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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스키장 연간패스를 구입했다.

추억으로 시간을 잡아두자.

by 에라토스



▐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 그리고 아빠의 '시간 계산기'


누구나 한 번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인생을 두 번 경험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각자의 모든 인생은 초보로서 살아가게 된다.


내가 스위스에 30대 초반 이사를 와서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자녀와 뭔가를 함께 할 수 있을 때 많이 누리라."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래야죠"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의 진짜 무게를 느끼지는 못했다.


스위스는 학원이라는 개념이 잘 존재하지 않기에 부모가 자녀를 케어하는 시간이 많이 요구된다. 그래서 때로는 자녀가 빨리 성장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초보 부모로서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 나가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가끔은 눈앞의 일상에만 매몰되어 살았다. 나에게 주어진 귀한 보물 같은 시간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마치 이런 보물 같은 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고, 고등학생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그 조언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 Joker 카드가 가르쳐준 것


스위스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공부 난이도가 올라가고, 특히 대학교 때 공부를 가장 많이 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진다.


어렸을 때에는 함께 다양한 활동들을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딸이 중학생이 되고 학교생활에 점점 바빠지자 우리 모두 각자의 방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대로 대학원 공부를 하느라 바빴고, 딸도 한국인의 명석한 두뇌를 스위스에서 뽐내느라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올해 초 겨울, 문득 떠올랐던 'Joker'를 써서 학교를 빠지고 딸과 함께 스키장을 다녀왔던 그날을 통해 큰 변화가 생겼다. (한 학기에 2번 정도 특별한 사유 없이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수 있는 '조커' 제도가 있다. 부모가 판단하기에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 쓸 수 있는 일종의 와일드카드다. 9화 참조)


https://brunch.co.kr/@eratoss/69


그날은 평일이었다. 텅 빈 스키장에서 딸과 단둘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나눈 대화, 함께 웃으며 활강했던 순간들, 산들에 둘러싸인 채 먹고 마셨던 감자튀김과 따뜻한 라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했다.


그날, 우리는 스키장을 '통째로' 즐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의 피곤하지만 행복한 미소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인생의 '계절 계산기' - 충격의 숫자


"앞으로 우리가 함께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겨울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딸이 대학에 가기 전까지 4년. 많아봐야 4번의 겨울. 아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은 대학 준비로 바쁠 테니 실제로는 3번.


계산 결과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을 딸과 온전히 함께 보낼 수 있는 횟수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이 가슴을 쳤다. 그동안 "시간은 많아, 나중에 하지 뭐"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중'은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700프랑의 대모험 - Magic Pass의 마법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올해 겨울은 딸과 스키에 올인하는 시즌으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스위스에서 어른 1명과 청소년 1명이 하루 스키를 타는 비용은 한국 돈으로 거의 20만 원. 매주 스키를 탄다면 한 달에 80만 원, 시즌 전체로 따지면... 계산하기도 무서운 금액이었다.


"아빠, 우리 매주 가면 파산하는 거 아니에요?"


딸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아빠가 파산하지 않게 방법을 찾아볼게!"


고민하던 중 발견한 게 'Magic Pass'였다. 스키 시즌권!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용? 비싸기만 할 텐데" 싶었다. 언제나 상상이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스위스 물가에 다시 한번 놀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가격이 맞는 거야?"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프로모션 기간이라 거의 반값에 판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어른 419프랑, 학생 282프랑. 두 명 합쳐서 총 700프랑. 한국 돈으로 약 120만 원.


더 놀라운 건 이 패스가 한 스키장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위스는 물론 몇 개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키장을 아우르는 다양한 지역을 1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여름에는 산에서 트레킹이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코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아빠, 이거 7번만 가면 본전인데?" 딸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웃었다.ㅎㅎ 그렇게 딸은 엄마가 회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가 발견한 패스에 대하여 설명했고 아내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아빠, 우리 이거 사는 거예요? 진짜?"


딸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결제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래, 이번 겨울은 우리가 알프스의 주인 되는 거야!"


하지만 체력부터 키워야 해, 알았지?!"



시간의 역설 - 빨리 흐르는 걸 천천히 즐기는 법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면 시간이 상당히 빨리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스키 패스를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사는 것이라는 걸. 700프랑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 휴대폰, 괜찮은 레스토랑에서의 몇 번의 식사 (스위스 외식비용은 정말 ㅎㄷㄷ)...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딸과 함께 눈 덮인 산을 내려오며 느낄 바람의 감촉, 리프트에서 나눌 시시콜콜한 대화, 함께 넘어지고 일어서며 웃을 그 순간들과는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스위스라는 '심심한 천국'의 선물


스위스라는 곳이 사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심심한 곳이다. 한국처럼 PC방도, 노래방도, 24시간 카페도 없다. 밤 7시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그마저도 쉰다. 그래서 뭔가를 찾아서 배우고 또 도전하지 않으면 이 삶은 누구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곳일 수도 있는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의 극치일 수도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서로와 자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은 건지도 모른다.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패스를 구입한 후, 우리는 함께 체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러닝을 하고, 하체를 단련한다.


"아빠, 우리 이번 겨울에는 검은 슬로프(상급자 코스)도 도전해 볼까?"


"그래, 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야."



건강하게, 함께


어른들이 했던 그 말, "자녀와 함께 할 수 있을 때 많이 누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을 함께 보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한정적인지,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고, 그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온전히 살아내라는 의미였다.


700프랑. 누군가에게는 비싼 금액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저렴한 금액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700프랑은 딸과 함께할 마지막 몇 번의 겨울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마법의 열쇠 중 하나인 것 같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우리는 안다. 몸을 움직이고, 함께 웃고, 때로는 함께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 그런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우리의 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둔다.


이번 겨울, 알프스의 설원은 우리 부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딸이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이와 스키를 탈 때, 문득 이 겨울을 떠올리며 미소 짓기를 바란다.


"우리 아빠는 나와 스키 타는 걸 정말 좋아했어. 한 시즌에 20번도 넘게 갔던 겨울이 있었지."


그때 그녀도 깨달을 것이다. 700프랑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스키 패스가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겨울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번 겨울 시즌 우리가 정복해 나갈 스키장들이다. 내년에는 아내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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