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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13. 2020

막스 에른스트 - 아기 예수를 때리는 성모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Max Ernst - The Virgin Spanking the Christ Child before Three Witnesses;


내가 늘 여행을 다니던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막상 코로나 때문에 출국을 할 수가 없으니 어디론가 떠나고싶은 생각이 마구 치솟는다. 독일 생각이 많이 난다. 역향수 증세가 잠잠해지다가 다시 도지곤 한다. 그리운 곳.


어젠 독일 뮌헨에 거주하는 브런치 작가님의 ‘밤베르크’ 글을 보면서 마음은 훌쩍 그곳으로 날아갔다. 독일 여기저기에 너무 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왔나보다. 몇몇 도시들이 눈에 선하다. 오늘은 살짝 눈을 감고 쾰른으로 날아가본다.


쾰른은 라인강가의 도시이다. 라인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에 상상도 못했던 경험을 했다.

강물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니,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것 아닌가? 그것 밖에 생각이 없었던 나였으니까 북으로 흐르는 강에 놀랄만도 하지. NordSee(북해)을 알고 있으면서 어찌 강이 북으로 흐르는 것에 그리 놀랐던지.


쾰른 대성당에 들어가 촛불 하나 밝히고, 바로 옆의 미술관에도 들른다. 그곳, 루드비히 미술관엔 좀 특별한 그림이 걸려있다.

막스 에른스트의 성모 마리아 그림이다. 맨 처음에 그 그림을 보고 어찌나 당황했었던지!


튼튼한 체구의 독일 아즘마가 아기를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리고 있다. 벌써 몇 번이나 맞았는지 아기 엉덩이는 빨갛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보곤 깜짝 놀랐다. 이웃집 아기 엄마가 아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다.


https://www.museum-ludwig.de/en/museum/collection/best-of.html


The VirginSpanking the Christ Child before Three Witnesses:
1926,Max Ernst Oil on canvas , 196 x 130 cm
MuseumLudwig, Cologne


<세 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 예수를 때리는 성모>라는 그림, 누구나 보는 순간 놀랄 것이다.

막스 에른스트가 유명한 화가이고 그의 그림을 인터넷 싸이트 여기저기에서 소개하면서도 <세 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 예수를 때리는 성모>는 잘 올려놓지 않는다.
불경스럽다는 말썽을 빚을까봐서 그런지.........

막스 에른스트는 이 그림 때문에 쾰른의 성당에서 들고일어나 파문을 당했다. 그가 파문 당하는 자리에 에른스트의 아버지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들의 파문을 주장하면서.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처음엔 너무 뜻 밖이라 놀랐으나 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예수님과 더 친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우리와 같은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 친밀감이 느껴진다. 아기 예수의 엉덩이는 빨갛게 보이고, 후광은 바닥에 떨어져있고, 화가 잔뜩 난 성모의 몸은 씩씩한 독일 여자의 체형이다.
성모와 아기 예수, 내 이웃의 가족들과 똑같이 느껴진다면 이건 불경한 것일까? 생각해보니 성모는 완전히 독박육아를 한다. 예수가 도대체 무얼 잘못했다고 저렇게 화가 나셨을까? 품위 없는 나는 성모의 저런 모습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성모님, 아, 당신도!

예수는 그 나이 또래 아기들이 엄마를 끙끙 앓게 하는 미운 짓을 했나보다. 그럼 맞아야지, 그렇지!


에른스트가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표현을 했을까? 카톨릭 교회의 중심 인물인 성모와 예수에 대해 이렇게 무례하고 신성 모독적인 표현을 하다니. 미술사가들은 에른스트의 이 그림을 다다운동과 초현실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말한다.

에른스트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전통적인 아카데믹한 규범 속에서 타성에 빠진 회화에 매를 들이대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을 은유화한 것이다.  내리치는 매가 전통적인 회화에 씌워졌던 후광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다. 신성모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쓰였을 뿐이다.


왼쪽의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세 명의 증인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이끈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문학가인 폴 엘뤼아르, 그리고 에른스트 자신이다. 이 그림의 독일어 원제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Die Jungfrauzüchtigt das Je­suskind vor drei Zeu­gen: An­dré Bre­ton, Paul Eluard und demMaler.>


겉으로 보기엔 화풀이 매질 같아 보이지만, 체벌까지 감행하는 성모는 예수를 엄하게 교육시키는 훌륭한 엄마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떠했던가?

엄한 훈계를 하기 이전에 이미 화가 치솟아서 버럭 화를 냈다. 제대로 훈육을 해야 하는데 내 기분이 괜찮으면 아이가 잘못해도 그냥 눈감아주고 넘어갔다. 뒤에서 밀어줄 때와 앞에서 끌어줄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항상 시행착오를 했다. 후회가 많다. 다시 한 번 성모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본다. 앞으로 성스러운 성모상을 보면 이 그림의 성모 모습이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이 그림을 보면서 불경스럽다고 놀라지 않고 예수님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고 말해서 에른스트가 파문당한 것처럼 혹시 내가 브런치 작가 파문당하는 일은 없. 겠. 지?


나는 지금 독일 쾰른에서 작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숲을 상징하는 고딕양식의 쾰른 성당을 뒤로 하고.

활짝 펴서 훨훨 날아갔던 날개를 접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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