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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21. 2020

가을 기도


가을기도


하나님.

지난 밤 내내 스윽 스윽, 휘이익, 잠결에 들리던 바람소리는 당신이 온 세상을 새롭게 색칠하는 붓 놀림의 소리였나요? 우리가 잠든 사이, 당신은 온세상을 타오르는 붉은 빛으로, 가슴 저리는 샛노란 빛으로 예쁘게 색칠을 해 놓으셨군요.

세상살이에 찌든 저희들의 우중충한 마음을 환하게 바꿔주시려고, 당신은 지난 밤 내내 온 숲을 휘 젖고 다니시며 빨간 색으로, 노란색으로, 갈색으로 저리도 아름답게 칠해놓으셨군요.


하나님.

당신을 만나러 가을 속으로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천천히 들어가면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을 아주 깊은 곳에서 드디어 당신을 만났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남녘 산촌의 한 감나무 골에서 당신을 만나고 제 가슴은 마냥 떨립니다.


감나무 골 입구에는 아담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양소리로 제 가슴을마구 뒤흔들어 놓으신 하나님. 탄력 잃은 고무줄처럼 불규칙하게 늘어진 촌로들의 찬양소리가 찬바람에 꽁꽁여민 제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수 십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님의 음성까지 섞여있는 그 찬양소리가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도시민들의 세련되고 멋진 화음이 어우러진 복음성가 가락이 아닌, 눈을 감고 천국 모습을 바라보며 부르는 듯한 시골 할머니들의 엿가락처럼 늘어진 찬양소리가 제 가슴을 마구 흔들어 놓았습니다.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하는” 모습이 진정이니까요. 정말 진심이라고 느껴지니까요.

하나님 당신은 뜻하지 않게 그렇게 불시에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제게로찾아오십니다.


하나님.

까치 밥 몇 개 매달린 감나무 아래서 당신을 만나고 제 가슴은 마냥 떨립니다.

가을걷이에서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이삭을 남기시라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우리 조상들은 까치를 위하여 감나무 열매를 남겼지요.

대한민국, 이 작은 나라, 까치 밥을 남기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그분들의 마음 속에도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들어가 계셨군요.


이 사진은 글 속에 나오는 감나무골이 아닌 길상사 가을 감나무 입니다.


하나님.

잎을 다 떨군 감나무 아래서 쪽빛 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여아, 하나님! 가슴을 칩니다.

지난 여름, 잎이 무성한 숲속을 거닐며 숲의 우거짐에 감탄하던 제 마음은 이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을의 감나무 아래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잎을 다 떨구어 내어야만 눈부신 쪽빛 하늘이 비로소 시원스레 보이는군요. 잎으로가려져 있던 하늘 구석구석이 다 드러나는군요. 눈이 멀것만 같이 푸른 쪽빛 하늘이.


하나님.

지난 계절 내내 가을에는 탐스러운 신앙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여 왔습니다. 달디 단 열매, 크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미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군 감나무 아래에서 어리석은 제 자신에 가슴을 칩니다.

왜, 다 비워내게 해달라는기도를 못했을까요?  왜, 다 떨구어내고 가벼워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못했을까요?  반들반들 윤기 나는 푸른 잎들을 다 떨구어 내야만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진리를 왜 생각지 못했을까요?

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긁어 모아 나무 아래 묻어두는 촌로의 손길을 보며, 다음 해의 싱싱한 나무와 좋은 열매를 위해 부엽토를 만드는 그의 손길을 보며 기도합니다.  

저를 썩어지는 낙엽이 되게 하소서!  빛나는 열매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십시오.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의 옷은 다른 사람에게 입히십시오. 저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낙엽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그깟 감 나무, 가을 감, 시장에 가면 흔하디 흔한 가을 열매가 제게 참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감나무 중간까지 올라가 끝이 갈라진 길다란 대나무로 감을 따는 감나무 골의 친구, 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예쁜 말 한마디 들으며 저는 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깟 감 안 따도 그만인데, 매달린 채 삭아도 아까울 것도 없는데, 아버지가 매달린 감 쳐다볼 때마다 다 따지 못한 것을 속상해 하셔서 아버지 속상해 하지 말라고 이렇게 따는 거라는 그의 말이 참 아름다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계명이 명시된 성경책을, 찬송가를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저보다 더 잘 지키는군요. 그 마음은 참으로 많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있군요.


감나무 열매 몇 개 얻어와 집안에 펼쳐놓았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감과 똑 같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그 감엔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하는 감나무 골 할머니들의 찬양소리가 들어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까치 밥 몇 개 남겨 피조물들을 먹이려는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경하는 한 젊은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이 작고 작은 감 하나 속에.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열매가 되기 보다는, 푸석푸석 썩어져 거름이 되는 낙엽이 되겠다는 저의 기도도 들어있습니다.  잎을 다 떨구어내야만 하늘이 좀 더 많이보인다는 덜어냄의 진리, 비움의 진리도 들어있습니다.


이제 가을은 그 끝머리에 다다라 있습니다.

스산한 거리엔 마로니에 잎이 지고, 릴케는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오 헨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녀를 위하여 마지막 잎새 하나를 매달아두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가을 편지를 씁니다.


저는 하나님께 편지를 씁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에 실어 하늘나라로 띄워 보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고요한 밤, 저만의 골방에 앉아 하나님의 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고등학교 동창생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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