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생활 11년 차, 딸이 스포츠를 좋아하다 보니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본 기회가 많았다. 스키, 자전거, 수영, 테니스, 줄넘기, 탁구, 배드민턴 등등... 새로운 도전을 찾아 나서다 보니, 예상치 못한 장면들과 마주치는 일도 잦아졌다. 바로 신체적 어려움을 가진 분들이 자유롭게 운동을 즐기는 모습이다.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건 평범한 토요일 오후, 볼링장에서였다. 딸과 함께 들어서서 평소처럼 볼링공을 고르고 있었다. 딸은 자기 손에 딱 맞는 공을 찾느라 신이 나 있었고, 나는 무거운 공을 들었다 놨다 하며 "이번엔 180점을 넘겨보자!"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때 첫 번째 레인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에 고개를 돌렸다. 휠체어를 타신 분들이 도우미들과 함께 볼링을 치고 있었다. 특수 제작된 경사로를 통해 공을 굴리는 분도 있었고, 도우미가 방향을 잡아주면 직접 공을 밀어내는 분도 있었다. 휠체어를 탄 청년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고, 주변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휠체어를 탄 상태로 볼링을 즐기는 분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내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당연히 딸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을 테다. 딸이 궁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딸: "아빠, 저분들은 왜 휠체어 타고 볼링 해요? 할 수 있어요?"
나: "당연하지!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서 안전하게 즐기시는 거야. 정말 멋지지? 몸이 불편해도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거잖아."
그날 우리는 볼링을 치면서도 첫 번째 레인을 힐끔힐끔 봤다. 스트라이크 소리가 날 때마다 딸이 박수를 치며 "대박!" 하고 외쳤다. 그 장면은 단순한 볼링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작은 교훈이 되었다.
이런 경험은 볼링장에서 그치지 않았다. 스위스 곳곳에서 장애인들의 활동적인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이 나라가 왜 '선진국'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스키장을 가면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스키를 즐기는 걸 볼 수 있다. 특수 장비(예: sit-ski나 adaptive ski)를 사용해 알프스 슬로프를 내려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여러 조직이 협력해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실제로 매년 수천 명의 장애인이 스키를 즐긴다고 한다.
처음 sit-ski를 본 딸이 "아빠, 저건 썰매예요?"라고 물었을 때, 앉아서 타는 스키라고 설명해 주니 "와, 진짜 멋있다!"며 감탄했다.
패러글라이딩도 마찬가지다. 인터라켄 같은 산악 지대에서 장애인들이 전문 파일럿과 함께 tandem(2인용)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착륙할 때 특수 장비로 안전하게 내려오는 장면은 "이게 진짜 자유구나" 싶게 만들었다.
수영장에 가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리프트나 특수 수영 보조 기구가 준비되어 있고, 산악자전거 트레일에서는 adaptive bike(적응형 자전거)를 타는 분들도 있다. 세 바퀴나 네 바퀴가 달린 이 자전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운 분들도 산길을 달릴 수 있게 해 준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스위스는 장애인 스포츠를 적극 지원한다. PluSport라는 단체가 85개의 지역 스포츠 클럽과 110개의 스포츠 캠프를 운영하며, 장애인 올림픽(Paralympics) 선수 육성까지 한다. 단순히 '돕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기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느낌이다.
그러다가 또 알게 된 사실은 장애인 분들을 위한 전문 여행 상품이 있다는 거다. 스위스 관광청(Switzerland Tourism)과 Procap(스위스 장애인 협회)이 협력해 'Accessible Tourism'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코스와 상품을 비교하고 신청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여행할 수 있다. Procap Tourism Inclusive 같은 단체가 무장애 여행 정보를 제공해 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수상 활동을 포함한 여행 상품이었다. 호수나 강에서 카약이나 카누를 즐기는 코스 – 도우미가 동행해 안전을 보장한다. 다른 상품으로는 알프스 하이킹(특수 휠체어 사용)이나 도시 탐방(접근성 높은 교통수단 제공)도 있다. 가격은 일반 여행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지만, 맞춤형 지원이 포함되어 '누구나' 여행할 수 있게 한다.
딸: "아빠, 이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여행 갈 수 있잖아요."
나: "맞아. 여행은 모두의 권리니까. 스위스는 그걸 정말로 실천하고 있는 거지."
스위스 장애보험(IV/DI)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Rehabilitation before Pension"(재활 우선, 연금은 후순위)이라는 원칙이다. 1960년부터 시행된 이 철학은 단순히 연금을 지급하기보다는 재활과 직업 복귀를 최우선으로 한다. (스위스 연방 사회보험청 자료에 따르면, 이 원칙으로 인해 장애인들의 사회 복귀율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개인이 장애로 인해 근로 능력을 잃었을 때, 스위스 장애보험은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재활 조치를 제공한다:
직업 상담, 훈련, 일자리 배치
의료 서비스 및 휠체어, 보청기 등 보조기구
직장 적응 프로그램
정신 장애인을 위한 치료 지원
먼저 장애인 분들이 재활하여 회복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지원하는 것. 그래서 연금의 경우 재활 조치가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할 때만 지급된다고 한다.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다. 그냥 돈을 지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분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차별을 금지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이것이 스위스의 정책이다.
장애인 분들을 고용하는 직장에는 더 구체적인 지원이 따른다:
모든 보조 기구 비용(휠체어, 보청기 등) 부담
작업 공간 적응 및 조명 개조 지원
6개월 시험 근무 기간 동안 급여 지원
성공적 배치 후 장기 지원 및 코칭 제공
물론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진행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정책들이 존재하고 유럽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스위스라는 나라의 힘을 느끼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UN 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도 일부 개선을 권고하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러닝을 사랑하는 나는 언젠가 시각장애인 분들과 몸을 일부를 함께 묶고 그분들이 뛸 수 있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비로 훈련을 받고 연간 가입비도 발생한다고 알고 있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나눠지고 함께 운동하며 즐길 수 있는 것은 참 귀하고 보람찬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다양함 속에도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으며 그 안에서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정책들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라는 나라를 계속 알아가면 갈수록 드는 생각은... 물가 빼고는 참 괜찮은 나라라는 것. 오늘은 칭찬으로 마무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