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line)’이 문제가 되는 건, 그 선의 존재가 비합리적이거나 반윤리적인 상황의 원인으로 작동할 때다. 예컨대 “성씨가 두 글자인 애는 서류에서부터 거릅시다” 따위의, 태생부터 차별로 꽉 찬 임의의 울타리 같은.
다만 영화 <경계선>(2018)이 끌어들인 각종 경계들에, 그 원죄로서의 차별 기능이 잘 스며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랄하지 않다는 말.
그러다 보니 영화의 태도가 자꾸만 명분 없는 도발처럼 느껴진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탈-인간, 미(美)의 기표에 대한 일반 개념을 시도 때도 없이 찔러대는 게, 마치 이 영화, 가학자로서의 지위를 지향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네 머릿속 이미지, 그래 그거, 정말 그럴까? 고정관념 아니고?’의 반복. 이를테면 상식은 조작된 편견이라는, 편견.
흐름상 있는 경험 없는 경험 다 짜내며 ‘그래 그랬구나’로 화답해야 할 것 같다만, 대체 무엇을 위해? ‘그저 거기 놓인’ 경계들을 이렇게 ‘멱살 잡고’ 넘나들면, 구체화되는 건 되레 경계선의 형태와 필요성이지 않겠나. 물론 주인공이 손수 긋는 단 하나의 선, 그 양심적 선택을 지지는 하겠지만 그걸 굳이 이런 식으로 어필할 이유는 없다 싶다. ⓒ erazerh
PS. 왜 영화들이 자꾸만 소수자에게 또 다른 소수자와의 러브라인을 들이미는지 모르겠다. 그 외로움이 겨우 나랑 닮은 애랑 잠자리 몇 번 갖는다고 희석되는 성질의 것이었나? 무엇보다, 쓸쓸하면 몸도 마음도 그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물론 그중 가장 너무했던 건 <경계선>도 뭐도 아닌, ‘어 너 장애인, 쟤 괴물, 레디 투 섹스? 스타트!’ 따위의 가학적 맥락으로 점철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