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5)
달동네의 밤은 언제나 음산하리만치 조용하다. 마스터 업을 두 달 앞둔 시점부터 은비는 밤 9시 전에 퇴근하는 날이 없었다. 회사를 나와서는 사십 분 가까이 전철을 타야 집에서 도보로 이십 분 걸리는 역에 도착했다. 계단과 비탈길로 이루어진 이십 분을 거쳐야 비로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도는 보증금을 대줄 테니 회사 근처에 방을 얻길 권했지만 은비는 “판교 근처에서 방 구해서 살면 삼각김밥이랑 라면만 먹고 살아야 돼.”라며 사양했다. 연차는 얼마 안 될지언정 명색이 중견 게임회사의 부서장인 만큼 아무렴 삼각김밥이랑 라면만 먹어야 한다는 말은 오버였다. 그러나 은비는 기꺼이 편도 한 시간 통근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녀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치즈와 마카로니의 향기가 은비를 반겼다. 식탁에는 그라탕이 노릇노릇한 윤기를 발하며 부글거리고 있었다. 앞치마 차림의 일도가 유리잔에 주스를 따르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오렴.”
잠시 후 부녀는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척 봐도 고열량인 걸 알 수 있는 그라탕의 비주얼에 은비는 살짝 질린 기색을 보였다. 일도는 너스레를 떨었다.
“창작이란 게 어디 보통 힘든 일이니. 이 정돈 먹어야 버틴다.”
은비는 피식 웃으며 수저를 들어 그라탕을 푹 찍었다. 그대로 수저를 뜨자 주욱 늘어난 치즈에 옥수수와 마카로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왔다. 후후 불어서는 입 안에 넣고 씹자 옥수수와 마카로니의 톡톡 터지는 식감에 은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도는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은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일도는 어김없이 야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은비의 업무가 크런치 모드에 돌입하는 기간에는 일도는 은비를 기다리느라 저녁을 먹지 않다시피 했다.
생활비의 기여도를 따지면 물론 은비가 7할은 내고 있다.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책을 보며 유유자적하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어슬렁어슬렁 손님도 잘 안 오는 가게에 마실 가듯 출근하는 일도의 수입은 은비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생기면 일도는 우주보다 먼저 현장에 들어가서는 저녁에 우주를 먼저 퇴근시키고 자신은 그날 목표량을 다 채우고서야 집에 들어왔다. 일도의 ‘가족 밥상’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도가 은비에게 회사 근처에 방을 얻을 것을 권한 건 상당히 오랜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일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은비는 “안 바쁠 땐 오히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게 손해야” 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간 한정 잔업과 야근이라도 통근을 고집하려면 은비나 일도나 적잖이 수고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은비가 그럼에도 그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막차 끊기면 나도 방법 없어. 회사에서 자든 찜질방에서 자든 할게.”
은비의 말에 일도는 틈을 주지 않고 대꾸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자는 곳이 아냐. 정 막차 끊기면 포터로 마중 나갈게.”
은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그라탕을 삼켰다. 은비가 기억하는 한 일도는 그 부분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어떤 미사여구와 명분을 들이대도 회사는 회사고 사원은 사원일 뿐이다. 회사 생활과 개인 생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일상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게 일도의 신조였다. 일도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딸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중한 일상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임을, 그조차도 하루아침에 상실할 수 있는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이견은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선 있을 수 없었다.
“일은 어떠니? 이번에는 안 해본 거 하느라 꽤 힘들다며?”
일도는 빈 잔에 주스를 채우며 물었다. 은비는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상 이번 작품이 감독으로서 데뷔작이라 모르는 것투성이야. 게임 장르도 SF는 처음이라 콘셉트 잡는 것부터가 일이었어.”
은비가 음악 감독으로 승진하게 된 계기는 이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전임자의 갑작스러운 퇴사였다. 어디까지나 임시였지만 바통을 이어받아 사운드팀을 이끌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한 공로로 은비는 그대로 정식으로 감독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은비의 팀은 신규 프로젝트에 배속되었다. SF 마니아층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태미수 작가의 소설 『별과 바다의 전쟁』을 원안으로 한 어드벤처 액션 게임 『버스터 걸즈』를 제작하는 기획이 통과되었는데, 총괄 디렉터가 바로 전작까지 함께 한 사운드팀이 아닌 은비의 팀을 지목한 것이다.
