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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스키장을 딸에게 통으로 선물한 날

by 에라토스




▐ 잃어버린 '여행'의 추억


어린 시절, 나는 학교를 빠지고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의 추억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의 사전에서 지워진 듯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모범생 기질 때문이 아니었다. 바쁘신 부모님의 일상과 여러모로 어려운 가정환경이 더 컸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규칙과 책임감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되었다. 스위스에서의 새로운 삶에서도 그 습관이 이어졌다. 주어진 시간을 마음 편히 즐기는 법을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왜 나는 항상 이렇게 바쁘게만 사는 걸까?" 하는 자문이 스치곤 했다.


스위스 초등학교 문화는 그와 대조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웠다. 딸의 반 친구들은 툭하면 결석하고, 가족모임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났다.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엄격한 출석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딸의 삶에도 학교를 빼먹고 놀러 가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으로는 모범생으로 자라는 딸의 모습이 뿌듯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 틀에 박힌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의 나처럼 아쉬움을 남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렇게 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 중학생 딸의 바쁜 나날, 떠남의 결의


딸이 중학생이 되자 학교생활이 더욱 바빠졌다. 학원은 없지만 매주 시험이 이어지다 보니, 매일 저녁 공부와 숙제에 지쳐 잠드는 날이 잦아졌다. 저녁 식사 후 책상에 앉아 노트에 빼곡히 적힌 문제들을 풀다가,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아빠, 아직 다 못했는데 졸리다..." 하며 눈을 비비는 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속에 '더 늦기 전에 한 번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위스 교육의 특징처럼, 자율 학습이 강조되는 환경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좀 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이대로라면 딸도 나처럼 추억 없는 삶을 살게 될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갈 때 'JOKER' 제도가 생각났다.


딸의 학교에는 'JOKER' 제도가 있는데 부모가 이틀 전에만 학교에 알리면, 아무런 증명 없이 하루를 빠질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한 학기에 두 번으로 제한되어 무분별한 사용을 막지만, 우리는 이 제도조차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이른바 '일탈'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학교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자유였다. 나는 이제야 이를 사용해 볼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JOKER를 사용하다


나는 딸에게 물었다. "우리 JOKER 써서 스키 타러 갈까?" 딸은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학교를 빠지고 스키를 타러 가요?" 그러고는 월요일은 시험이 있어서, 화요일은 좋아하는 수업이 있어서, 수요일은 다음 날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또 그렇게 몇 주가 흘렀고 4월이 되자 스키 시즌의 마지막 기회조차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때 딸이 말했다. "아빠, 수요일은 오전 수업만 있으니까... 오전만 빠지고 스키 타러 갈까요?" 나는 "오케이!" 대답하고 즉시 학교에 JOKER를 제출했다.



▐ 출발, 그리고 딸의 가이드


드디어 학교를 빠지고 스키장으로 향했다. 딸은 학교 스키 캠프에서 다녀왔던 곳으로 나를 안내하고 싶어 했다. 집에서부터 스키장까지의 거리는 좀 있었지만 딸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은 학교로 향하는 시간 우리는 스키장으로 출발했다.


딸은 들뜬 마음으로 차 안에서 나에게 말했다.


"아빠는 저만 잘 따라오면 돼요. 제가 길 다 알아요!" 항상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데려갔던 아이가, 어느덧 중학생이 되어 나를 이끄는 모습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차 안에서 딸은 캠프 추억을 들려주었다 – "꼭대기에 올라가면 경사가 좀 가파르긴 한데 뷰는 정말 멋져요! 가볼래요? 그리고 내려오면 버스를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우리가 가는 스키장이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밑그림을 그려주었다. 스위스에서 아이들은 캠프를 통해 독립심을 키우기 마련이다. 그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은 부모의 특권이 아닐까?



▐ 3000m 정상, 환상적인 풍경과 기록의 열정


신나게 달려 스키장 입구에 도착했다. 산 중턱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는 엄청난 속도의 산악열차에 몸을 싣었다.


도착한 우리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리프트에서 내려다보는 산맥은 이미 우리를 설레게 했다. 시즌 막바지 평일 오전의 스키장은 한산했다. 3000m 정상에서 바라본 뷰는 환상적이었다. 알프스 산맥이 끝없이 펼쳐지고, 눈부신 설경이 눈앞에 있었다. 구름이 산봉우리 사이를 스치며, 햇살이 눈 위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장면 같았다.


"아빠, 여기 진짜 예뻐요?!" 딸의 감탄이 들려왔다. 이 멋진 장면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다. 슬로프의 난이도가 자주 바뀌는 탓에,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만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폰을 들고 활주 했다. 손이 얼어붙을 듯 추웠지만, 화면에 담기는 풍경에 멈출 수가 없었다. 딸이 옆에서 "아빠, 손 안 추워요?" 하며 걱정하는 목소리에도 "그래도 이번 추억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 ㅎㅎ" 대답하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눈에도 다 담기 어려운 장면을 카메라가 어떻게 포착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이 날의 기록은 지금까지 스키장에서 찍은 어떤 영상보다 멋진 장면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슬로프를 내려오며 웃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는 재미를 만끽했다.


딸에게 스키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노력했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나보다 더 스키를 잘 타고 내려가는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섭섭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딸은 내가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혼자서 능숙하게 슬로프를 내려갔다. 여러 가지 감사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 선물의 의미, 통째로 건넨 추억


이날, 나는 딸에게 스키장을 통으로 선물했다. 합법적 일탈의 짜릿함, 규칙 속의 자유, 아빠와의 특별한 시간 – 이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의 미소를 보며, 어린 시절의 아쉬움을 넘어선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빠, 오늘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가요?" 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날에 남긴 동영상의 일부분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우리의 스키 여행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사고를 치게 된다.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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