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늘려준다는데... 스위스 국민들의 대답은?

스위스에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국민투표)

by 에라토스





▐ 작은 나라의 큰 비밀


스위스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인구가 90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나라가 대체 어떻게 세계 경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걸까 하는 것이다. 유럽 경제위기가 대륙 전체를 휩쓸고 지나갈 때도, 각국 정부가 긴축 정책으로 허덕이며 국민들의 원성을 살 때도, 스위스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자기 자리를 지켰다.


이유야 수없이 많겠지만, 앞으로 몇 회에 거쳐서 내가 목격하고 조사한 몇 번의 스위스 국민투표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스위스,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 뛰어난 현실 판단 능력을 가진 국민,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줄 아는 성숙함.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스위스가 아닐까 싶다.



▐ 대통령의 자국민 자랑


2014년, 스위스로 이사 온 직후의 일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시절, 나는 불어를 배우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불어를 공부하던 중 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인터뷰 형식의 영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상 속에서 스위스 대통령은 자국민에 대해 이야기하며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가 한 말의 요지는 이랬다.


누가 저에게 스위스는 어떤 나라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스위스 국민들은 휴가를 늘리자는 투표에서 스스로 거부하는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잠깐,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휴가를 더 준다는데 거부했다고? 처음엔 솔직히 내 불어 실력을 의심했다. 분명 중요한 부분을 놓쳤거나 반대로 이해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휴가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걸 대통령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어렵게 어렵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들은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 휴가 연장? "됐습니다"


2012년 3월 11일, 스위스 전역에서 흥미로운 국민투표가 열렸다. 스위스 노조연합인 트라바이 스위스(Travail.Suisse)가 제안한 안건이었는데, 내용은 무척 단순했다. 현재 법적으로 보장된 연간 유급휴가 4주를 6주로 늘리자는 것이었다. 노조는 이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해 12만 5천 명의 서명을 모았고, 마침내 전 국민의 판단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 제안이 그리 과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이미 5주에서 6주의 유급휴가를 보장하고 있었다. 스위스의 4주는 오히려 유럽 기준으로는 적은 편에 속했다. 이웃 나라들이 진작에 누리고 있는 혜택을 스위스도 받자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 66.5%라는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되었다. 찬성은 고작 33.5%에 그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위스의 26개 칸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도나 광역시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중 단 한 곳도 찬성 다수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국 어디서나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두 손 번쩍 들고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휴가가 2주나 더 늘어난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휴가를 늘리자는데 왜 거부했을까?


당시 유럽은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스는 국가 부도 위기에 몰려 구제금융을 받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경제가 휘청거렸다. 각국 정부는 긴축에 긴축을 거듭하며 복지 혜택을 줄이고 세금은 올렸다. 국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스위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업률도 낮았고, 재정도 건전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스위스 국민들을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 우리도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투표 결과에 반영된 것이다.


스위스 예술공예연합의 대표 한스 울리히 비글러는 투표 결과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국민들이 현실 감각을 유지했습니다." 고용주 협회 측은 만약 이 안건이 통과되었다면 연간 60억 스위스프랑(당시 환율로 약 7200억 현재 환율로 1조 920억 원), 에 달하는 추가 인건비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투표 전 고용주 협회에서 만든 광고가 꽤 화제가 됐었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의료 모니터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는 장면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새 휴가 규정 때문에 인력이 부족합니다." 다소 과장된 광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 미래를 내다보는 힘


물론 노조 측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들은 직장 내 스트레스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한 건강 문제와 생산성 저하가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논리였다.


그런데 당시 스위스 법무부 장관이었던 Simonetta Sommaruga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2주를 더 쉬는 것이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간 동안 누가 그 일을 대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답해야 합니다."


어쩌면 너무 냉정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휴가만 늘린다고 해서 직장 스트레스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2026년이다. 2012년 그 투표로부터 약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그런 와중에 스위스는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이 투표 하나가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에 스위스 국민들이 내린 그 불편한 선택, 눈앞의 혜택을 거부한 그 결정이 오늘의 안정을 만든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불편함을 감수하는 힘


국민투표를 살펴보면서 나는 스위스라는 나라의 진짜 강점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휴가가 늘어나면 좋다. 이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그 좋은 것만 보지 않았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선택이 5년 후, 10년 후에 우리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


눈앞에 달콤한 열매가 있어도 그것을 따기 전에 나무 전체를 살펴보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열매를 포기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스위스 국민들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나를 생각하게 했던 여러 가지 투표들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고 조사를 거쳐 몇 차례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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