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4)
‘쏴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미주의 몸을 적셨다. 미주는 옷을 입은 채였다. 두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녀는 양 팔을 벌려 위에서 내려오는 물세례를 맞았다. 퇴근하고 와서 어김없이 행하는 그녀의 샤워 습관이었다.
오늘 미주가 일하는 마트에서 20대 초반의 신입 아르바이트생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을 한 그녀는 젖먹이 아이가 딸려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동급생이던 아이 아빠는 그녀가 임신 중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는 부모의 명령에 그녀는 처음으로 반항했고, 달동네에 단칸방을 얻어 아이와 단둘이 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일하는 동안 아이는 휴게실에 혼자 있었다. 미주를 비롯한 중장년층 여직원들은 딸 뻘 되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겼고, 아이와 놀아 준다든지 분유를 먹인다든지 기저귀를 갈아준다든지 하며 도와주었다.
그런 그녀를 곱게 보지 않은 건 이삼십대 여직원들이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그녀는 10대 후반의 얼굴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고, 별달리 꾸미지 않아도, 똑같은 유니폼을 입었음에도 미모가 확연히 두드러졌다. 남직원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그녀에게 유독 친절했으며, 개중에는 같이 식사를 하자, 영화를 보자는 등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했다. 밖에서 만나자는 남직원의 권유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고,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모든 동료에게 ‘배려에 대한 감사’의 명목으로 음식이나 간단한 선물을 돌렸다.
그러나 젊은 여직원들의 질투는 막을 수 없었다. 뒤에서 하던 근거 없는 흉보기는 이윽고 가르치지도 않은 일 안 했다고 트집 잡기, 일감 몰아놓고 다 못 하면 갈구기 등 전형적인 직장 내 괴롭힘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돌아가는 사태를 눈치 챈 미주를 비롯한 나이 든 여직원들은 그녀와 같이 근무를 설 때면 최대한 그녀를 감쌌다. 그러자 젊은 여직원들은 남직원들까지 끌어들였다. 저 나이에 눈 맞아서 애 낳은 년이 보통 요물이겠냐고, 순진한 척 하면서 어장관리하는 거라고 회사에서든 술자리에서든 중상모략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남직원들 대다수가 그에 넘어가 근무 중 남자 손이 필요한 일마저 그녀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몇몇 생각 있는 남직원은 처음에는 그녀의 일을 도왔지만 다른 직원들의 ‘네 발로 나가게 해줄까’ 하는 협박에 결국 방관자란 이름의 동조자가 되었다.
간만에 오후에 출근한 미주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샘 때문에 신입을 왕따 시키고 끝내 내쫓은 젊은 여직원들에게 미주는 화가 치밀었다. 똑같은 돈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해도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먹여 살리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그녀와 자취 비용 내지 등록금 내지 용돈벌이를 위해 일하는 젊은 여직원들은 일에 대한 무게가 달랐다. 그렇다고 딱히 처음부터 특별대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뭐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갖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어려서 애 낳은 까진 년이라고 낙인을 새겨 놨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
미주는 먼 옛날을 떠올렸다. 그 친구와 비슷한 나이에 미혼모가 된 자신을. 학업을 중단하고 김치 공장에서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을 하며 비좁은 숙직실에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치된 우주를 신경 쓰느라 이중고에 시달리던 시절을. 단칸방에서 홀로 우주를 돌보느라 비몽사몽하며 글을 쓰던 나날을.
미주는 우주도, 자기 자신의 꿈도 놓지 않았다. 세상에 그 두 가지를 온전히 양립할 수 있는 부모는 한 줌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 역시 그 안에 편입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 생각했고 그를 위해 다른 불필요한 것들을 보거나 듣지 않았었다.
미주는 물에 젖어 바짝 달라붙은 옷을 하나씩 벗었다. 속옷을 벗고는 마지막으로 양 손목의 밴드를 풀었다. 자상의 흔적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미주는 빌었다. 그 친구가 새로운 곳에서 보다 많은 사랑을 받기를. 그녀가 베푼 사소한 호의의 몇 갑절만큼 그녀와 아이에게 돌아가기를.
잠옷으로 갈아입은 미주는 머리를 닦으며 침실에 들어섰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욕실에 들어갈 즈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거나,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발신 상대는 둘 다에 해당했다. 미주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봐? 샤워를 오래 하네.
