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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azerh Jun 06. 2019

[기생충] 봉준호 영화가 더는 설레지 않는 이유

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그 원천을 굳이 따지자면 인물들의 ‘탈-지층’적 행보에 있‘었’다.


※ 이하 <기생충> 포함 봉준호 영화들의 스포일러



그 자유분방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괴물>(2006)이다. <괴물>에서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고 유려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질서에 ‘순응’도 ‘역행’도 않는, 요컨대 ‘떠돎’ 같은 것. ‘떠돎’의 운동은 낡은 질서의 후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인물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2007)에서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 할 때 홀로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이 ‘떠돎’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돼 그 구조를 민망한 것으로 만들고는 한다.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안에서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TV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토론이 토론으로서 가치 판단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모양새.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렇게,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발가벗겨버리는 지위를 종종 누려왔다.


봉준호의 단편 명작. <지리멸렬>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의 이 기존 경로를 마침내 구부러뜨린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제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게 <마더>에서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마침내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해버린 것이다.


살인 - “엄마…없어?” - 오열.


진범을 찾는다며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들)에게는 어떻게 눈에 안 띄고 살 것이냐가 관건. <마더>의 끝부분을 ‘송강호의 눈’ 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음영이 장식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서사적·미학적으로 완벽했던 <마더>의 엔딩 숏


이 같은 ‘탈-지층’적 행보가 실종된 것은 <설국열차>(2013) 때부터다. 인물들은 더 이상 ‘떠돌지’ 않았다. 영화 속 시스템에 ‘순응’ 또는 ‘역행’만 함으로써 운동성이 모종의 회로기판 안에 갇혀버린 형국. 그래서 좌충우돌 질주는 해대지만 행보의 결 자체는 강자/약자의 논리 회로 위에 매끄럽게 정렬돼버린다. 시스템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스템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전해오던 ‘떠돎’의 진동은, 이때부터 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기생충>(2019)에 이르러 이 회로로의 수렴은 한층 더 강화됐다. 무신경하게 TV를 끄던 인물들의 자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고 세상에 접속하며 뉴스를 챙겨보는 이들이 차지했다. 상승/하강의 권역 바깥에서 행동의 나래를 펼칠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스멀스멀 번진 건 가족들의 사고방식 및 행보에 어떤 생략이 감지될 때부터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구질구질한 것’과 ‘바퀴벌레스러운 침투력과 뻔뻔함을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는 문제.


그래, 가난하네, 알겠는데,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이러는데?


갑자기 분위기 연쇄사기꾼. <기생충>


그렇게 가난과 뻔뻔함이 점프 컷 수준으로 깨진 채 붙어있다 보니 반지하 창틀을 담은 숏들은, 마치 <버닝>(2018)의 햇빛 조각처럼, 어떤 편협한 시각에 잠식됐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여기서 매일매일 이런 프레임을 보고 살면 높은 확률로 뻔뻔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겠지’, ‘반지하서 이러고 살다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서로 듣는 데서 욕지거리도 할 듯’, ‘자, 그러니 (나의) 코엔식 소동극을 위해 이제 트리거를 당겨봐’ 따위의 잔향들.


그러니까 반지하방에서 실제로 그 프레임을 보며 눈 감고 떠본 적 없는 이가, ‘지층 살이 체험판’ 정도로 다소의 영감을 얻고는, 이를 (상 주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핏빛 소동극까지 적당히 끌고 간 게 다라는 결론, 말고 나는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결국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행보의 반경 또한 예측 가능한데 여기에 논리의 비약마저 작동된 모양새. 이제 후진 건 세계의 부조리한 질서 같은 게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 그 자체가 됐다.


영화를 구성하는 ‘유니크’한 입자로서의 인물들, 부조리한 틈 하나를 파고드는 날카롭고 불온한 상상력,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 고유의 것들의 3연속 실종. 이래서는 이제 나는, 설레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은 계획에 없었다. ⓒ erazerh


밥은 먹고 다니냐.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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