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그 원천을 굳이 따지자면 인물들의 ‘탈-지층’적 행보에 있‘었’다.
※ 이하 <기생충> 포함 봉준호 영화들의 스포일러
그 자유분방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괴물>(2006)이다. <괴물>에서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고 유려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질서에 ‘순응’도 ‘역행’도 않는, 요컨대 ‘떠돎’ 같은 것. ‘떠돎’의 운동은 낡은 질서의 후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인물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2007)에서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 할 때 홀로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이 ‘떠돎’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돼 그 구조를 민망한 것으로 만들고는 한다.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안에서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TV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토론이 토론으로서 가치 판단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모양새.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렇게,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발가벗겨버리는 지위를 종종 누려왔다.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의 이 기존 경로를 마침내 구부러뜨린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제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게 <마더>에서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마침내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해버린 것이다.
살인 - “엄마…없어?” - 오열.
진범을 찾는다며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들)에게는 어떻게 눈에 안 띄고 살 것이냐가 관건. <마더>의 끝부분을 ‘송강호의 눈’ 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음영이 장식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이 같은 ‘탈-지층’적 행보가 실종된 것은 <설국열차>(2013) 때부터다. 인물들은 더 이상 ‘떠돌지’ 않았다. 영화 속 시스템에 ‘순응’ 또는 ‘역행’만 함으로써 운동성이 모종의 회로기판 안에 갇혀버린 형국. 그래서 좌충우돌 질주는 해대지만 행보의 결 자체는 강자/약자의 논리 회로 위에 매끄럽게 정렬돼버린다. 시스템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스템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전해오던 ‘떠돎’의 진동은, 이때부터 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기생충>(2019)에 이르러 이 회로로의 수렴은 한층 더 강화됐다. 무신경하게 TV를 끄던 인물들의 자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고 세상에 접속하며 뉴스를 챙겨보는 이들이 차지했다. 상승/하강의 권역 바깥에서 행동의 나래를 펼칠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스멀스멀 번진 건 가족들의 사고방식 및 행보에 어떤 생략이 감지될 때부터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구질구질한 것’과 ‘바퀴벌레스러운 침투력과 뻔뻔함을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는 문제.
그래, 가난하네, 알겠는데,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이러는데?
그렇게 가난과 뻔뻔함이 점프 컷 수준으로 깨진 채 붙어있다 보니 반지하 창틀을 담은 숏들은, 마치 <버닝>(2018)의 햇빛 조각처럼, 어떤 편협한 시각에 잠식됐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여기서 매일매일 이런 프레임을 보고 살면 높은 확률로 뻔뻔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겠지’, ‘반지하서 이러고 살다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서로 듣는 데서 욕지거리도 할 듯’, ‘자, 그러니 (나의) 코엔식 소동극을 위해 이제 트리거를 당겨봐’ 따위의 잔향들.
그러니까 반지하방에서 실제로 그 프레임을 보며 눈 감고 떠본 적 없는 이가, ‘지층 살이 체험판’ 정도로 다소의 영감을 얻고는, 이를 (상 주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핏빛 소동극까지 적당히 끌고 간 게 다라는 결론, 말고 나는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결국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행보의 반경 또한 예측 가능한데 여기에 논리의 비약마저 작동된 모양새. 이제 후진 건 세계의 부조리한 질서 같은 게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 그 자체가 됐다.
영화를 구성하는 ‘유니크’한 입자로서의 인물들, 부조리한 틈 하나를 파고드는 날카롭고 불온한 상상력,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 고유의 것들의 3연속 실종. 이래서는 이제 나는, 설레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은 계획에 없었다. ⓒ eraze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