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관우, 조조, 그리고 제갈량의 윤리
제일 먼저 개념의 외연을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흔히들 윤리와 도덕을 일상에서 혼용해 쓰지만, 개념적으로는 결이 꽤 다르다. 도덕moral을 ‘개인/집단이 옳다고 느끼고 배운 것’이라 한다면 윤리ethics는 ‘그 옳음은 왜 옳으며 언제까지 유효한지’를 묻는다. 즉 도덕이 내면화된 규범이라면 윤리는 그 규범을 비판・분석・체계화하는 사유의 틀이다.
도덕이 가정교육이나 종교, 지역 문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서 몸에 밴 것’이라면, 윤리는 철학적 성찰, 논증과 반론, 사회적 합의 등을 통해 형성되며, ‘왜?’라는 질문을 통해 도덕을 검토하고 수정한다.
그에 따라 도덕의 판단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식으로 집단의 평균값에 따르지만, 윤리의 판단은 이를 숙고하는 주체 자신이다. 한마디로 도덕은 ‘판단하지만’, 윤리는 ‘판단을 판단한다’.
이것이 내가 제목을 ‘도덕’이라 하지 않고 ‘윤리’라 하는 이유이다. 내가 다루려는 것은 위에 열거한 유비, 관우, 조조, 그리고 제갈량을 3~4세기 당시 해당 문화권의 관습이나 풍속에 의거해 직관적 내지 정서적으로 판단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통해 나타낸 각자의 논리와 성찰이다.
영웅담이나 정치사가 아닌 윤리의 관점에서 저 넷은 일생에 걸쳐 자신의 윤리를 관철했으며, 그를 해체함으로써 삼국지를 감상하는 새로운 관점을 밝힐 것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 둘 사항이 있는데, 이 글에서 다룰 네 인물의 신변잡기는 연의와 정사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 쪽을 배제하는 식이 아닌, 정사를 기반으로 하되 연의에 등장하는 사건이 각각의 인물들의 윤리에 부합하다고 판단할 경우 사례로써 포함시키는 방식을 채택할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사건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게 아니라 각 인물의 윤리를 드러내는 것이니 말이다.
늘 수하로 삼고 싶었다면서 온갖 선물과 작위로 회유하고, 끝내 떠나며 오관의 장수를 벤 것조차 묻지 않고 배웅해 주는 등 삼국지에서 조조의 관우 사랑은 유명하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관우가 자신의 의형의 생애의 숙적인 조조에게 대하는 태도 또한 정중하면서도 인간미가 있는 편이다.
당장 손권에게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 차이가 극명하다. 형주를 지키는 관우에게 손권이 사돈을 맺을 것을 청하자 “범의 자식이 개의 자식과 맺어지는 게 가당키나 하냐”며 인신공격을 한다든지, 손권을 ‘쥐새끼’, ‘오소리 새끼’로 칭한다.
이처럼 관우는 기본적으로 유비 말곤 위에 두지 않고, 자기 기준에 안 맞으면 왕이든 제후든 무례하게 굴 정도로, 오만해 보일 만큼 솔직하고 일직선적인 인물이다. 그런 관우가 조조에게는 끝까지 예는 갖추되, 마음은 팔지 않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는 단순히 ‘은혜를 입은 예의’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우선 관우는 조조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관우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가려 존중하는 유형이다. 권력이나 지위나 명분이 아니라, 기개가 있는지, 자기 욕망과 야망을 숨기지 않는지, 그리고 그를 책임지는지를 중시한다. 그런 관우에게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능력을 최우선으로 보고, 감정도 계산도 노골적인 조조는 적어도 원소나 유표 같은 명분이라는 이름의 가식으로 뭉친 속물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조조는 위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이는 관우도 비슷하게 갖고 있는 성향이다. 차이가 있다면 관우는 의義를 위해 손해도, 고립도 감수한다면 조조는 욕망을 위해 욕도, 오해도 감수한다는 것이다. 연의의 창작이지만 조조의 유명한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는 말은 이런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둘 다 자기 선택에 대한 비난을 견디는 유형이니 서로를 보면서 어느 지점에선가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우는 조조를 숙적 이전에 동급의 인간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관우는 조조에게 굽히는 대신 거리를 유지했다. 술도, 작위도, 적토마도 받았지만, 의형에 대한 충성은 단 한 번도 협상하지 않고, 떠날 때도 변명이나 사과 없이 당당히 떠났다.
