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향한 근심 어린, 또는 근엄한 시선들에 부쳐
1. 어쩌다 보니, 아서 입장에서는 ‘내 주파수’를 찾아가는 여정. 웃음에서 잡음, 즉 이질감을 걷어낼수록 세계 안에서는 어째 더 이질적인 무엇이 돼간다는 게 문제.
2. 이질화는 ‘옹호’는 아니더라도 ‘보호’는 된다. 영화는 클로즈업과 풀 숏을 오가며 아서의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화면 가득, 다각도로 채우는 데 정성을 다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몸이 발산하는 광기의 추이 및 총량은 프레임에 지속적으로 동기화되는데, 그 기(氣)가 너무 세다 보니 숏들은 거의 관객을 때릴 지경으로 운용된다.
3. ‘볼품없는 몸’에서 ‘아름다운 몸’을 추출해낸 건 물론 카메라의 공(功)만은 아니다.(feat. 사람&사운드) 이를테면 호아킨 피닉스가 최적의 몸 선을 찾아 던져두면, 첼로 선율이 슬쩍 와서는 그 윤곽을 다시 한 번 매만지는 느낌.
4. 화장실 춤 신(scene)은 한데 엉겨 붙은 억압과 분노와 두려움 덩어리를 슬픈 희열 같은 것으로 변환시키는, 빛나는 영화적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의 혼돈에 이 정도의 아름다움을 치덕치덕 발라버리다니. 이 퇴폐미가 예술이 아니라면 지구상에 예술이라 부를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고백컨대 <마더>(2009)의 관광버스 춤 이후 이토록 숨이 턱, 막히는 몸짓은 처음 만났다.
1. 위험성에 관한 근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 영화 <조커>(2019)는 조커화(化)를 ‘권장’은 않되 열렬히 ‘전시’는 한다. 내면 어딘가에 폭발물을 간직 중인 어른이나 청소년이 불쏘시개로 삼을 수 있겠다 싶다.
2. 다만 세상에는 유사 <조커>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갖가지 형태로 갖가지 장소에 흩어져있다. 이를테면 뉴스 한 꼭지, 댓글 하나일 수도 있다. 유튜브가 추천한 한 편의 영상이 터뜨림의 구실이 될 수도 있겠다. 가족의 말 한 마디는 또 어떤가. 마음에 안 드는 노래 가사가 하필 그 자리에 놓일 수도. 그저 날씨가 흐려서, 또는 화창해서일 수도 있다. 물론 딱 하나가 아니거나, 뚜렷하게 집어내기 힘들 확률이 높다.
3. 그중 눈에 아주 잘 띄는 유형이 있으니 바로 영화다. 영화는 처음과 끝을 지닌 하나의 서사 덩어리로, 잘 ‘집힐 수 있도록’ 저마다 근사한 제목까지 달고 있다. 제일 신속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비난의 화살’의 공인된 출처인 셈이다.(자매품 게임 탓) 실제로 극악무도한 자 앞에 잔혹한 장면이 담긴 영화나 게임(중독)이 수식어로 붙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풍습인 양 익숙하다.
4. (다른 맥락이 생략된) ‘장도리 신을 인상 깊게 봤다는 살인자 A씨…’ 따위의 기계적 주어들은, 옳은가.
5. 현대 사회에서 병리적인 요소들은 무수한 점처럼 많으며 매순간 각기 새롭게 얽히고설킨다.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마치 거대 큐브 같은 구조. 하지만 ‘탓하기’는 대개 이 큐브의 면면과 무관한 시간, 엉뚱한 장소의 것들로 향한다. 그게 손쉽고, 본질을 비켜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사회가 (영화나 게임) 탓의 요령을 습득하면 할수록, 관련 데이터를 쌓으면 쌓을수록, 그 작업에 무뎌지면 질수록, 큐브의 생김새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6. 영화 <조커>의 ‘진짜 위험성’은 여기에 있다. 아서의 무너짐 비슷한 걸 나도 겪은 것 같은데, 그래서 불온하되 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한테는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기에 딱 좋은 영화라는 것. 요컨대 큐브의 작동 원리, 즉 진짜 병리적인 것들의 정체가, 한결 더 뿌예질 아주 높은 확률 말이다. ⓒ eraze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