“그 친구도 한국인 종특이랑은 거리가 있나 보다.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인데 전 파트를 3년차 이하의 신예들로 꾸렸다면서? 모험 좋아하면 회사 생활 편하게 하기 힘들텐데.”
“신예들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이니까. 성공하면 커리어가 되고 실패해도 총감독 탓하면 끝이고.”
자신의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으면서도 책임에서 자유로운 처지가 되면 어떤 사람들은 해보고 싶던 시도를 죄다 하면서 열의에 불타고, 어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열심히 하는 시늉만 한다. 은비는 전자였다. 사무실에 작가의 전작들을 구비해 틈틈이 읽으며, 정규 회의 시간 외에도 총괄 디렉터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일도는 사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던 은비가 입학만 하면 장학생 신분이 확정된 음대를 걷어차고 취직을 하겠다고 밝힌 날.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는 진로에 의아하게 여긴 일도가 집요하게 묻자,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은비는 “우주 오빠가 있으니까…” 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이 교제하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일도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차분히 말문을 떼었다.
- 딱히 대학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우리 은비라면 뭘 하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 걸 아빠가 알지. 하지만 한 가지만 확인하마. 네 음악은 계속되는 거니?
그러자 은비는 일도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그 사람과 대등하게 있기 위해서라도, 음악은 그치지 않아.
얼마 후 은비는 판교 소재의 게임회사 제나두워크스에 내정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당시 일도는 여러 가지를 우려했지만 무엇보다도 은비의 열정이 우주와 같은 타인을 촉매로 유지되는 걸 안타까워했다. 만약 관계가 어긋난다면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에 흥미를 잃는 건 물론 갈 곳 잃은 정념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도가 간과한 것은 열정보다도 깊고 큰 사랑의 힘이었다. 설령 꿈을 잃고 열정을 잃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도 사랑으로 일깨워져 계속 살아가는 한 새로운 꿈과 열정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때와는 또 다른 열정이 깃든 은비의 눈동자를 보며 일도는 다짐했다. 그 사랑을 믿고, 자신이 믿는 바를 관철해 나가겠다고.
귀갓길 밤하늘에는 아크투러스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중목욕탕을 나온 소녀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별을 볼 일이 줄어든다는데 소녀는 오히려 요 근래 부쩍 별자리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돌덩이 내지 가스 덩어리일 뿐일 텐데 옛날부터 사람들은 몇 십, 몇 백 광년 떨어진 그것들을 보며 물리적인 이정표는 물론 정서적인 시상으로 삼기도 했다.
짐작컨대 별은 인간에게 우주 규모의 약속의 징표로 기능해 온 게 아닐까. 계절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실은 정작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별이고, 자전과 공전을 하는 지구 위의 인간이 ‘별이 사라졌다’고 착각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 별이 지키고 있는 약속을 사람이 전부 감당하지 못해온 셈이다.
사람이 평생을 투신해야 할 약속을 지켜내려면 얼마나 수없이 의지가 꺾이고, 그를 그보다 큰 정념으로 다시 환기해야 할까? 소녀로서는 아직은 도무지 그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히 깨달은 게 있다면, 그러한 약속을 이행하는 자세는 날개가 녹는 것도 마다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자가 아닌 별을 바라보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의 그것이 더 적절하다는 사실이다.
