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3)
“그럼 나갔다 오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포터 열쇠를 빙빙 돌리며 일도는 가게 문을 나섰다. 우주는 일도의 등에 대고 까딱 목례하고는 다시 카운터에 앉았다. 아마 일도는 폐점 시간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온전히 우주만의 시간이었다. 청소는 문 닫기 한 시간 전부터 하면 되고 매상 정리는 일도와 같이 한다. 그때까지는 카운터와 입구만 잘 지키면 되었다.
우주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책 외의 다른 사물을 갖고 온 건 처음이었다. 굳이 말하면 책을 가져온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도가 없을 때는 말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딱히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오늘은 어머니가 몇 시 쯤 퇴근하실까’ 하는 정도였다.
우주에게 변화를 준 건 며칠 전 돌연 방문하여 평지풍파의 마이페이스로 모자를 뒤흔든 소녀의 말이었다.
“책장 가득 그럴듯한 커버의 양장본들만 쌓아 놓고 그 책들의 개요는 신이 나서 떠드는 주제에, 정작 자기만의 생각은 한 줄도 못 말하는 반푼이들은 널리고 널렸어.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어.”
어조는 다분히 도발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변명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면으로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때 욱했던 건 단순히 독서 습관을 지적받은 차원을 넘어 단조로운 일상 이면의 빈 껍데기 같은 그의 세계관을 지적받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날 이후 우주는 남아도는 시간 내내 그를 고민했고, 습관처럼 노트와 펜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무엇을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읽은 책이 그렇게 많은데 그로부터 나만의 문장을 한 마디도 짜내지 못한다는 데 우주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였다.
“하다못해 SNS 계정이란 걸 만들어서 짧게라도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하나…”
“SNS를 할 상대는 있어? 친구도 없으면서.”
“그야 당연히 없…”
대답을 하던 우주는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을 해 버렸다. 우주의 눈앞에는 알고 있는 얼굴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본 적 있는 유니폼을 입고 손에는 빵과 커피 봉지를 든 채 서 있던 소녀는 이내 정적을 깨고 말했다.
“난 분명히 전해 줬다. 네가 농땡이 피우고 있던 건 입 다물어 줄게, 월급 루팡.”
봉지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소녀는 얼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우주에게 눈길도 안 주고 등을 돌렸다. 정신을 차린 우주는 황급히 카운터에서 나와 소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게 대체 뭔데. 설명을 해 줘야 알 거 아냐.”
“설명은 너네 사장한테 들어. 난 배달 왔을 뿐이야.”
“너네 가게가 여기서 차로 삼십 분 걸리는데 면허도 없는 널 보냈다고? 말이 돼?”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실랑이를 했다. 앞치마를 입은 청년과 웨이트리스 복장의 소녀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할 법한 그림이었다. 소녀는 반대편 손으로 자신을 붙든 우주의 손을 짝 하고 때렸다.
“아프잖아! 궁금하면 너네 사장한테 물어보라고! 지금 바깥에 있으니까.”
우주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빗발쳤다. ‘아저씨가 왜? 이십 분 전에 나갔는데? 언제 거기까지 갔다오신 거지?’ 그러자 갑자기 문 밖에서 부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포터 엔진 소리였다.
우주는 황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포터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뒷면의 ‘메이 플라워’라는 문구는 분명히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우주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게 다 일도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웅-’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주는 한숨을 쉬며 폴더를 열어 수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지?
일도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요.”
- 난 오늘 어른의 약속이 있어서 가게로 안 돌아가고 바로 퇴근할 거다. 둘이서 맛있게 먹고, 너도 오늘은 한 시간 일찍 문단속하고 들어가. 걔는 큰길까지 바래다주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난감한 일이었다. 한 시간 일찍 닫는다고 해도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자긴 조기퇴근하고 놀고 있을 테니 그 시간까지 저 소녀와 단둘이 가게를 보라는 게 일도가 말한 ‘선물’의 정체였다.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 선물은 의미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로 들어서자 소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폰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사장님 전화…”
“…”
“어른의 약속 때문에 가게를 일찍 닫았대.”
“…”
“난 여기 있다가 너랑 같이 퇴근하래.”