만약 조조가 위선적이거나, 소인배처럼 굴었거나, 관우의 의를 조롱했다면, 관우는 조조를 인간적으로 상대조차 안 했을 것이다. 관우에게 조조는, 적이지만 드물게 예를 유지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다. 또한 둘은 그럼에도 끝내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조조는 또한 원하는 대상을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출사를 거부하는 사마의에게 “널 손권과 유비에게 가게 하느니 죽이겠다”고 엄포를 놔 끝내 신하로 만든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하지만 관우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관우는 조조가 부숴서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조조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조조가 잔인해 보이는 이유는 사람을 함부로 다뤄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포를 항장으로도 쓰지 않고 죽인 건 이미 숱한 배신을 통해 그가 통제 불가능하고 언제든 변심이 가능한 인물임을 파악해서였다. 공융이나 양수를 죽인 건 그들의 현학이나 후계 간섭이 조조의 권위를 위협하고 내정을 교란시킬 위험이 있어서였다. 연의에서 조조가 ‘나의 자방(장량)’이라고까지 칭한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내 죽게 한 것도 끝까지 한의 신하로 남으려는 그가 향후 위나라 체제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어서였다.
이처럼 조조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그에게 중요한 기준은 단 하나였으니 ‘이 인간이 내 질서 안에서 기능할 수 있는지’가 바로 그렇다. 그런 조조가 본 관우의 기능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 ‘시대의 상징성’, ‘민심’, ‘적장에게조차 존중받는 명성’… 그러나 동시에 관우는 회유하면 도망가고, 위협하면 반발하고, 직위로 묶어봤자 마음은 안 묶이는 인간이다.
한마디로 조조 입장에서 ‘통제할 수 없는 인간(기능)’이다. 그럼에도 조조는 관우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관우는 ‘의로움, 충절의 상징’이 되고, 조조는 유비에게 명분으로나 감정으로나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그런 유비가 남방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한 위의 통일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죽이는 순간 조조의 손해가 확정되는 상대였다.
그래서 조조는 관우를 소유하려 들지도 않고, 억지로 묶지도 않고, 그저 기다렸다. 자기 질서 밖의 관우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가 자신을 떠나면 다시 적으로 돌아설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왜 조조가 관우를 그렇게까지 대했는지 윤리적으로 사색해보자면, 관우는 조조가 가질 수 없었던 인간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관우는 욕망보다 신념이 앞서고, 계산보다 약속을 우선하고, 결과보다 자기 선택을 중시하는 인간이다. 욕망과 계산과 결과를 대놓고 중시하는 조조로선 그런 인간을 조소할지언정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조조는 언젠가 자신의 윤리가 실패했을 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다. 왜냐면 조조 역시 원래 욕망적이고 계산적이고 결과를 중시하도록 태어난 사람이라기보단, 살아남기 위해 그를 선택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관우를 부하로도, 적으로도 완전히 만들지 않고, 존재 자체로 둔 게 아닐까.
앞서 관우를 ‘욕망보다 신념이 앞서고, 계산보다 약속을 우선하고, 결과보다 자기 선택을 중시하는 인간’이라고 묘사했는데, 사실 삼국지 주요 인물 중에 관우 이상으로 그런 윤리를 일관되게 고수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유비다. 이 사실만으로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난 게 그저 미담이 아니라 윤리적 귀결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관우가 조조를 거부하고 유비를 선택한 이유를 ‘형제의 의’, ‘은혜’, ‘고지식함’으로만 따지는 건, 당시 원소와 싸우기 전 어디까지나 유력 군벌 중 하나였던 (즉 중원의 절반의 주인으로서 한 황실과 제후들의 공공의 적이 되리라곤 예상 못한)조조의 입지를 생각하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당장 그 전까지 공동의 적인 여포와 맞서 싸우고, 조조의 군사를 빌려 명명백백히 황제를 참칭한 원술을 토벌한 것만 봐도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 조조는 관우 입장에서 난세에 드문 ‘예를 갖출 만한 동등한 상대’기도 했고, 그런 상대가 체면도 내려놓고 자신의 환심을 사려 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관우가 끝내 유비를 선택한 이유는, 유비의 윤리는 ‘능력’이 아닌 ‘선택’의 윤리였기 때문이다. 유비는 중요한 기로에서 계산이 느려 보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늘 손해를 보는 쪽을 고른다. 장판파에서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끝끝내 데려갔다가 부인 하나를 잃고 조운과 아두를 잃을 뻔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유비는 유리해질 때도 원칙을 바꾸지 않았고, 불리해질 때도 약속을 유보하지 않았고, 명분이 깨질 상황에선 차라리 패배를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관우가 평생 중시한 의였다.
