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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17. 2020

콤플렉스, 그와의 시소 놀이


콤플렉스, 그와의 시소 놀이

“콤플렉스 - 1.(심)정신분석학용어. 개인의 심적(心的)내용 중에서, 억압된 사고(思考) 욕구가 서로 착종(錯綜)되어있는관념의 복합. 2.열등감 3.합성물. 화합물.”
콤플렉스에 관한 글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내가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국어사전을찾았다. 사전엔 위와 같이 풀이되어 있다.
다시 ‘착종’의 뜻을 찾아본다. 뜻을 알고자 사전을 찾는 사람에게 원래 단어보다 더 어려운 단어를 조합해서 설명하는 사전, 그래도 아쉬운 대로 그 사전을 옆에 끼고 산다.


콤플렉스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내가 콤플렉스를 느꼈던 기억이 아니라, 내가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주제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내게 콤플렉스가 있다는 증거인지... 맞장구 칠 짝도 없는, 반박할 구경꾼도 없는 말놀이를 혼자 해본다.
<말놀이>
나는 콤플렉스가 없다. 자신한다. - 아니다. 너는 콤플렉스가 있다.분명히 있어.
나는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있게 콤플렉스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거야. - 아니다. 너는 아직도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지 못했어. 거기 매어있는 거야. 그러니까 글을 쓰려는네 머리에 콤플렉스라는 주제가 떠오른 거라구.
그런 걸까? 내가 정말 어떤 콤플렉스에 매어있는 걸까? - 그렇다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글 제목이 콤플렉스가 된 거야?
몰라, 몰라, 몰라. 콤플렉스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나는 콤플렉스를 못 느꼈다’는 것임은 분명해.

고등학교 졸업 후, 봄을 지내며 어느 정도 변화에 적응하고 제 자리를 잡은 우리들은 동창회를 했다. 여름 방학을 앞둔 초여름이었던가. 졸업 후 처음 만난 우리들은 교복을 벗은 모습을 서로 신기한 듯 훑어보았다.대학의 봄 축제가 끝난 얼마 후였었다. 첫발을 디딘 서울 생활, 캠퍼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교양과정에 있으면서도 마치 전공을 오래 한 사람처럼 자기 전공에 대한 식견에 열변을 토하고, 그것이 후레쉬 맨들의 특징인지, 몇몇이 모여 서로 풀어놓은 보따리는 이것저것으로 진기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낭랑했던지!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며 나와 몇 번 만나기도 했던 한 친구가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모두들 대학생이 되어서 모이는데 대학에 가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기가 싫어서 일부러 안 나왔단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들어오는 학교기 때문에 우리 동창들은 거의 다 대학에 갔고 몇몇 동창들만 진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졸업하기 전 해의 12월부터 취직이 되었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생인 동창들을 자주 만났었다. 그 친구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딱했고, 그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많은 조언을 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동창회에도 안 나온다면 너는 정말 못난 애라고 핀잔도 주고, 사람이 가는 길이 서로 다른데 무슨 우열이 있어서 옛 친구들을 안 만나느냐고 구박을 했다. 끝내 그 친구는 우리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때 생각난 단어가 바로 ‘콤플렉스’. 그 친구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우울해했고, 나는 전혀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았었다.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안 하고 지내는 나,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의미한다”는 말처럼.


그 친구가 내게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 전까지는 나는 정말 콤플렉스가 없었다. 그게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런 용어가 내 머리 속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나와 관계없는 단어였다. 그러나, 내가 그 단어를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 그 단어는 나를 구속하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항했다. 그와 힘 겨루기를 시작했고, 때로는 주저앉아 엉엉울고, 때로는 그를 짓밟고 일어서 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나는 콤플렉스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되었다.