소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네 달 전만 해도 나이에 걸맞게 보드라웠던 피부는 하루 몇 시간씩 설거지를 하느라 까끌까끌해져 있었다. 특히 일을 하기 시작한 처음 한 달 동안은 근무 시간 내내 설거지만 했다. 여사장의 테스트였다. 처음 『티블리 안나』에 온 날, 여사장은 교복 차림으로 막무가내로 일을 시켜 달라는 소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부모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제시하는 테스트를 통과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집에서 주방 일을 돕는 수준이었던 소녀에게 식당의 설거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중노동이었다. 식기를 꼼꼼하게 닦지 않으면 선임의 핀잔과 함께 되돌려졌고, 빠르게 닦지 않으면 다음 타임에 쓸 분량이 모자랐다. 그렇게 하루 근무를 마치고 나면 몸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이렇게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자신의 다짐을 접을 순 없었다. 그를 위해 집을 뛰쳐나왔으니까.
찜질방에서 자는 건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남녀 구분 없이 얇은 옷차림으로 매트 한 장 깔고 자는 공간은 아무래도 신경 쓰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용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그제야 새삼 주거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자 여사장은 ‘정말 버틸 줄 몰랐다’며 유니폼을 주었다.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은 미성년자라 4대 보험에 들어줄 수 없으니 자기 몸은 스스로 챙기란 말도 덧붙였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소녀는 텐트와 침낭을 샀다. 설치를 다 하고 나니 마치 자기 집이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여사장은 연락용으로 통화와 문자만 가능한 휴대폰도 개통해 주었다. 남은 음식을 가져가는 것도, 점내 세탁기로 옷을 빠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그녀의 호의로 소녀는 한 번에 의식주 문제를 급한 대로 해결할 수 있었다. 소녀는 신분도 보증되지 않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여사장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고, 세 달 만에 어느 파트에서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녀는 잘 곳이 생겼고, 직장이 생겼다. 무엇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만의 시간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집과 학교를 두고 온 결과이기도 했다. 원체 학교에는 바보들밖에 없다고 소녀는 여겨 왔다. 아무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주보고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굳이 자신이 이해해주는 것도 시간 낭비고 에너지 낭비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고독이 해결된 건 아니었고, 시간이 많아지고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기회가 늘자 그것은 칼날처럼 십대 소녀의 섬세한 마음을 저미었다. 소녀는 그를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렇게 비로소 소녀는 자신의 다짐을,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자신이 원하는 창작을 해 나가는 것.
물론 소녀는 자신이 매우 운이 좋은 경우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가출한 미성년자의 처지를 이용해 뼈 빠지게 부려먹거나 이상한 윤락 산업으로 꼬드기는 어른에게 걸렸다면 무슨 신변의 위협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집을 나오는 승부수를 던진 건 자신이다. 그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런 그녀인 만큼 학교를 그만두고 각고의 노력 끝에 작가로 대성한 미주를 롤 모델로 여기는 건 당연했다. 동시에 그런 미주가 절필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우주를 곱게 볼 수 없는 건 더더욱 그랬다.
‘그게 뭐하는 거야, 나잇살이나 먹고 아직도 엄마와 단둘이 살며 아르바이트나 다름없는 꽃집 일이나 하는 게.’
미주의 거취를 수소문하면서 알게 된 우주의 존재는 소녀의 눈에는 미주의 인생의 이물질처럼 느껴졌다. 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변 이웃들은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는가 싶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그만뒀는지 유 씨네 꽃집에서 화분을 닦고 있는 거야. 그래도 아들이나 엄마나 그늘진 얼굴 한 번 보인 적 없는 걸 보면 행복한 것 아니겠어.” 라며 훈훈한 덕담을 했지만 소녀에겐 우주가 마치 젖을 떼지 못한 아이와 다름없게 느껴졌다.
멀리서 훔쳐본 메이 플라워의 우주는 정말로 속없어 보일 정도로 태평하고 맹했다. 오죽하면 등 뒤로 몰래 숨어들어가 씨앗을 슬쩍하는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퇴근길 길목에 엎드린 채 기절한 척을 하고 있자니 예상대로 오지랖을 발휘해서 집까지 편안하게 모셔 왔다.
