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빛나는 스위스 프랑
어제(2026년 3월 8일), 스위스에서 또 한 번의 국민투표가 있었다. 지난 13화에서 소개했던 공영방송 수신료 이야기의 후속 편이다. 현재 가구당 연간 335프랑(약 62만 원)인 수신료를 200프랑(약 37만 원)으로 낮추자는 안건이 투표에 부쳐진 것이다.
결과는? 약 62%의 반대로 또 부결되었다. 2018년에 수신료를 아예 폐지하자는 안건이 71.6%의 반대로 부결되었던 것에 이어, 이번에는 절반으로 줄이자는 좀 더 현실적인 제안도 스위스 국민들이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깐... 자기 발로 투표장에 나가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기꺼이 계속 내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해 온 스위스 국민투표의 결과들은 하나같이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12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2년에는 유급휴가를 4주에서 6주로 늘리자는 제안을 66.5%의 반대로 거부했다. 휴가가 2주나 더 늘어난다는데 거절을 했다. 13화에서 다뤘던 2018년 수신료 투표에서는 TV도 없는 집에서 내야 하는 연간 수십만 원의 수신료를 71.6%가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그 수신료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안건마저 62%가 부결시켰다.
내가 이 사람들의 문화와 철학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나만 하더라도 달려가서! 돈 안 낼 거예요! 휴가 더 주세요! 라며 투표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러한 결정들을 통해서 만들어진 놀라운 결과물?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스위스에서 쓰는 화폐인 스위스 프랑이다.
스위스에 살면서 환율을 체감하는 순간이 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 해외여행을 하거나 특히 한국 방문을 위해 원화로 환전할 때다. 내가 2014년에 스위스로 이사 왔을 때 1 스위스 프랑은 한화로 평균 약 1,150원 정도였다. 지금은? 약 1,850원이다.
11년 사이에 같은 1프랑의 가치가 거의 70% 가까이 올랐다는 뜻이다.
유로화 대비로 봐도 마찬가지다. 2026년 3월 현재, 유로 대비 스위스 프랑 환율은 0.91 수준으로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달러 대비로도 2025년 한 해에만 약 12.7% 강세를 보였고, 2026년 들어서도 3.5% 추가 상승하며 11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올해 초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스위스 국립은행(SNB) 총재 마르틴 슐레겔은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스위스 프랑의 강세가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최고의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를 반영한다고 언급했다.
스위스 프랑은 지폐도 비싸 보인다... 위조가 아주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요오기 위에 보이는 1000프랑 지폐 한 장은 한국 돈으로 현재 180만 원이 넘는다;; 비싼 건 그렇다 치고 대체 스위스 프랑의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안전자산이란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 투자자들이 자산을 지키기 위해 달려가는 피난처다. 전통적으로 미국 달러, 일본 엔, 스위스 프랑이 3대 안전자산 통화로 꼽혀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미국 달러는 불안정한 무역 정책과 급격한 재정 적자로 안전자산 지위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고, 일본 엔은 GDP 대비 250%가 넘는 국가 부채로 인해 신뢰가 약화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위스 프랑만이 묵묵히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왜일까? 안전자산 통화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성, 낮은 국가 부채, 건전한 재정, 그리고 투자자들의 신뢰.
스위스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그 답이 보인다.
첫째, 국가 부채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
스위스 연방 재무부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연방정부의 순 부채는 GDP의 약 16.1%에 불과하다. 일반정부 기준으로 넓혀도 약 38% 수준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국은 124%, 일본은 237%, 이탈리아는 137%다. 스위스가 얼마나 적은 빚으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인플레이션이 극도로 낮다.
스위스의 물가상승률은 0~1%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물가가 안정적이라는 것은 통화의 구매력이 잘 보존된다는 뜻이고, 이는 곧 프랑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 가치가 유지된다는 의미다.
셋째, 200년 넘는 중립국 지위.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 이후 200년이 넘도록 중립국 지위를 유지해 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 분쟁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최소화했다. 이 정치적 안정성은 투자자들에게 "이 나라의 통화는 갑자기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낮은 부채, 낮은 물가, 중립국 지위. 이런 것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냥 운이 좋았던 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국민투표들이 바로 그 답의 일부라고 본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스위스의 재정 건전성이다.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국민 스스로가 재정 팽창을 견제하고, 포퓰리즘적 유혹을 뿌리치며, 장기적 이익을 선택해 온 결과다. 그 결과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위기 속에서도 부채 비율이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국제 투자자들이 스위스 프랑을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이 급변하지 않는다는 것. 국민투표를 통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에 한 명의 정치인이나 하나의 정당이 갑자기 재정 정책을 뒤흔들 수 없다. 이것이 투자자들에게는 엄청난 안심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스위스 프랑은 어김없이 강세를 보여왔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그리고 2025년 미국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이 커졌을 때도, 패턴은 동일했다. 불안할수록 돈은 스위스로 향했다.
2026년에도 이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스위스 프랑은 금(Gold)과 함께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각광받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스위스는 인구 900만 명의 작은 나라다.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나라도 아니고, 에너지를 수출하는 자원부국도 아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의 통화가 세계 3대, 아니 어쩌면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불리고 있다.
스위스에 막 도착했을 때 불어 공부를 하다가 들었던 스위스 대통령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스위스 국민들은 휴가를 늘리자는 투표에서 스스로 거부하는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장기적 안목,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이것이 바로 스위스 국민들이 투표용지 위에 매번 써 내려가는 신뢰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세계의 투자자들은 그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위기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스위스 프랑을 안전자산의 왕좌에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어제 투표 결과를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생각했다. 스위스 프랑의 강세는 경제 지표 뒤에 숨어 있는 900만 국민의 성숙한 선택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GDP나 금리 같은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스위스만의 진짜 경쟁력이라고.
동시에 나는 또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비싸다고!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