맞았지만 실크 재질에 자주색은 청소년이 입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175cm의 장신을 자랑하는 미주가 입기엔 분명히 작았다. 우주는 미주가 저런 잠옷을 왜 갖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뭐, 이런 재미없는 아들이랑 단둘이 살다 보니 한번쯤 딸 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사신 거겠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가서 자.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알아서 집이든 학교든 가라고.”

우주는 시선을 간밤에 읽다 만 D.H. 로렌스의 책으로 돌렸다. 소녀는 축객령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방을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벽에 설치한 대형 책장의 유리문을 열었다. 우주는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고자 노력했다. 소녀는 우주를 신경 쓰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책등을 쓸기 시작했다.

“남자 방에 컴퓨터는 없는데 책은 엄청나게 많네.”

“컴퓨터를 쓸 일이 없으니까.”

우주는 컴퓨터는 고사하고, 핸드폰도 구형 2G폰을 들고 다닌다. 메이 플라워에서도 컴퓨터로 문서를 만들거나 매상을 정리하지 않다보니 어지간하면 쓸 기회조차 없다. 내일모레 서른이지만 우주는 인간관계라고는 미주를 제외하면 일도네 가족이 전부고, 별다른 거창한 취미도 없다 보니 책이 친구가 되었다.

삼 년 전만 해도 우주는 독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 해고되고 나서 메이 플라워에서 일하게 되자 미주는 오래된 책 몇십 권을 우주에게 건넸다.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들이야. 사려고 하면 몇 안 되는 중고본에 네다섯 배 가격을 지불해야 할 거야. 엄마가 해줄만한 건 이 정도고, 나머지는 네 손으로 차곡차곡 너만의 책장을 채워나가 보렴.”

그렇게 시작된 우주만의 주경야독은 처음에는 몇몇 어려운 책의 내용을 이해할 내공이 없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메마른 스펀지에는 물 몇 방울 떨어뜨려봤자 흔적도 남지 않는 법이다. 우주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가 해갈을 하듯 텅 빈 수조와도 같던 마음속에 텍스트의 굵은 물줄기를 대었다. 이제는 보다 높고 넓은 경지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잘 맞는지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그럼 글 같은 것도 쓰는 거야?”

소녀는 여전히 몸을 책장으로 돌린 채 물었다.

“아니. 굳이 필요를 못 느껴서.” 우주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삼 년 동안 독서를 하며 내심 자신이 성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를 글로 표현할 엄두는 차마 못 내고 있었다. 당장 어떤 주제로 써야할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 허세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데.” 갑자기 소녀의 목소리가 낮고 냉랭해졌다. 우주는 책에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정면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책장 가득 그럴듯한 커버의 양장본들만 쌓아 놓고 그 책들의 개요는 신이 나서 떠드는 주제에, 정작 자기만의 생각은 한 줄도 못 말하는 반푼이들은 널리고 널렸어.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어.”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지만 결국 전형적인 시비조에 불과하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자기만의 생각’ 같은 거창한 이데아를 내세워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해 희열을 느끼는 부류의 파토꾼들 말이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래도 우주보다 한 수 위인 듯하다.

“혹시라도 자기만의 생각 같은 게 어디 있냐며 냉소적인 자위를 하고 있다면 네 발전은 거기까지인 거고. 책장에만 머무른 채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면 아무리 지식이 쌓여도 인간으로서의 넌 제자리걸음일 거야.”

영 한심하다는 듯 소녀는 우주를 흘겨보았다. 내일모레 서른인 남자가 겨우 고등학생한테 독서를 두고 한 마디 반박도 못 하다니. 하지만 소녀의 말투에는 단순한 핀잔을 넘어 무언가 감정이 실린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자신 때문에 미주가 펜을 꺾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구심과 반발심이 반반 섞인 채 우주는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라면 책상 앞을 떠나 현실의 평범한 일과에 전력투구하는 전직 작가님도 한층 더 나은 인간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다고 봐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을 꺼내면서도 우주는 스스로 ‘어른은 비겁하네’ 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그저 책에서 읽은 이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며 그것이 현실에서도 가당한 이야기라 의심 없이 믿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은 다다를 수 없기에 이상이다. 아무리 과거에 잘 나갔던 문필가라도 더 이상 글로 돈을 벌 수 없으면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런 ‘평범한’ 일상에 쫒기다보면 새로운 소재를 탐색하고 사색할 정신적・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결국 평생 마음 한구석의 ‘작가로서의 자아’를 충족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한다.

그러나 미주는 우주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주 역시 괜히 송구스러워하지도 않고, 굳이 이제 와서 미주가 다시 작가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행복이며, 미주나 자신이나 그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굳이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소녀는 우주를 맹렬하게 쏘아보고는 홱 돌아서서 “잘래!” 하고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우주 역시 도저히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어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 모두 오늘밤은 꽤나 뒤척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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