일도의 경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십 년을 훨씬 넘긴 인연이라도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퇴근 시간을 파악하고 있고, 샤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파악하고 있다면 경도의 스토커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 이실직고해. 우리 집에 몰카 달아놨지?”
미주는 질렸다는 듯 말했다. 수화기 너머 일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런 조악한 장치로는 선배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충족할 수 없지. 여행자가 북극성을 보기 위해 필요한 건 두 눈과 올곧은 의지뿐이거든.
“글재주는 더럽게 없는 놈이 예나 지금이나 입 터는 건 청산유수야.”
미주는 거친 말투로 응수했다. 그녀의 입가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도를 제외하면 우주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이런 험한 말은 하지 않는다. 부모와 의절한 이상 일도는 미주의 막역지우이자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인연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미주의 말투가 낮고 부드러워졌다. 십 년 전 미주가 마트에서 일하고부터 두 사람의 소통은 극히 제한되었다. 설날과 추석 때 모이는 걸 제외하면 따로 만나지 않았고, 중요한 용건이 있으면 이렇게 미주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통화를 했다.
- 봄이 오고 있어서.
“…”
수화기 너머 일도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주는 잠자코 들었다.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잖아.
“…”
- 선배, 나 이거 허락받으려는 거 아니야. 난 하기로 결심했고, 그러니까 무조건 할 거야.
“일도야.”
미주는 입을 열었다.
“나하고 너, 그리고 은비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니?”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선배 입장에서 충분하다는 게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도의 목소리는 진지하고도 단호했다.
- 내 입장에서는, 우리가 우주에게 받은 걸 생각하면 평생을 바쳐도 충분하지 않아.
미주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지고한 구원이 있었고, 숭고한 희생이 있었고, 영원한 비극이 남았다. 구원과 희생과 비극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조용히 가슴에 묻고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일도는 또 한 명, 그를 겪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 선배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멋대로 하는 거니까, 책임도 뒷수습도 내 몫이야. 그럼 잘 자.
미주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일도의 마지막 말을 그녀는 곱씹었다. 결국 우주를 위해 자기 혼자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엄마인 자신을 제쳐 놓고.
“건방져…”
미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일도의 처절하리만치 우주를 위하는 헌신의 근간을 타고 올라가면 삼십여 년 전부터 변함없는 그녀를 향한 순애보가 있었다. 그녀가 우주를 낳을 때쯤 맞선에서 만난 상대와 결혼하고도 여전히 일도는 마음을 간직했다. 언제나 미주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도는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일도는 미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않았다. 미주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캐묻거나 적극적으로 부딪친 적이 없다. 일도는 그럼에도 미주와 우주에게 한결같이 호의적이었고, 미주는 차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일도마저 자신을 떠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일도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폼이나 잡고 앉았어. 하나도 안 멋있는데…”
창밖에는 초승달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전깃줄에 앉아 있던 참새가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미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득 미처 작별인사를 못한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 있는 그녀를 훔쳐볼 때면 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토닥이며 부르면 곧바로 입에서, 눈에서 미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주임님!” 이라 씩씩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구원해 왔을 것이다.
미주는 유리창을 거울삼아 자신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비치는 건 유리색의 밤하늘뿐이었다. 그럼에도 미주는 입에서, 눈에서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마워…” 라 내뱉었다.
시립도서관 4층의 고서 보관실은 낡고 해진 책들의 쾨쾨한 냄새로 가득했다. 우주는 관장을 따라 영미 문학 코너에 들어섰다. 관장은 “버틀러… 버틀러…” 하며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더니 한 권을 끄집어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책을 스윽 하고 닦으며 관장은 말했다.
“이 양반 안 되겠네요. 사적인 일로 일요일에 직원을 부려먹기나 하고.”
“전 괜찮습니다.”
우주는 관장이 건네주는 책을 받으며 말했다. 어지간하면 중고로라도 책을 사서 읽는 우주에게 도서관은 그다지 친숙한 공간은 아니었다. 일도가 이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킬 때나 가끔씩 가서 책을 빌려 오곤 했다.
“그럼 어서 나갈까요, 여기 공기가 그다지 몸에 좋지는 않아요.”