“…”
“큰길에서 택시 탈 돈은 봉지에 넣어놨대.”
“큰길에서 우리 사장님이 널 픽업한 거였어?”
“…”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루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할게.”
진실은 오직 하나다. 중년 고용주들의 오지랖 때문에 힘없는 직원들이 팔자에도 없던 불편한 합동 근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삼 우주는 소녀의 웨이트리스 복장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절대영역을 과시하는 짧은 프릴 치마에 가슴팍에는 팔뚝만한 리본이 달려 있었다. 머리에 쓴 캡도 프릴과 큐빅이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늘 남자 둘밖에 없는 살풍경한 점내에 뜻밖의 이질적인 존재가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저기, 그만 하고 좀 들어오지…”
우주는 밖을 내다보고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묵묵히 화분을 닦고 있었다. 일도나 우주나 이삼일에 한번 닦으면 자주 닦는 수준이었다. 차도 사람도 얼마 오가지 않는 골목길이라 그렇게 먼지가 쌓일 일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점내의 진열대를 닦은 참이었다. 손님이 불필요한 허드렛일을 하고 직원이 그저 지켜보는 이런 상황이 한 시간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우주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북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우주는 밖으로 나와 행주를 든 소녀의 손을 붙들었다.
“이제 됐어. 들어와서 커피 마셔.”
“내버려 둬. 일하는 중이잖아.”
“네가 하는 건 일이 아냐, 어정쩡한 시간 낭비지. 할 일 없으면 먼저 가도 돼.”
“사장님이 차비까지 넣어놨는데 신뢰를 깨라는 거야?”
우주는 살짝 질렸다. 생각보다 고지식한 친구였다.
“여기 딱 두 명분의 커피하고 다과를 보면 모르겠어? 너네 사장과 우리 사장님이 놀러가는 김에 너하고 나도 오늘 하루 일하지 말고 놀라고 배려한 거야.”
“그걸 모를 줄 알아?”
“알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사장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도 아닌데.”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우주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옆에 있는 게 불편해서일 것이다. 자신은 전직 작가 강미주의 아들이고, 추측컨대 미주의 은퇴에는 자신에게 커다란 원인이 있다.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녀의 행동은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자신을 소진하면서 주변 사람에게도 불편함을 안겨 주는 소모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우주는 그런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 들어와서 같이 식사나 해. 아직 점심도 못 먹었잖아.”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우주는 가게로 들어왔다. 카운터 안의 하나뿐인 의자에 소녀를 반 억지로 앉히고 손에 도넛과 커피를 들렸다. 그리고 자신은 카운터 앞을 막아서다시피 허리를 기대고 커피를 손에 들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옆에 붙어만 있으라고?”
아까보다 다소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소녀가 물었다. 우주는 도넛을 우물거리며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너 글 쓸 줄 알지?”
소녀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우주는 카운터에 펼쳐 놓은 노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 거침없는 훈수를 둘 정도로 자신이 있으면, 날 도와줄 수 있겠지?”
우주의 말에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그런 걸 해 줘야 하는데?”
“너 내가 누구 아들인지 알지?”
“윽…”
소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네가 앞으로 나를 도와준다면 그만큼 우리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볼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뿐이야. 어머니도 나름대로 네가 맘에 드신 모양이고. 작가 지망생이 아니고 내 친구로서 말이야.”
소녀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우주는 결정타를 날렸다.
“아무리 절필했다고 해도 자기 작품 좋아하는 지망생을 완전히 쳐낼 수는 없는 법이거든. 창작자들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군상들이니까. 하다못해 네가 쓰는 글을 보여줄 기회라도 있지 않겠어?”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맴돌고 있었다. 우주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미주와 일도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보이는 표정이었다. 쓸쓸함과 기쁨이 공존하는 차마 말로 다 형용하지 못할 그런 표정이었다. 우주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은은한 행복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일도는 찻잔을 입에 대었다. 보이차의 미묘한 텁텁함이 느껴졌다. 창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무리를 이끌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일도는 아주 오래 전 풍경을 떠올렸다. 사내아이 같이 당차면서도, 혼자 있는 모습은 늘 어딘가 쓸쓸해 보였던 소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일도의 마음 한구석은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콕콕 찌르는 듯 아팠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래 전 연인은 일도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발견했다. 손수건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직감적으로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님을 눈치 챘다. 아까 전부터 보던 일도의 눈빛은 자신에게 결코 보인 적 없는, 가장 사랑하는 상대를 볼 때의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신을 비참한 기분까지 들게 만들었던 그의 악의 없는 순수함은 그때도 지금도 고귀한 것이라 그녀는 여겼다.