콤플렉스! 그는 나와 동행하며 내 삶의 추진제 역할을 톡톡히했다. 오늘 내가 선 곳까지 나를 밀어부친 것도 바로 그였고, 멀리뛰기를 할 때 도움닫기 발판이 되어준 것도 바로 그였다. 나의 오늘,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오늘, 그래도 글을 씁네 하고 컴퓨터 자판이라도 두드릴 수 있게 된 오늘까지 나를 밀어준 것은 극성스런 부모님의 후원도 아니고, 지성의 상아탑이라는 대학도 아니다. 콤플렉스, 그가 나와 시소 놀이를 하며 나를 올려주었다. 내가 땅바닥에 닿아있으면 그가 반대편에서 무거운 무게로 눌러주고, 그러면 나는 다시 땅에서 높이 올라가고, 내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그가 앉은 쪽이 높이 올라가고, 다시 그의 무게가 묵직하니 짓누르면 나는 또 올라가고... ... 그의 무게가 무거워야만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시소 놀이. 내가 그와 함께 같은 쪽에 앉으면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 둘이 다 그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밖에. 서로 반대 편에 나누어 앉아야만 놀이를 할 수 있는 것이 시소의 특징이다. 다행히 나는 그의 반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와 시소 놀이를 할 수 있었다.
콤플렉스, 그와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고나할까. 함께 노는 동반자. 그러나 붙어있지 않은 동반자. 반대 편에서 서로 띄워주는 동반자. 콤플렉스, 그와 나는 시소 놀이의 동반자였다.


시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상대편의 무게가 가벼우면 반대쪽의 사람이 올라갈 수가 없다. 상대편의 무게가 묵직해야 반대쪽 사람이 떠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엇비슷해야 놀이가 재미있지, 무게가 확실히 차이 나면 놀이를 할 수 없다. 계속 땅에 붙어있거나, 계속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그 위치를 바꿀 수 없다.
콤플렉스, 그의 무게가 나만큼 묵직했던 것이 또한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내가 계속 그가 누른 무게 때문에 공중에 둥둥 떠있었거나,그의 가벼움 때문에 땅만 지키고 있었으면 내 인생은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혹 남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점이 있다면, 남들 모르는 것을 다만 몇 가지라도 더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약간이나마 흉내내는 것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내가 지닌 콤플렉스 덕분이다.
콤플렉스, 그가, 남들보다 좀더 나은 인물로 평가 받도록 나를 채찍질하며 몰아 부쳤고, 남 모르는 것도 알 수 있도록 나의 밤을 밝혀주었고, 남들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부추겼으니 나는 그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대학 공부를 하지 않은 콤플렉스가 나를 부추겨서 그랬는지, 나는 정치학을 전공한 남편의 변두리를 맴돌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선거 심리학에서부터 조직론까지 기웃거리며 읽었다.

그가 무역업을 시작한 얼마 후부터 나는 경제학 개론서를 읽기 시작했고, 그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들은 국제 무역에 관한 책을 읽으며 오히려 앞이 서서히 밝아지는 개안의 기쁨을 즐겼다.
아이들이 꼬물꼬물 재롱을 떨 무렵부터는 아동 심리학, 교육학책들을 읽었다. 독학한 책에서 배운 피아제 이론을 아이들에게 적용해보기도 했다. 학령기가 된 아이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꾸준히 관련 참고서들을 보았고, 청소년기에 덥어든 아이들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려고 대중문화에도 눈길을 주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은 콤플렉스가 무겁게 느껴질 때 더욱 열심이었다. 그 무게만큼의 반동으로 나는 뛰어올랐다. 내가 뛰어오른 높이는 콤플렉스의 무게와 반비례한 만큼이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이것저것 허겁지겁 섭렵했던 것은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콤플렉스, 그가 나에게 “See?”하고 물으면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Saw!”

이 글을 쓰는 동안 느닷없는 물음표 하나가 휙 날라와 내 가슴에 박힌다. 물음표의 갈고리가 나를 깔짝댄다.
“너는 이제 콤플렉스를 극복한 거야? 이제 콤플렉스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거야?”
답을 찾는다.
“나는 콤플렉스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
“... ? ...”
“... ? ...”
물음표란 놈은 원래 갈고리 모양이라 한번 콱 박히면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 물음표 하나 아직도 내 가슴에 그냥 박혀 있다.



그림을 다 그렸는데 있지도 않은 뱀의 발을 덧붙여 그린다. 쓸데없이!


세 아이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도 디지털(사이버) 대학의 대학생이 되었다. 4년, 140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더 똑똑해진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을 자체 평가하자면 독서의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지금의 나를 키워줬다.

‘지금의 나’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은 도서관을 통째로 머리 속으로 옮기는 물리적인 작업이 나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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