관장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주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느낌과 동시에 특별대우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일도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평소처럼 책 제목을 알려주지 않고 도서관 층수와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일도가 알려준 대로 열 시에 4층으로 올라가자 관장이 우주를 맞이했다. 관장은 열람실이 아닌 귀퉁이의 ‘출입금지’라 쓰인 문 앞으로 우주를 이끌고는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들어갔다. 십 분 후 다시 밖으로 나와 자물쇠를 잠그는 관장에게 우주는 물었다.
“2주 안에 반납하면 되죠?”
관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난 이만 갈게요. 모처럼 도서관에 왔는데 책이라도 둘러보고 가요.”
“…감사합니다.”
우주는 돌아서서 나가는 관장을 배웅하고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한 번쯤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우주는 3층으로 내려갔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 적당한 자리를 잡고는 우주는 책장 사이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두세 시간 안에 훑어보기만 해도 떡을 치는 수준의 분량과 난이도의 책’이었다.
마침 가방에는 늘 들고 다니는 노트도 들어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십 분 정도 서가를 두리번거리던 우주는 영화 관련 비평서 한 권을 뽑아들었다. 맡아 둔 자리에 앉고서는 첫 장을 펼쳐보았다. 신간이라 그런지 사용감이 없다시피 했다. 저자는 어느 미학 박사로 몇몇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우주 역시 게임 그래픽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던 만큼 나름 흥미가 돋았다.
이십 분도 채 안 되어 우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감히 평해보자면,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을 분명 봤었는데 책 내용에서 그런 기시감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기억나지도 않는 스쳐지나간 컷들을 벤야민이니 보드리야르니 하며 생경한 용어들을 나열하며 해석하고 있으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걸 읽고 생각을 정리한다는 건 무리였다.
우주는 한숨을 쉬며 책장을 덮었다. 문득 아까 전 관장에게 넘겨받은 책이 생각이 났다. 가방에서 봉지를 꺼내 열자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책표지에 도금되어 있어야 할 제목은 벗겨져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책장을 열자 첫 페이지에 비로소 『THE AUTHORESS OF THE ODYSSEY』라는 제목이 큰 활자로 찍혀 있었다. 맨 밑에는 영어로 된 출판처와 함께 189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뭐야, 너 이런 거 보니?”
우주의 등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쑥 내밀고 말했다. 순간 놀란 우주의 엉덩이가 들썩 하고 의자에서 들렸다. 우주가 뒤돌아보자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교복 차림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지?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우주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주가 읽고 있던 책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책장을 팔랑거리면서 말했다.
“전부 영어네. 게다가 이거 학술서잖아, 읽어낼 수 있어?”
“나 좀 봐.”
우주는 소녀가 들고 있던 책을 덮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뭐야? 무게나 잡고.”
“무게가 아니라 상호 존중의 문제야.”
우주와 소녀의 만남은 이걸로 벌써 네 번째였다. 이쯤 되면 이제 비일상적인 조우라고 말할 빈도와 횟수는 넘어섰다. 지난 수년간 지극히 한정적이던 우주의 인간관계에 새로운 관계가 편입된 거나 마찬가지다.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지금 지적해두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한테 반말하는 건 좋아. 나도 너한테 반말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너’라고 불리는 건 아닌 것 같아.”
“그건…”
“사회에서 만난 사람끼리 반말을 쓴다는 건 그만큼 지킬 건 지킨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거지. 안 그래?”
소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주는 잠자코 기다렸다. 딱히 어른 대접을 받겠다는 건 아니었다. 몇몇 면에서 소녀는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의 잡아먹을 것 같은 태도에서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안다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울 문제가 아니란 것도 알 것이다. 이윽고 소녀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싫어.”
이긴 건 자존심이었다. 우주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럼 너하고 난 여기서 끝이야. 앞으로 아는 체 하지 말도록.”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우주의 팔을 소녀가 붙잡았다.
“아직 약속 안 지켰잖아. 끝은 무슨 끝이야.”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준다는 거? 됐어. 아들이 이런 취급당하는 거 알면 치를 떠실걸?”
열람실 한가운데서 실랑이가 벌어지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주는 소녀를 뿌리치지 않고 적당히 힘을 뺀 채 소녀와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안해.”