며칠 전 그녀는 일도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그의 진지한 목소리는 “소중한 사람의 멈춰선 시간을 다시 움직이고 싶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도와줄 수 있어?”라는 영문 모를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잠깐의 정적 후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일도가 제시하고, 그에 따라 그녀는 일도가 지목한 아르바이트 소녀를 오늘 우주와 함께 있게 했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일도는 창밖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느라 눈앞의 여자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방치한 것을 깨달았다. 소매로 대충 눈가를 닦고는 일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치마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온 자신과 대조적으로 그녀는 얼핏 봐도 한껏 꾸민 외양이었다.
“사장도 사장 나름이군. 이렇게 마당에 있다 온 티 팍팍 내는 주인이 있는 가게가 인기 있을 리가 없지.”
“당신하고는 일의 성격이 다르니까요.”
“오늘은 정말 고마워. 당신 가게 일에 사실상 지장을 주는 부탁이었는데 들어줘서.”
“…”
그녀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립스틱에 팔찌에 귀걸이에 구두까지 일도를 생각하며 밤새 코디네이트한 걸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 신경 쓴 반만이라도 나를 생각해 줄 수 없었냐’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자칫 옹졸해질 뻔한 자신이 싫어지기 직전 일도의 ‘고맙다’는 말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위안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었기에 가슴 아픈 기억도 많았지만, 이런 사람이었기에 사랑했음을 재차 떠올리게 되었다.
소녀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펜을 붙잡은 지 두 시간 째, 우주 앞의 종이는 한 글자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거나 글의 형태면 상관없으니 써 보라고 소녀가 말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제일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을까.
우주는 말 그대로 움쭉달싹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시간 전 소녀는 ‘일단 뭘 쓰고 나서 얘기해. 첨삭을 해 주든 지적을 해 주든 거기서부터야.’라고 말을 꺼내고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였다.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우주도 호기롭게 글을 쓰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고 단조로울지언정 선명한 일상이 있는데 뭐라도 쓸 게 없을까 싶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하루 일과를 일기처럼 쓰는 건 어린애들도 할 수 있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무언가 인상적인 사건을 조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게 그럴듯한 ‘어른의 일기’일 터였다. 그러나 최근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도무지 그런 인상적인 사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눈앞의 소녀와 며칠 전 조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당사자에게 읽힐 글의 주제로는 낯 뜨겁기 짝이 없었다. 그 외에는 매일 밤 침대 머리맡에서 읽는 책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막상 글로 쓰려니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지금까지 읽어 온 숱한 철학자들 중 누구의 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고, 애써 기억해내도 글로 쓰기엔 저자의 해석도, 자신의 해석도 없다시피 했다.
결국 우주는 펜을 내려놓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될 것 같네. 도저히 쓰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서 말이야.”
아직도 남아 있는 알량한 자존심에 우주는 괜한 말을 덧붙였다. 소녀는 작고 낮게,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쓰고 싶은 게 없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욕망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욕망이 충족됨과 동시에 증폭되기도 하고, 쓰지 않음으로써 욕망이 거세되기도 하는 법이야. 그걸 다른 표현 수단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어느새 창문으로 석양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 기댄 소녀의 모습이 세피아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장소와 시간이건만 우주에게는 소녀의 존재만으로 유사한 나머지 틈새가 없어 ‘보이던’ 일상에 뚜렷한 균열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유사한 일상은 어디까지나 유사할 뿐 동일하지는 않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시간은 연속적일지언정 영속적이진 않다. 정말로 영속적=무기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 앞에선 찰나의 반짝임에 불과한 존재인 인간은 당장 눈앞의 순간까지도 보장되지 않은 일상에 익숙해져서는 그에 의존하거나 한탄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야.’