조조가 관우를 존중하고, 관우가 조조를 이해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조조는 신념을 수단으로 쓸 수는 있어도 신념을 목적으로 살 수는 없는 인간이다. 조조 곁에 있으면 관우의 윤리는 언젠가 무용지물 취급 받고, 그 순간이 오면 조조는 미련 없이 선을 넘는다. 관우는 그것을 알았기에 함께 설 수 없었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의 의의 지지자이자 동반자였다. 관우에게 유비는 의형이기 이전에, 주군이기 이전에, ‘존재를 승인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관우는 유비에게만은 자기 삶 전체를 맡겼다. 관우가 돌아간 건 ‘주군이자 형에 대한 충성’ 이전에 ‘마땅히 내가 존재할 곳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유비 곁에 있어야만 관우가 관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군신이나 의형제 관계보다 훨씬 무겁고 깊은 영역이다.
삼국지에서 가장 일관된 윤리를 행동으로 밀어붙인 두 인간의 유대에 조조가 끼어들 수 없던 건 이처럼 필연적이었고, 조조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다, 관우 이전에 유비가 조조에게 ‘마음에 든 상대에게 거부당하는 아픔’을 준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사실 조조가 초반에 유비를 대하는 태도는 ‘적수’가 아니라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정사에서 처음 두 사람이 만난, 동탁 토벌을 위해 18로 제후들이 집결하기도 전 시점에서, 유비는 능력도 애매하고, 세력도 미미하고, 출신도 애저녁에 가세가 기운 황실 후손 중 하나였다. (정작 황실 정통에 더 가까웠던 사람은 훗날 조조 휘하에 들어오는 유엽이었다) 이런 유비를 조조는 곁에 두며 대우하고, 보호하고, 공을 쌓을 기회를 주고, 끝내는 군사를 들려 서주로 보낸다. 실력과 명성이 보장된 여포, 유년기부터 청년기 시절의 벗이었던 원소에게 조조가 이런 대접 비슷한 거라도 한 적이 있는가?
유비가 원술을 토벌하러 가기 전 조조와의 술자리에서, 조조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뿐이다.” 이건 조조의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애초에 조조는 사람을 평가할 때 굳이 그런 입 발린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다. 당시 조조 이상의 명망과 세력이 있던 원소나 유표를 배제한 채 유비를 ‘같은 눈높이에서 난세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한 것이다. 조조는 유비에게서 자기와 같은 크기의 야망과, 다만 분명 다른 곳을 향한 윤리를 본 것이고, 그래서 더욱 유비에게 매달렸다.
관우와 유비의 차이를 정리하자면, 관우가 조조가 소유하고 싶은 이상형이면 유비는 조조가 대화하고 싶은 대칭점이었다. 관우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줄 존재였다면, 유비는 조조가 세계를 다르게 관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조조는 관우를 기다리기로 했고, 유비가 더욱 커서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관우와 달리 유비에게 조조는 선택지조차 아니었다. 관우는 조조를 떠났음에도 그를 이해하고 존중했지만, 유비는 조조를 이해함과 동시에 (오히려 그렇기에)단 한 번도 같이 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관우 이상으로 확고하고 일관된 유비의 세계와 윤리 안에서 조조는 타협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는 조조 입장에서는 관우의 거절보다도 더 뼈아픈 사실이었으리라. 그리고 유비에게서 그런 좌절을 겪었기에 관우에게는 ‘기다림’을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유비와 조조의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유비는 욕망보다 신념을 앞세우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이었고, 조조는 계산을 포기하는 순간 즉시 도태되는 인간이었다. 이는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생존 방식의 차이다.