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고분고분해지나 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뭐라고? 안 들렸어! 나 간다!”
“미안해!”
소녀가 버럭 외쳤다. 우주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소녀는 얼굴이 벌개진 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적어도 열 살 이상 어린 여자애와의 알력 싸움에서 이긴 데 의기양양해진 우주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소녀의 턱을 잡아들었다.
“아니쥐, 아니쥐. 어른한테는 반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오. 따라해 봐, ‘미안합니다.’”
소녀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토마토처럼 되었다. 우주는 표정을 바꾸고는 목소리를 깔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두 번은 없어. 자, 5초 준다.”
“미…”
소녀의 입이 가까스로 벌어졌다. 눈에는 오만 부의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우주는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미… 미…”
“풉!”
우주는 참고 있던 웃음을 거하게 터뜨리며 소녀의 안면에 아밀라아제를 분무했다. 이윽고 악에 받친 소녀가 도서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아 네가 반말하라며!!!”
그와 동시에 소녀는 우주의 양팔을 붙든 채 있는 힘껏 정강이를 차기 시작했다. 우주는 우주대로 소녀에게 꿀밤을 먹이기 시작했다. 우주와 소녀의 비명 소리, 참다못한 사람들이 항의하는 소리, 그리고 다급히 직원을 호출하는 사서의 외침으로 열람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5분 후, 사서와 직원들에게 내쫓긴 우주와 소녀는 도서관 밖 벤치에 앉아 씩씩거렸다. 우주는 정강이를 어루만지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 역시 머리를 감싸 쥐며 우주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넌 뭐하러으어어! 이어와(이거 놔)! 아하(아파)!”
소녀가 입을 열자마자 우주는 곧바로 양 볼을 잡아당겨 응징을 가했다.
“아할게(안 할게)! 어아고 아할게(너라고 안 할게)!”
소녀는 우주의 팔을 탁탁 치며 항복을 표시했다. 그제야 우주는 볼을 쥔 손을 풀었다. 소녀는 양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강우주 씨는 뭐 하러 왔는데?”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았다. 우주는 방금 전 소녀가 들춰보던 원서를 건넸다.
“이거 빌리러 온 거야.”
소녀는 책을 받아들고는 시선을 고정했다. 삽시간에 소녀는 책에 몰두했고, 약 십 초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게 되었다. 다른 책을 빌릴 새도 없이 쫓겨난 우주는 잠자코 소녀를 보고 있었다. 가끔씩 책장을 곁눈질했지만 빽빽하게 쓰인 영어를 보고는 이내 단념했다.
“읽으면 다 알아?”
“…”
우주의 질문에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다 읽기 전까지는 계속 이 모양일 것이다. 우주는 옆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소녀를 내버려둔 채 벤치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옆에 있는 되바라진 꼬맹이만 아니면 휴일에 밖에 나와 유유자적하는 것도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탁 하고 책장을 덮는 소리에 우주는 옆을 보았다. 소녀는 우주에게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책을 건넸다.
“재미없네.”
우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됐네.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다 읽어서.”
“그러게, 차라리 다른 책을 읽는 게 나았어.”
소녀는 도도하게 말했다. 우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렇게 읽으면서 내용이 머리에 다 들어와?”
그러자 소녀는 우주를 째려보았다. 눈동자엔 힘이 가득한 채 눈썹은 팔자를 그리고 있는 이 모습이야말로 소녀가 자신을 보는 기본 표정이 아닐까 우주는 생각했다.
“강우주 씨.”
“뭐, 뭐야?”
‘지금 내가 허세라도 부리는 줄 알아?’ 같은 반응을 예상한 우주는 긴장했다.
“강우주 씨가 작정하고 그림을 하나 그렸고, 세기의 명화네 뭐네 하며 호평을 받았다 쳐.”
소녀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강우주 씨가 강미주 작가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나, 직업이 전업 화가가 아닌 동네 꽃집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고 쳐.”
우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어 갔다.
“그러면 자칭 타칭 평론가들이 강우주 씨의 그림에 대고 ‘역시 예술가의 핏줄이라…’, ‘개천에서 용 났네…’ 같은 말을 반드시 하겠지. 그러면 유쾌한 기분이 들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봐.”