미주와 일도, 그리고 은비가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 소녀도 다를 바 없었다. 우주의 눈에 그녀는 위태로운 하나의 촛불 같아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촛불.
우주는 펜을 움직여 눈앞의 소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눈동자, 머리칼, 옷의 주름… 문득 우주에게 눈길을 돌린 소녀는 깜짝 놀랐다. 우주는 자신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펜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든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가게 안도 선선해졌건만 우주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색이 마젠타와 시안을 거쳐 유리瑠璃 빛깔로 물들 무렵, 은비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원의 확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음 장치가 딸린 창문과 두 대의 신디사이저, 서라운드 스피커 겸 앰프, 독일제 PC 일체형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딸린 이 방은 음악 감독 직함을 단 그녀의 카드키로만 출입이 가능한 전용 공간이었다.
오전에 마침내 콘셉트에 맞춘 미디 노트를 다 따놓고 오후부터 이런저런 가상악기로 여러 버전을 시험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은비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오지 않았다. 유럽의 U사에서 사용 중이라는 최신 악기 음원이랍시고 회사 차원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입했건만 이래서야 본전도 못 뽑을 지경이었다.
‘비싸다고 언제나 좋은 법은 없지.’
은비는 헤드폰을 벗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사 년 전에 비슷한 분위기의 트랙을 만든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나두워크스의 러브콜을 받아 입사한 은비의 걸작이었다. 그때 썼던 가상 악기 라이브러리는 악기 수는 적지만 절묘하게 은비의 마음에 드는 구성을 하고 있었다. 사원 보급용 PC로 작업한 거라 라이브러리고 작업 원본이고 복사하지 못한 채 하드에 보관되었고, 회사 NAS에는 상용 트랙만 저장되어 있다──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책상 한편에 있는 뚜껑을 열고 렌즈가 내장된 아크릴에 검지를 갖다 대자 ‘철컥’ 소리를 내며 서랍이 열렸다. 오직 이것만이 서랍의 잠금을 해제하는 방법이었다. 가상악기의 정밀도와 일체감이 지금 같지 않던 옛날에는 레코딩의 상당 부분을 직접 연주해서 입력했고, 피아노를 치던 습관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손끝의 지문이 얼마든지 변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직접 연주하는 비중이 대폭 줄고, 더 이상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도 않았다.
은비는 허리를 숙여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목적은 삼 년 전 보급용 PC에 사용되던 모델의 하드였다. 당시 첫 작업물을 소장하고 싶던 은비는 한 아트팀 선임에게 남몰래 부탁했고, 그는 어딘가에서 똑같은 사양의 하드를 공수하여 보안 소프트웨어를 제외한 내용물을 통째로 복사해주었다. 걸렸다간 해고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정도 일을 스스럼없이 해 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이다.
감상적으로 되려는 기분을 애써 떨치고 은비는 맨 밑에서 하드를 찾아 끄집어내었다. 다행히 지퍼백에 보관되어 있어서 습기에 디스크가 손상되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고가의 음향 기기들을 배치한 만큼 평소에도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물병을 늘 옆에 두고 있을 정도다. 단자를 자세히 보니 역시 은비가 지금 사용하는 일체형 PC와는 사양이 맞지 않았다. 소프트웨어를 복사한다고 해도 내장된 가상 악기를 지금 쓰는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인식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이렇게 되잖아…”
은비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는 하드를 연결해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해당 악기 파트를 직접 신디사이저로 연주해서 외부 음원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은비의 눈에 문득 탐색기의 파일 하나가 띄었다. ‘lover.mp4’라는 이름의 동영상 파일이었다.
은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적어도 자신은 디렉터리 최상단에 동영상 파일을 덩그러니 널어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적나라한 공작을 해둘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겨우 떨쳐냈더니 이제 와서 이런 재회는 비겁하다. 그러나 차마 그걸 삭제할 수 없었다. 은비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정말로 떨쳐냈다면 이런 것 정도로 흔들릴 리가 없어.’