유비가 조조처럼 욕망에 솔직해서 계산하며 살았으면, 군웅할거가 본격화되기도 전 초기 패배 몇 번으로 바로 흡수 내지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명분 없는 야심가’로조차 기록이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조조가 유비처럼 신념과 약속을 중시하며 살았어도 난세 초반에 진작 제거되었을 것이다. 난세에 힘 없는 자의 약속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처럼 유비는 자신의 삶이 조조의 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력의 차이 말고도 유비가 조조를 두려워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조조가 옳다면 자신이 틀린 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한번 선택한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도중에 타협하는 순간 조조의 세계가 승리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니 말이다. 유비가 손해를 봐도 되돌리지 않고, 패배해도 노선을 고수하고, 후한 황실이 이미 모든 면에서 무색해졌음에도 말년 가까이까지 한중왕에 머무르며 황실의 신하를 자청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조조 역시 유비를 죽이지 못했다. 유비야말로 조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던 다른 윤리이자, 자신이 끝내 선택하지 않은 한계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조조가 유비를 꺾는 건 그 반대보다 수월했다. 그러나 유비가 살아 있는 한 ‘조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살아남은 인간의 존재’라는 살아 있는 윤리를 무효화할 순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윤리가 살아 있어야 그 반대의 윤리 또한 생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조조는 유비를 쫓되 완전히 지우지 않았고, 유비를 인정했지만 흡수하지 않았고, 유비를 위협했지만 자신을 정당화하진 않았다.
그렇게 유비는 유비답게 살아남아서 촉한이라는 세계를, 조조는 조조답게 살아남아서 위라는 질서를 완성했다. 어느 한쪽이 통일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것보다는 난세에 서로 다른 윤리가 끝까지 자기 모습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여전히 두 사람을 두고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일 만하지 않은가.
형주에서 조인과 우금을 연달아 꺾으며 천지를 진동시키던 관우는 조조와 손권(여몽)의 합작으로 끝내 맥성에서 붙잡혀 처형된다.
관우 말년의 문제를 흔히 그의 오만함, 방심, 상황의 오판 등으로 정리한다. 그러나 더욱 치명적인 건 정보의 차단이다. 미방이나 부사인 같은 부장들의 능력이나 성품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내는 의견이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관우는 말년으로 갈수록 자기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점점 하지 않게 됐고, 반대 의견을 ‘비겁함’이나 ‘의지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 유명한 신삼국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말년의 관우를 연상해 보라. 마량이나 관평이 아무리 진언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 완고함은 정사 기준으로도 위화감이 없다.
그리고 그런 관우를 정면에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유비뿐이었다. 유비가 의형이라서? 상관이라서? 그것보다 중요한 건 관우에게 유비는 거의 똑 닮은 세계관(윤리)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제인 장비, 후임인 조운, 젊은 책사 제갈량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비만이 관우의 의와 자존을 건드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유비의 부재가 관우를 완성했고, 동시에 망쳤다. 형주 시기의 관우는 사실상 ‘유비 없는 관우’가 처음으로 완성된 모습이다. 독자적 군권으로 병력을 지휘하고, 독자적 외교로 위・오와 맞서고, 독자적 판단으로 정무를 처리하게 되자, 관우가 자신의 윤리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쌓아온 기량이 폭발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관우를 억제할 수 있는 인사나 체계가 없었고, 그렇게 관우는 손권이 촉오 동맹을 깰 지경까지 자극하고, 본성의 병력까지 다 빼서 번성을 무리하게 밀고, 미방과 부사인이 싸워보지도 않고 여몽에게 투항할 정도로 몰아세운 것이다.