우주는 뒤통수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달을 가리키는 사람은 청중이 정작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이나 보면 힘 빠진단 소리야.”
우주는 그제야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예컨대 소녀가 소설을 썼고 그것이 문단이나 독자로부터 걸작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치자. 그런데 자의로든 타의로든 여고생이 그걸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출판사가 판촉을 위해 혹은 언론이 화제성을 노리고 그를 대서특필한다면, 당연히 작가의 나이와 성별에 초점을 맞춘 평이나 분석이 조금이라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책이 그런 내용이야?”
우주의 질문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질이 나빠. 원작의 여러 대목에서 저자의 선입관을 들먹이며 ‘이건 젊은 여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야.”
문득 우주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리면서도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작품 외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끌어들여 작품을 감상・평가하는 것과 작품 자체에서 작품 외적인 사실을 추론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시대적 사료가 희박한 고전 작품일수록 후자의 방법론은 문학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된다.
전자의 경우도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비유’는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달은 무기적이고 타자적인 자연 현상이지만, 작품은 오롯이 작가의 손에서 유기적인 작업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작품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논제는 타당하지만, 작품과 작가가 서로의 맥락에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젊은 여자가 작가’란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소녀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요컨대 소녀는 ‘작품만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존재로부터 완벽히 중립적인 작품은 없다. 더군다나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졌다. 언어는 수학 기호가 아닌 이상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고,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룬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소통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러한 상징체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아무리 자신을 감추어도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읽어내는 현상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다.
“강우주 씨 덕분에 앞으로 여긴 못 오겠네.”
“그래, 네 똥 참 굵다…”
우주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한 가지 새삼 확인한 건 이 소녀는 과연 자존심이 강한 게 이해가 될 정도로 똑똑하면서도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도 자기주장, 자기 철학이 없으면 그저 성능 좋은 기계를 체내에 탑재한 것에 불과하다. 마음속의 커다란 그릇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것이 세상에 등장하여 유행을 선도하고, 척도를 개편하고, 궁극적으로 패러다임을 새로 쓸 때,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제 아무리 천재라도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터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감의 원천은 다양할지언정 그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공통된 상징체계이며, 그를 등장시키는 수단 역시 마찬가지다. 이윽고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고서야 천재의 활약은 시작된다. 이것이 천재와 비천재의 결정적인 차이다. 비천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충실히 답습하는 것만으로 제 역량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친구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우주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럼, 친구가 된 기념으로, 번호 찍어.”
“뭐어어!?”
소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주 씨, 꽃집에서 양귀비 같은 거 키우는 거 아니지? 정신감정이라도 받는 게 어때?”
“너 그러다 임자 만나는 날엔 정말 큰 코 다친다….”
우주는 이제 소녀의 폭력적인 언사는 적당히 흘려듣기로 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간 언젠가 마음이 꺾일 것이다. 단 이쪽도 눈높이를 맞춰줘야 할 것이다.
“하긴 친구끼리 키스 같은 거 안 하지,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먼저 몸을 던져 낚은 것도, 집안에 들어와 들이댄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나 입술을 포개기 전까지 소녀는 우주에게 그 어떤 정서적 흥분도,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우주가 남자인 걸 알았지만 우주에게서 남자를 느끼진 않았다.
그러나 까치발을 하고 입을 맞추는 순간, 소녀는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입술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말초 신경의 모든 첨단까지 한 줄기 전류가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직후 괜히 어설프게 유혹한 것도 태연한 척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안 볼 줄 알았는데 무슨 인연인지 계속 마주치게 되었다. 말을 섞다 보니 점차 허물이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첫 만남부터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그… 그건…!”
“안 됐지만 꼬마 아가씨, 우린 친구까지가 마지노선이야. 그 이상 넘어가면 내가 전과자가 되고, 애초에 너 같은 껌딱지는 내 취향이──”
‘찰싹!’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우주는 왼쪽 볼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소녀는 오른손을 치켜든 채 벌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 질렀다.
“처음 봤을 때부터 혐오스럽고 싫었어! 지금은 열 배는 더 싫어!”
소녀는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뛰어갔다. 소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우주는 팔베개를 한 채 바라보았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저러한 아집도 그 나잇대 작가 지망생이 가질 법한 순수함의 발로일 터이다. 우주는 젊은 날의 미주도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