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_TV도 없는데 수신료를 내라고?

첫 번째 고지서의 충격

by 에라토스




▐ 첫 번째 고지서의 충격


11년 전스위스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우편함에서 고지서 하나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라디오·TV 수신료 청구서였다. 금액은? 매달 37.5프랑 연간 451 스위스프랑. 당시 환율로 약 55만 원이고 지금 환율로는 8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한국에서는 수신료에 대하여 생각을 해봤을까? 당시 한국은 수신료가 연간 3만 원이었으니... 그야말로 이건 또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기에, 나는 당연히 면제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TV가 없다고 신고를 하면 되나? 생각하며 알아보니, 스위스에서는 TV가 없어도 수신료를 내야 했다. 가구당 의무 부과. 예외 없음. 솔직히 처음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보지도 않는 방송에 왜 이 큰돈을 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몇 년을 살아보니, 그리고 이 나라의 독특한 정치 시스템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이 수신료가 단순히 방송을 보는 대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수신료 폐지에 반대합니다.


2018년 3월 4일, 스위스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국민투표가 열렸다. 이번에는 공영방송 수신료를 아예 폐지하자는 안건이었다. "TV를 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돈을 걷는 것은 불공정하다." 동시에 디지털 시대에 전통적인 공영방송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71.6%라는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되었다. 찬성은 28.4%에 그쳤다. 지난 회에 소개했던 휴가 투표와 마찬가지로, 26개 칸톤 중 단 한 곳도 찬성 다수를 기록하지 못했다. 전국이 한 목소리로 "수신료를 유지하겠다"라고 답한 것이다. 투표장에 나가서,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기꺼이 지키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아니... 왜???



▐ 왜 스위스 사람들은 왜 돈을 내기로 했을까?


이 투표 결과를 이해하려면 스위스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스위스는 네 개의 공식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독일어(63%), 프랑스어(23%), 이탈리아어(8%), 그리고 로망슈어(0.5%). 이 네 개의 언어권은 각각 고유한 문화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스위스 공영방송은 이 네 개의 언어권을 위해 7개의 TV 채널과 17개의 라디오 채널을 운영한다고 한다. 단일 언어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만약 수신료가 폐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광고 수입만으로는 네 개 언어권의 방송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특히 이탈리아어권이나 로망슈어권처럼 인구가 적은 지역의 방송은 상업적으로 수익을 낼 수 없다. 수신료가 사라지면 이 지역의 방송은 곧바로 사라지고, 산간 지역과 소수 언어권은 '미디어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정보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이다.



▐ 민주주의의 인프라


스위스는 연간 8회에서 10회의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나라다. 연방 차원의 안건뿐 아니라 칸톤과 지자체 수준의 투표까지 합치면, 스위스 시민들은 1년 내내 크고 작은 정치적 결정에 참여한다. 이것이 바로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다.


그런데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건의 내용을 이해하고, 찬반 양측의 논거를 비교하고, 자신의 생활에 미칠 영향을 따져본 뒤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2019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스위스 국민의 66%가 이러한 인프라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데 있어서 "절대 필수적"이라고 평가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수신료를 방송 시청료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TV를 보든 안 보든, 공영방송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것. 내가 직접 방송을 보지 않더라도, 내 이웃이 그 방송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얻고 합리적인 투표를 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에게도 돌아오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 그래도 논쟁은 계속된다


물론 수신료 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수신료가 유럽 최고 수준인 것은 사실이고, 디지털 시대에 공영방송의 역할과 규모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필요하다.


실제로 2018년 투표 이후에도 변화는 있었다. 2019년부터 수신료가 451프랑에서 335프랑으로 인하되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3월 8일에는 또 한 번의 투표가 예정되어 있다. '200프랑이면 충분하다!(200 francs, ça suffit!)'라는 이름의 새로운 국민발의이다. 사실 200프랑으로 낮춘다고 해도 한화로는 36만 원에 해당하는 돈이라 적지는 않다.


이번에는 2018년과 상황이 좀 달라 보인다. 수신료를 완전히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절반으로 줄이자는 것이니, 좀 더 현실적인 제안처럼 들리는 것 같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찬성이 53%, 반대가 44%로 나타나기도 했단다. 스위스도 집값과 건강보험료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가계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투표일까지 약 한 주가 남았다. 스위스 국민들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 불편함 속에 숨어 있는 지혜


지난 회에서 이야기했던 휴가 투표와 이번 수신료 투표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스위스 국민들은 당장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 대신, 사회 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선택했다. 휴가를 늘리면 좋지만 경제에 부담이 된다면 참겠다고 했고, 수신료가 부담되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내겠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개인의 편의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것,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더 큰 그림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스위스가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