관우에게 필요했던 건 정면으로 막아설 사람이었다. 원체 자존심이 강한 관우는 설득에도 잘 안 움직이고 명령에도 잘 안 꺾인다. 조조에게 투항했을 당시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던 장료와 서황 앞에서도 수시로 ‘유비가 살아있으면 당장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그럼에도 조조라는 동급의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예를 표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유비가 형주 근처에 있거나 수시로 관우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관우를 멈출 수 있었겠지만, 당장 얼마 전에 한중을 차지하고 그곳의 내정을 수습하기 바쁜 유비로선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촉이라는 조직이 관우가 형주의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도록 방치한 게 종국에는 관우의 종언을 예약한 셈이었다.
관우의 종언이 뼈아픈 이유는, 그게 미방과 부사인의 배신이나 판세를 오독하는 실수 정도로 전부 설명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관우라는 인간의 강점이 상황에 따라 그대로 약점이 되고, 그를 아무도 꺾지 못한 채 끝까지 밀어붙여진 결과가 그 자신의 파멸이었다. 역사가들은 “관우는 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관우가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관우다웠기 때문이다.
조인의 번성 탈환 이후 조조는 서황을 필두로 형주로 물밀듯이 남하한다. 그리고는 전군을 멈춰 세운다. 이는 손권과의 밀약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몽은 근거지를 잃은 관우를 차분히 조여들어간 끝에 맥성에서 사로잡고, 손권은 관우를 처형한다.
조조는 관우를 직접 치지 않았다. 만약 그랬으면 관우는 한 황실의 적에게 죽은 순사殉死한 충의의 아이콘으로 남을 것이고, 반反조조의 아이콘 유비와 촉의 명분은 응축되고, 모든 원한은 조조에게 집중될 것이다. 조조는 자신이 그렇게 곤란해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대신 그는 관우와의 전면 충돌을 피하고, 여몽(손권)과 관우의 일대일 대치 상황을 만들어, 끝내 손권이 관우의 처결에 책임을 지게 만들었다.
상술했듯 관우는 조조에게 소유하고 싶은 이상형이자 죽이면 손해를 보는 유니크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조조가 선택한 건 정면으로 깨뜨리는 게 아닌, 자신의 윤리 안에서 질식시키는 방식이었다. 촉이 비대해지는 걸 꺼릴 게 분명한 손권과 밀약을 맺어 오군이 뒤를 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빠져 어느 한쪽이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했다. 조조는 자신이 관우를 거부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세계가 관우를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관우에게 조조는 ‘예의를 갖출 만한 적’이 아닌가. 관우 입장에서는 조조의 공세에 당해 죽든 계략에 빠져 죽든 적어도 조조의 손에 죽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우를 추격해 목에 칼을 겨눈 건 유비나 자신 같은 신념형 인간도, 조조 같은 설계・계산형 인간도 아닌, 겨우 손권 같은 생존형 통치자였다. 이는 관우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반면 손권 입장에서도 이것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단이었다. 조조 입장에서도 황제를 모신 수도가 위협받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관우가 번성을 완전히 점거하고 정말로 허도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가면 오는 삼국 중 압도적인 약세로 전락해 언제 촉이나 위의 파죽지세에 수도가 점령당할지 모른다. 손권의 조바심과 위기 그리고 관우와의 혼담 파탄까지 잘 알고 있던 조조는 그렇게 직접 칼을 들지 않고도 손권이 동맹을 깨고 관우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했다. 그 결과, 유비의 원한은 오와 손권에 쏠리고, 이윽고 일어난 이릉 대전으로 인해 삼국의 1강 2약 체제가 완전히 고착되어 버리게 된다.
조조는 관우를 부하로 얻지 못했고, 적으로 부수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세계로 관우를 압사시켰다. 그렇게 조조는 말년에 자신의 윤리 혹은 난세의 철학을 완성했고, 인간으로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얼마 안 있어 관우의 뒤를 따랐다.
관우의 죽음은 촉의 패배나 오의 배신을 넘어 조조가 만든 세계가 요구한 필연적인 희생이었다. 이로써 조조는 조조 자신이 결코 될 수 없었던 인간형을 세계에서 제거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완벽히 입증했다. 관우의 가장 비참한 죽음은 조조식 윤리를 관철한 대가였고, 그를 증명한 사람이 조조 자신이라는 점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관우는 의도치 않게 조조에게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희소한 존재로 역사에 남게 된다.