굳은 각오와 함께 은비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자신이 입사할 무렵 작곡한 트랙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면에는 그림 한 장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림 속에는 그때의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한 채 악보와 씨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은비는 놀랐다. 자신이 아는 그는 그 날 이후 그림을 그리기 위해 펜을 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그의 오른 손끝은 망가졌을 터였다. 그러나 펜의 터치나 얼굴 묘사는 그림에 문외한인 은비조차도 기억하는 그만의 것이었다.
“어, 어, 이렇게 하면 녹음되나?”
“!”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는 순간 입을 가렸다.
“놀랐지? 몇 년 만에 펜을 잡아본 건지 원. 그래도 역시 폼은 어디 안 간다 이 말이야~”
연인이던 시절, 장난스럽게 자신에게 건네던 목소리.
“…라고 으스대고 싶지만, 사실은 꽤 고생 좀 했어. 조금만 손끝에 힘을 줘도 팔이 저릴 듯이 아파서 말이야.”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나오던 어조와 말투.
“근데 어쩌겠어. 연인이 내 옆에 있겠다고 음대에서 장학생으로 부르는 것도 마다하고 회사에 들어와서, 대학 생활도 건너뛰고 월급쟁이의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어?”
애틋한 시선으로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목소리.
은비의 눈에서 흐른 눈물은 볼을 타고 턱에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좋아했었다. 사랑했었다. 그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었고, 그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사람을 오롯이 소유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모르던 철부지였지만, 올곧은 마음만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애써 외면해 왔을 뿐이다.
아픔을 딛고 당차게 자신의 길을 걷는 어른의 행세를 해 왔지만 여전히 은비의 마음속에는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소녀가 남아있었다. 그걸 깨닫게 해 준 건 한때의 연인이 숨겨 놓은 사랑의 마법이었다.
우주가 펜을 놓은 건 폐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의존할 수 있는 햇빛은 진작 한 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제야 소녀는 몸을 움직여 전등을 켜고는 우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살며시 앞에 놓인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볼펜만으로 그린 그림인데도 음영의 묘사가 마치 색감이 있는 착각을 일으키며 눈에 비쳤다.
“그림을 배웠던 거야?”
소녀는 그림에 눈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아마 안 배웠을 걸? 비슷한 일은 했지만.”
우주의 대답에 소녀는 내심 갸우뚱했다. 배웠으면 배운 거고 안 배웠으면 안 배운 거지 저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한 재능이네. 다시 봤어.”
소녀는 눈을 들어 우주를 쳐다보았다. 우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녀는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마당의 조리개에 있는 물을 끼얹다시피 하고는 꼭 짜서 우주의 오른손을 동여맸다. 우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긴 했나 보네. 갑자기 다정한 짓도 하고.”
“쓸데없는 소린 됐고.”
소녀는 정색하고는 뒤돌아서 문으로 향했다.
“너 때문에 퇴근 시간은 한참 넘겼으니까 난 멋대로 가겠어. 너도 알아서 가든지 말든지 해.”
“아…”
우주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몸을 일으켜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바로 소녀의 말에 가로막혔다.
“저번에는 내가 쉽게 말을 했어. …그 정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굳이 글로 표현해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네.”
딸랑, 하고 방울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우주는 오른손에 묶인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이거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살며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아까보단 저린 감이 덜했다. 언제, 무슨 일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주는 오른손의 상태에 위화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오른손 때문에 큰 불편을 느낀 적도 없었다.
회사 다닐 때 타블렛 펜을 쓰긴 했지만 우주의 담당은 3D 폴리곤을 레벨 디자이너의 의도에 맞게 구현하도록 조율하는 테크니컬 아티스트였기에 직접 디자인 초안을 딸 일은 없었다. 꽃집에서 일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일정 무게 미만의 사물을 드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어지간히 무거운 건 일도와 같이 작업한다. 모든 서류 작업과 정산은 일도가 하기 때문에 업무상 우주가 펜을 들 일은 없다.
만약 방금 전에 글을 쓸 내용이 있었다고 해도 도중에 손이 아파서 단념했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감각만큼은 우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우주의 기억 속에 학교 수업 외에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어떻게 연출해야 효과적으로 전달되는지를 우주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