그런 덩치 큰 얼간이로만 생각했는데, 미주와 이야기할 기회를 잡기 위한 기습 키스를 하는 순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입술을 포개는 관습적이면서도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소녀는 작가로서의 열망보다 앞선 원초적인 여자로서의 감각을 일깨워 버린 것이다. 소녀는 생전 처음 접하는 감각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다음 날 가게에 찾아온 우주와 맞닥뜨리자 소녀는 놀라움과 동시에 지난밤의 감각이 떠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사 기질이 충만한 소녀는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란 격언을 떠올리며 우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우주는 태연하게 그를 받아주었다. 소녀는 편할 리 없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우주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지배하던 낯선 감각도 희미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 후 여사장이 그녀를 부르더니 손수 만든 커피와 다과를 들려주며 서둘러 택시에 태웠고, 택시에서 내리자 저번에 왔던 꽃집 사장이 나타나 그녀를 포터에 태웠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우주가 혼자 보고 있던 메이 플라워였고, 사장은 그녀를 내리자마자 포터를 끌고 도망가 버렸다. 단둘이 있게 되자 소녀는 다시금 예의 감각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되도록 떨어져 있기 위해 별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가게 앞을 서성거렸지만 그의 반 강제적인 권유에 결국 글쓰기를 시도하는 그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우주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는 단순히 맹하고 태평한 걸 넘어 속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에서 몇 권의 서적을 읽은들, 그것이 그의 고유한 삶과 정신에서 재구축되지 못한 채 도구적 이성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만고의 지식도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 삶의 궤적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소녀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우주를 보며 한심함보다는 연민을 느꼈다.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그는 틀림없이 무해하다. 그러니 남을 상처 입히는 짓 같은 건 도저히 못할 것이고, 거꾸로 누군가 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상처 주면서 상처 입히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삶의 방식이다. 그것이 어딘가에서 거세되어버렸다면, 그를 주도한 누군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 백지 상태였던 그에게 서서히 선과 면, 명암과 색깔이 입혀짐을 소녀는 목도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관찰하는 우주의 눈빛에 소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곳에 맹하고 태평한 청년은 없었다. 대신 고고하면서도 확신에 찬 창작의 화신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림을 완성하자 우주는 다시 맹하고, 태평하고, 백지인 사람으로 돌아왔다.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이 진정한 그인가? 아니, 그보다도 자신은 왜 이 남자에게 이다지도 휘둘리고 있단 말인가? 그는 나잇값 못하는 한량일 뿐이다. 미주를 파트타임 근로자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소녀가 만난 미주는 우주를 보며 더없이 행복해했고, 후회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미주의 답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했다.
-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다시 나에게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똑같이 감사할 테니까요.
그 말을 하는 미주의 눈동자에는 부모의 초월적 사랑을 애써 부여잡는 인간적인 번민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자기기만도 티끌만큼도 없었다. 적어도 소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작가란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종이다.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자 단계에서 결정되는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미주 작가는 애당초 작가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소녀는 그것만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우주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그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큰 존재가 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민일수도 있고, 경외일수도 있고, 호기심일수도 있고, 동질감일수도 있었다. 결단코 호감은 아닐 것이다. 호감 가는 짓을 해야 호감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째서일까,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종종 사무치게 고독할 땐 그가 생각났다. 어떤 의미로든 그는 도처의 바보들하고는 결이 달랐다. 기가 찰 정도로 속이 텅 빈 것 같다가도 방심하다가는 무수한 상념의 폭풍에 빨려들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주야말로 소녀의 모든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초적인 갈증부터 궁극적인 단계의 갈증까지 말이다.
며칠 전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부끄러워서 도망친 게 소녀는 못내 후회되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하다못해 번호 교환이라도 해둘 걸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역시 부끄러워서 자기 입으로 먼저 묻는 건 못할 것 같았다.
‘위이잉-’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여사장뿐일 것이고, 그녀가 이런 시간에 전화한 적은 없었다. 폴더를 열어 보니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소녀는 두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이 번호가 맞나 보네. 나 강우주 씨.
아는 목소리였다.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주에 대해 생각했을 뿐인데 그에게서 전화가 오다니, 우연 치고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안 거야?”
- 티블리 안나에 전화했더니 너네 사장이 받더라고. 네가 우리 가게에 놓고 간 게 있다고 하니까 알려주던데?