관우, 그리고 조조의 사망 후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자 유비는 촉한의 황제로 즉위한다. 의제 장비마저 범강과 장달의 손에 죽고 그들이 오로 도주하자 유비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전부 끌어모아 오를 침공한다. 그리고 이릉에서 육손에게 참패를 당하고 백제성으로 도주해 그곳에서 생을 다한다.
위에 말했듯 관우에게 유비는 의형이자 상관 이전에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인간, ‘나를 나로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유비에게 관우 역시 자기 윤리가 허상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증인이자, 약속과 신념이 현실에서 통용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는 인간이었다. 유비가 아무리 패배하고, 근거지 없이 떠돌고, 빌어먹으며 조롱받을지언정, ‘(이런 자신을)관우와 장비가 따른다’는 사실만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관우는 유비에게 단순한 장수가 아닌, 자신의 삶의 살아 있는 정당성이었다.
그런 관우가 죽었다. 관우가 조조와 당당히 싸우다 전장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적어도 관우 자신의 의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면, 유비는 슬퍼했을지언정 자신의 세계를 부정당했다고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가장 신념적인(유비 자신과 똑 닮은) 인간인 관우가, 가장 욕망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조조)의 세계에서, 한때 사돈까지 맺었던 동맹국의 배신이라는 비루한 방식으로, 가장 경멸하는 인간(손권)에게, 마치 사냥 당하는 짐승처럼 내몰려 죽었다. 유비 입장에선 난세와, 난세가 만들어 낸 조조식 윤리가, 자신과 의제의 윤리를 난도질해서 저잣거리에 내동댕이친 것과 다름없었으리라.
유비의 오 원정은 군사적으로 보면 무모하고 정치적으로 보면 자살이나 다름없다. 이릉에서 당한 인적, 재정적 손실의 여파는 훗날 제갈량이 북벌을 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백미白眉’란 고사성어를 남길 정도의 준재였던 마량 같은 2세대 인재들의 상당수가 이릉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제갈량은 (일찍이 유비가 실속이 없다고 평한)마속 같은 인물까지도 기용해야 할 정도로 인력난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유비는 그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술했듯 유비는 반조조의 아이콘으로서, 조조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고자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할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더더욱 오가 아닌 위를 쳐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내가 세운 가설은 이렇다. 유비도 관우를 직접 죽인 건 손권이지만 그것이 조조가 만든 세계에서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조는 조조 자신의 세계(위魏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조식 윤리와 난세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에서 관우를 질식사시키고는 저승으로 도망쳐버렸다. 유비 자신의 삶의 정당성인 관우를 삼켜버린 조조의 세계에 맞서 (조조도 이미 없는데)반조조를 기치로 하여 약속과 신념을 관철하는 윤리를 유지하기엔 유비에게는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보다 쉬운 선택지를 취했으니, 조조의 세계의 부속품으로서 관우를 죽인 오와 손권에 복수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관우를 난세의 부적응자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유비는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명분도, 국력도, 자신의 노년도, 심지어 촉의 존속 가능성도 내던졌다.
패배나 승리와 상관없이, 이릉 대전을 통해 유비는 관우가 없어진 세계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윤리를 관철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유비의 지난 인생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개인적이고 감정적이었을지언정, 삶과 윤리의 동반자였던 의제에 대한 추모로서는 충분했기를 빌 뿐이다.
유비가 서촉에 입성하고, 이윽고 한중을 공략할 때, 얼마 후 형주 공방전 때도 제갈량은 성도에서 행정과 보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우는 형주에 남았고, 유비는 관우에게 형주 통치에 관한 모든 권한, 심지어 가절월(부하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한다. 의도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절묘한 인선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한 통일 후 유방이 소하를 가장 큰 공신으로 대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수도의 내정과 방비 그리고 전장으로의 물자 조달은 당시 국가 운용에서 가장 우선되는 사항이었고, 유비 체제 하에서의 그에 관한 제갈량의 능력은 대신할 자가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게다가 신임 면에서도, 군주가 전장에 나갔을 때 수도를 지키는 사람이 보통 세력의 2인자나 군주의 장자 즉 어지간하면 배신할 일이 없는 위치의 사람임을 고려하면 유비가 수어지교라고 표현한 제갈량은 마땅한 인선이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경력과 업적 면에서 유비 진영의 실질적인 2인자인 관우가, 적벽대전 이후 유비 세력의 시작의 땅이자 삼국의 최대 분쟁지인 형주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추측컨대, 무엇보다도 당장 관우와 제갈량이 매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아랫사람들이 긴장하고 유비가 속이 썩을 일이 없다.
