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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23. 2020

집밥

<집밥>


직업, 나이, 신분에 관계없이 외식이 일반화되었다. 끼니 때 집을 떠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외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집 밖에서의 모임을 위해서, 가족끼리 기분전환으로, 의미 있는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히 외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식사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는 가정주부도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해도 될 시간인데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가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많다.
외식을 하면 별미를 먹는 재미도 있고, 주부들은 부엌일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집밥을 제일로 꼽는 까닭은 무엇일까?
밖으로 돌며 산해진미를 다 맛보는 가장도 집밥을 제일로 꼽고, 퓨전 요리의 맛에 길들여진 자녀들도 집밥을 제일로 꼽고, 부엌일의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 주부도 집밥을 제일로 꼽는다.
우리나라에 “엄마 손 맛”이라는 말이 있듯이 독일에 있을 때 식당에 가면 “할머니 조리법”으로 준비한 메뉴가 각 식당의 메뉴판에 꼭 끼어있고, 런던에서도 “집의 조리법” 메뉴를 보았다.

주로 소스나 스프에 그런 말이 붙어있다. 식도락을 즐기는 미식가들에게도 “집밥”은 모든 음식의 근본이고, 산해진미 식탁 앞에서도 불현듯 그리워지는 것이 바로 “집밥”이다. 어머니의 요리솜씨가, 아내의 요리솜씨가 남보다 못하여도 집의 밥은 언제나 그리움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 신생아 때 모유를 통해서 익숙해진 맛이 본능적으로 기억되고, 어머니들이 이유식에 그리움이라는 양념을 듬뿍 뿌려두었나보다.

먹여주는 대로 먹는 시기를 지나서 내 손으로 음식을 떠 먹는 시기에도 어머니는 손맛을 슬쩍슬쩍 버무려 놓으셨나보다. 맛있다는 것은 특별한게 아니라 그 맛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시간은 어머니의 손맛에서 아내의 손맛으로 자연스레 입맛을 옮겨놓는다.


많은 주부들이 집밥의 중요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물론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달라서 누구의 방법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숙식을 집에서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활 방식이다.

모든 어머니들은 젖의 성분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것이 생명줄인 것을 알고 젖을 물린다. 본능이다. 초유를 먹는 신생아들도 본능으로 젖을 빤다.

식구들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주부들에게(꼭 여자여야 할 이유는 없다. 남편이나 아들이면 또 어떠랴)도 젖을 물리는 어미의 동물적인 본능이 있다. 생물학이나 영양학에 전혀 무식한 주부도 식구들의 뼈와 근육과 살이 되는 먹거리를 분별하며 준비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있으니 말이다.

주부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소홀히 하고, 식구들이 준비된 집밥을 마다하고 외식을 일삼는다면, 이런 상태가 장기간 계속된다면, “식구로 묶인” 가족 관계에 작은 틈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사람이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말을 들어서 물리적인 답을 하자면 사람은 밥으로 산다. 그런데 그냥 밥이 아니라 <집밥>이다. 우리 식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 집 밥으로 산다.

왜? 집밥은 단순한 육의 양식이 아니라, 사랑이 담겨있는 영육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상품화된 육의 양식이 아니라, 힘의 원천인 사랑이 거기 듬뿍 들어있는 영의 양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밥은 소중하다.


한 밤중에 들어와도 집에 와서 밥 먹으려고 밥을 안 먹고 왔다는 남편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빵을 먹어도 집의 식탁 앞에 앉아 내가 끓인 차를 마시며 빵을 먹는 자식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나의 이러한 작은 행복이 ‘여성으로서의 고정된 역할에 대한 하찮은 행복’으로 비칠지라도, 집밥을 기본으로 삼고 늘 집밥을 그리워하는 식구들에게 집밥을 마련하는 시간이 내게는 행복이다.



특별한 날 상차림. 생일이면 미역국이, 그냥 초대에는 된장국이 추가된다.


왼쪽-딸 생일. 오른쪽- 첫손녀 백일 , 집에서 만든 포토존.  며느리가 호텔의 화려한 아기 생일잔치를 원하지 않았다. 아기가 기어다니며 놀기에는 집이 최고라고.

아래 글은 오래 전 런던에 거주할 때 썼던 글입니다.


