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내 나이는 거부할 수 없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울을 향해 묵묵히 걷고 있다. 살짝 눈물이 돋는다. 햇살이 예리하게 내 눈을 찌른 것 같다. 스치는 바람이 너무 차가운것 같다. 아니, 좀더 솔직해지자면 쓸쓸한 것 같다, 그냥. 이 “그냥”이란 것은 살짝 눈물이 돋게 할 힘이 있는 것 같다. 내게 묻는다. 왜 “ㅇㅇㅇ하다” “ㅇㅇㅇ이다”고 쓰지 못하고 “ㅇㅇㅇ한 것 같다”“ㅇㅇㅇ인 것 같다”고 쓰고 있는가?
가을 바람이 휭~하고 내 곁을 지나간다. 아,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바람은그냥 스쳐 지나가거라. 불타는 나뭇잎에도 한눈 팔지 않으련다. 떨어지는낙엽이 내 가슴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마음을 꽁꽁 여민다. 나는 탐스러운 가을 열매만을 생각한다. 유행가 가사였던가, “익어가는 중”이라고.
아, 음악을 듣자. 이가을의 노래를.
여러 해 전에 하늘나라에 성급히 자리를 잡은 큰 오빠는 노래 리멘시타(L’immensita눈물 속에 핀 꽃)를 좋아했다. 이 가을엔 오빠의<리멘시타>와 내가 좋아하는 <고엽(Les feuilles mortes)>은 피해가야겠다. 그런데… 어쨌든 지금 우리집 거실엔 샹송이 흐르고 있다. 음악이 흐르다보면 리멘시타도 고엽도 나올 차례가 있을텐데. 안돼! 벌떡 일어나 음악을 바꾼다. <노트르담 드 빠리>. 아, 이것도 늪지대에 속한다. 빠지면 안 되는데.
온 산이 불타고 있다.
북쪽 산에 붙은 불길은 유전자에 새겨진 속도대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내 마음에도 그 불씨 하나 옮겨 붙는다. 이 불씨가 어떻게 꽃으로 피어나려나… 무겁게 가라앉아 버티고 있는 영감靈感을 억지로 쥐어짜본다. 이 계절의 습도처럼 메말랐다. 건조하다. 가슴 속에 하나 콕 들어와 박힌 단풍 잎에서 메이플 시럽은 나오지 않는다. 안타깝다.
불씨는 아직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나이에 맞는 지혜가 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그 불씨를 꺼트리면 안 된다고. 옆구리를 계속 쿡쿡찌른다.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불꽃은 영원히 타오르기만 하지 않아.
불꽃이 사그러들 때도 있지.
그러다가 다시 불꽃이 일어나기도 하고.
다만, 그 소중한 불꽃을 꺼트리진 않을거야.
불꽃이 사그라지더라도 불씨가 남아있으면 다시 살아나 활활 타오를 수가 있거든. 그러니 그 불씨를 잘 지킬거야. 천년을 타오를 불씨를 잘 지킬거야.
불꽃이 꺼지는 것은 다 탔기 때문이기도 하고,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가는 검은 구름에서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이기도 하지. 불꽃은 피어오르지 못해도 내 가슴에 남은 불씨를 나는 꺼트리지 않을거야.
가을은 강물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계절은 바람보다 먼저 저만큼 가있다.
곧 무채색의 계절이 올 터이니.
그래도 춥지 않은 것은 내 가슴 속에 불씨 하나 남아있어서.
다시 샹송으로 바꾼 음악은 <Bravo Pour leClown>. 에디트 피아프가 “브라보”를 연신 외치고 있다. 그래 나도 따라 해보자 브라보, 브라보! 뜻이야 어떻든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