관우는 자신의 의형은 물론이고 조조에 대해서도 예를 갖추지만, 자신의 의형이 그 관계를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까지 표현한 제갈량에 대해서는 같은 신하로서 최소한의 대접만 한다.
관우의 존중 기준은 삶을 통해 증명된 무게이다. 관우는 기본적으로 말보다 행적을, 이론보다 피땀을, 설계보다 돌파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무장형 인물이다. 조조 역시 뛰어난 문인이지만 어쨌든 그의 커리어의 핵심은 직접 전장을 구르고, 수없이 간계에 당하고 또 간계를 부리며, 그 모든 결과를 자기 몸으로 감당한 전쟁형 창업 군주이다. 한마디로 삶에 핏자국이 남은 인간이기에 관우는 예를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초기의 제갈량은 관우가 보기에는 전공도, 전장 경험도 없이, 그저 책 속에서 세상을 설계하는 인물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니 관우 생각에는 ‘말은 청산유수인데 거기다가 목숨을 걸어 본 적은 없는 애송이’로 찍히기 딱 좋다.
관우의 세계관은 명료하면서도 단순하다. ‘의를 지키면 사람이 따르고,’ ‘불의와 배신은 언젠가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가 딱히 의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조조는 의리조차 수단으로 쓰되 그런 자신에 대한 비난도 감수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관우가 보기에)제갈량의 세계관에 따르면 충성도 설계의 일부이고, 인의도 전략의 한 수고, 사람도 얼마든지 넣고 뺄 수 있는 자원일 뿐이다.
즉 관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말의 가치들조차 제갈량의 구조 속 말 몇 마디로 치환되어 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 딱 좋다. 제갈량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 같은 책상물림과 같은 높이에서 같은 곳을 보기도 싫고, 볼 수도 없다’는 정서적 반감이 문제다.
또 조조는 관우를 회유하고 시험했지만 끝까지 그의 유비에 대한 의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니 관우가 떠날 때도 곱게 보내 주는 낭만을 연출할 수 있었고, 관우는 조조에게 예로 대할 수 있었다. 반대로 제갈량은 관우 입장에선 의를 관리하려 들고, 충성을 운용하려 들고, 심할 경우 관우의 판단을 교정하려는 인물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우의 오만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 확신’이다. 관우가 제갈량을 가볍게 본 건 단순히 무투파로서 지성과 지략에 대한 수용과 통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관우에겐 ‘나는 이미 내 식대로 여기까지 왔다’는 확신이 있었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밑바닥부터 고생하고, 수많은 적장을 베는 등 자기 무력으로 입지를 만들고, 의형제 유비의 세계를 몸으로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이십대 중반의, 초야에 파묻혀 책이나 읽고 농사나 짓던, 명성만 있고 실적은 없는 사람이 책사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고 있으니, 관우 입장에선 ‘책상물림 애송이’로 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갈량 역시 자신에 대한 관우의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군사로서 이런저런 지시는 내리되, 대의와 명분만 던지고, 세부 운용은 간섭하지 않고, 결과를 감당하게 두었다. 유비에게 임관한 후 제갈량은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관우가 이성이 아닌 신념으로 움직이는 인간임을 말이다. 그래서 마초 임관 시 그와 싸워 보고 싶다는 관우의 서신에 답장으로 관우의 별칭인 미염공을 언급하면서 “익덕 장군과는 막상막하겠지만 염공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비위를 맞춰주는 등, 딱 직장 선후배로서의 선만 지켰을 것이다.
결국 관우는 ‘아직 삶에서 피냄새가 덜 나는 설계자’인 제갈량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제갈량 역시 그런 관우를 끝내 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천지를 진동케 한 관우의 독주와 비참한 종언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관우의 ‘칼의 윤리’와 제갈량의 ‘설계의 윤리’는 끝내 관우 생전에는 서로 이해할 접점을 만들 수 없었다.