< 단순하게도 그깟 맛난 음식에 행복해 하지.>

봄은 식탁 위에도 어김없이 오는데
봄동 겉절이도 없는 식탁, 냉이 무침도, 씀바귀 나물도 없는 식탁,  내음 향긋한 애탕도 없는 식탁. 별미로 빚어보는 쑥개떡  조각도 마련할  없는 이국의 .
돼지고기를 보면 입가에 물집이 자글자글 잡힌다는 구제역 생각에 구역질, 쇠고기를 보면 뇌가 스폰지처럼 녹는다는 광우병 생각에 공포.
  뜻과는 다르지만 "먹고 살기가 어렵다" 말이  입에서 자주 나온다.
소가 미친 것은 당연하다. 내가 소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나도 미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먹기 싫은 음식, 정말 죽어도  먹겠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면, 그것도   번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내내 먹어야 한다면 미칠  밖에 없다.
굶어 죽을 지경까지 배고픈 상황을  겪어봐서 쉽게 하는 소리일지 모르나, 먹고싶은 것을 참는 것보다는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는 괴로움이 훨씬  크다.
소는 그래서 미쳤을 것이다. 동료들의 시신으로 만들어진 밥을 먹어야 하는 소는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김밥, 아니,  쌈밥을 해먹었다.
나의 김쌈밥은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러나 화려한 별미로 가끔 식탁에 올려놓는 요리, 미완성 요리다.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때문에 미완성으로 내놓는  어설픈 요리를 우리 식구들은 좋아라고 먹는다. 미리부터 계획적으로 준비를 하면 구색 맞춰서 야채를 준비하지만, 주로 냉장고에 묵고있는 야채 조각들을 주워 모아 준비를 한다. 각종 야채를 얌전히  것도 없이 굵은 채로 썰어 색깔 맞춰 접시에  둘러 담고,  가운데로 와사비 간장 종지를 놓는다.
파래가 섞인 마른 김을 그대로 살짝 구워 6등분하여 썰어놓는다. 밥을 초밥으로 비벼서  놓으면 . 너무 염치없는 주부인가
냉장고 야채 청소하는  같아서 민망하면 아보카드  , 그리고 주황색 연어알 약간을 마련하여 함께 낸다. 게살이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게맛살도 괜찮다.
아보카드를 와사비 간장에 찍어서 다른 야채  가닥과 함께 김을 싸면  맛이 별미다.

오늘은 다행히, 그이가 지난번 출장  우크라이나에서 사다준 연어알도 있고, 게살도 있다.
애들은 "맛있다, 맛있다" 연발하며 잘도 먹는다. 요즘은 조카가 와있어서 먹새  청년들이 셋씩이나 되는 우리집,  애들 숟가락질에 덩달아  숟가락도 오르락내리락 저절로 움직인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백열등의 촛불모양 식당전등도 분위기를 잡는데   한다. 식탁에 올려진 것이 푸짐한 것도 아니고, 달랑  접시 하나(빨간 피망에 노란 단무지까지 껴서 색깔은 화려하다), 김그릇, 그리고 각자의 밥그릇과 물컵 뿐인데 아이들은 별미를 먹는 맛에 신이 났고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 , 마당에서 꺾어다놓은 동백꽃  송이도 식탁을 빛낸다.

식탁에 함께 있지 않은 그이가 문득 생각났다.
밥을  소담스럽게 복스럽게  먹는다고 어른들에게서 칭찬깨나 듣는  사람. 어떤 이는 나의  턱에 복이 들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이의  먹는 모습에 복이 담뿍 들었다고 하니,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복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맛있는 것을 하면, 그게 별로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딴엔 별미라고 마련하면, 거의 매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이가 마음에 걸린다. 회사  식당의 김치찌개,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고 두부 큼직큼직하게 썰어넣고 끓인  김치찌개가 그렇게 맛있다고 자랑을 하는 그이. 김치찌개에 넣는 돼지고기는 얌전얌전하게 썰면  된다. 숭덩숭덩 썰어야 한다.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 그이가 집밥을 얼마나 먹고 싶어할까.
며칠 전에  완서 님의 <아주 오래된 농담> 읽었는데 거기서 < >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래, 모든 남자들은  집에서 지은 밥을 먹고싶어 하지.
많은 남자들이  단순하게도 그깟 맛난 음식에 행복해 하지.
세상을 마치 자기 손에 쥐고 주무르는  으스대는 대단한 남자들이 그깟 맛난 음식  그릇에 행복해 하지.
많은 아내들이  단순하게도, 식구들 맛난 음식에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행복해하지.

끼니 때가  되도록  대책 없이 게으름부리고 앉아있다가, 궁여지책으로 냉장고 청소하듯 야채 쪼가리들 긁어 모아 마련한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은   게으른 어미 민망하게도 행복해 했다. 셋만으로도 식탁이  찬듯한  아이들이 탐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는 나도 행복했다.
그런데,  마음은   베어먹은 사과모양,  떨어져나간 사과 모양인 것을 어쩌나
봄이라고 해도 먹을  하나도 색다를  없는 이국에서 달래 냉이 씀바귀  원추리 그런 것들이 그리웠다.    남자아이들 셋이서도 가릴  없는 식탁의  의자 하나가 자꾸만 눈에 띠었다.

그이가 보고싶다.
봄이 먹고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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