“아니 잠깐…”
‘보통 그럴 땐 택배로 보내라든지 기회 있을 때 들러서 갖고 가겠다고 하지 않나’ 란 생각이 들었지만 여사장과 저쪽 사장이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소녀는 납득해버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주가 굳이 이유를 만들어서 먼저 연락했다는 사실이었다.
“헤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내 번호를 딴 거야? 대담하네.”
- 거짓말 아니거든. 네 손수건 아직 나한테 있다고.
그러고 보니 그걸 아직 안 받았었다. 노점에서 헐값에 산거라 굳이 안 돌려줘도 되지만 소녀에겐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 준 고마운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속마음을 애써 감추겠다고 소녀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이 시간에 전화한 거야? 강우주 씨도 참 속없는 사람이네.”
- 뭐어???
수화기 너머에서 우주가 기가 차다는 듯 대답했다. 소녀는 아차 싶었지만 머리에서 제동을 걸기도 전에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강우주 씨한테 줄 테니까 버리든 말든 알아서 해. 그럼 됐지?”
소녀는 말을 뱉어놓고는 절규하듯 머리를 감쌌다. 정말, 하늘이 복을 줘도 자기 발로 지평선 너머까지 날리는 꼴이었다. 이윽고 우주가 말했다.
- 하아, 그럼 그냥 버린다. 불만 없지?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독설을 원망했다. 손수건을 빌미로 만날 약속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신나게 상대를 바보 취급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저쪽에서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의 외로움을 해갈해 줄 사람이 이렇게 없어지는 것이다.
소녀는 땅을 바라보며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공원 앞 횡단보도에 다다랐다. 시선 끝에서 참새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그 고집은 자신을 위한 것도, 우주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해지지 못할 거였으면 적어도 미움 받을 짓, 그리고 후회할 짓을 자초하면 안 됐다. 아니다, 아직 기회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깨닫자마자 행동할 때 가장 단축된다.
소녀는 폴더를 열고 통화목록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주가 전화를 받은 건 세 번 정도 발신음이 울린 후였다.
- …뭐야?
“이, 있잖아.”
소녀는 우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할 말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지… 음…”
소녀는 계속 뜸을 들이고 추임새를 넣으며 시간을 끌었다. 우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가 간신히 짜낸 말은 가관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어쨌든 내가 그날 다과도 가져오고 모델도 되어 줬는데 입 싹 씻는 거야?”
- …
“그래, 손수건까지 포함해서 나한테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 …
“뭐야, 괜찮은 기회잖아? 현역 여고생과 비밀 친구 하는 건 모든 남자들의 로망 아냐?”
저번에 만났을 때 젊은 여자 운운 하는 소리 듣는 게 싫다고 한 게 누군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우주는 조용히,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이 시간에 전화한 거야? 너도 참 속없는 사람이네.
“…”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이제야 겨우, 소녀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시금 정리하고 있었다. 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소녀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소녀는 이어서 말했다.
“손수건은 줄게. 아직 나를 친구로 여겨 준다면, 선물이야.”
휴대폰을 든 소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우주는 여전히 듣고만 있었다.
“나, 한 번 더 강우주 씨 그림을 보고 싶어. 내가 쓴 글도 보여주고 싶어. 친구끼리 하는 것들을… 하고 싶어.”
소녀의 목이 살짝 메어 있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자존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줄줄이 말소리로 바뀌어 나왔다. 네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통화 끝에 소녀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우주의 선택이었다. 소녀는 귀에 휴대폰을 댄 채 가만히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이 소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이것이 우주의 대답이었다. 용서하는 말도, 힐난하는 말도 없었다. 소녀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떠나가는구나 생각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자신은 외면당했고, 외면당할 짓을 했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소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흐느꼈다.
얼마쯤 지났을까, 소녀는 머리 위에 무언가 폭 하고 얹히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려니 눈물이 차서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곧이어 무언가 쓱 하고 자신의 눈을 닦아 주자, 거기엔 우주가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장난도 못 치겠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