유비 진영의 다른 사람들─나아가 삼국지를 처음 읽는 대부분의 어린이들─과 달리 관우는 젊은 제갈량에게서 ‘신출귀몰한 재능’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제갈량은, 말은 정확하고, 비전은 크고, 논리는 빈틈없지만, 그 말과 비전과 논리를 위해 자기 삶을 갈아 넣은 흔적이 없는 애송이였다. 특히 관우에게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삶을 갈아 넣은 흔적’이었다. 그리고 맥성에서 종언을 맞은 관우는 유비 사후의 제갈량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설계자’에서 ‘증명자’로 바뀐다. 유비 생전 제갈량은 유비라는 윤리를 전제로 자신의 설계를 투사할 뿐, 제갈량 본인은 그 윤리의 최전선에 설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한 발 물러난 자리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신선─마치 적벽에서 동남풍을 불러일으키듯─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비가 죽은 뒤엔 많은 게 달라졌다. 설계가 실패하면 변명할 대상도 없고, 결과의 책임을 미룰 수 있는 상위 윤리도 없고, 이젠 유비의 탁고를 받은 실질적 1인자로서 자기가 말한 것을 자기 몸으로 입증해야 한다. 유비가 “유선이 영 자질이 없어 보이면 그대가 제위에 오르라”고 한 말은 결코 제갈량의 충심을 자극하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닐 것이다. 유비에게 제갈량은 ‘나라와 아들을 맡길 신하’이기 전에 ‘자신의 윤리, 자신의 세계를 이어가 줄 계승자’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유비 사후의 제갈량은 기존의 촉한의 행정가를 넘어 대위對魏 전선의 전략가이자, 대오對吳 외교관이자, 무엇보다도 (유비에게서 계승한)자기 윤리의 순교자가 된다. 이 제갈량은 더 이상 신선 같지 않다. 지치고, 완고하고, 융통성 없고, 때로는 잔인하고,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이 제갈량을 ‘실낱같은 부흥의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고군분투한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만약 관우가 이때의 제갈량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고운 말이야 안 나왔겠지만 내심 ‘이젠 네 말에 피가 배었구나’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때의 제갈량은 유비에게서 계승한 윤리를 자신의 설계로 실천하고자 삶을 걸었고, 마속이 가정에서 참패하고, 이후에도 조진과 사마의에게 번번이 북진이 좌절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최후의 북벌 중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삶의 무게를 중시하는 관우의 윤리에서 이는 충분히 동급의 인간이다.
글을 시작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 정리했는데, 그래서 예전부터 나는 도덕에 관해서는 시큰둥한 편이었다. 복잡해진 동시에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입버릇처럼 도덕을 운운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한갓된 ‘자기 도덕’에 매몰된 사람이거나, 뒤에서 그 도덕조차 안 지키는 사람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윤리와 도덕을 구분하지 못하고 ‘윤리도덕’이라 뭉뚱그린다.
윤리는 성찰적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윤리를 구체화하고 도식화할 필요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윤리를 말과 행동에 반영한다. 그것은 때로는 논리적이고, 때로는 감정적이다. 이윽고 말과 행동의 일관성에 따라 그것은 설득력과 신뢰를 얻는다. 즉 윤리가 설득력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관적이어야 한다.
물론 판단되고 평가받는 걸 피하고자 말과 행동을 최소화하는 보신책도 있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을 현명한 부류에 놓는 경향이 있다. 하긴 내 윤리, 내 세계를 굳이 타인의 윤리와 세계를 잣대로 판단당하고 평가당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윤리를 지닌 인간이라면 부정하고 불의하다고 자신이 느끼는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침묵하고, 관심을 끄고, 가만히 있는 것은 자기보신이 아니라 자기 윤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평생 자기 윤리를 가져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비루한 사람은 적당히 남의 말과 행동을 의태하며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만 방점을 찍으면 된다. 그게 그 사람에게 허락된 윤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적어도 어떤 종류의 윤리를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윤리가 시험받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자신을 배치하여 그것을 보다 풍요롭게, 깊이 있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